@ 880년, 가을 1일, 밤
: 단티아, 여름 광장
# 갈란테 일레인
어수선했던 발걸음들도 결국 더 나아갈 곳이 없이 막혀 서자, 하나 둘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높다란 붉은 성채의 성벽이 그 한쪽 끝을 막아선 넓은 광장은, 이미 어림잡아 세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거기에 끝을 가늠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고 있다. 이젠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어도 혼자선 뭐든 끝나기 전까진 돌아갈 길을 만들 수 없을 것 같다.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시장에서부터 줄곧 그 뒤를 따라온 남자와 또 다른 사람들이, 또 다시 크게 소리친다. 횃불을 든 이들이 골목골목을 돌며 큰 예배가 있다며 다들 횃불을 들고 나오라고 외쳤고, 숙모님의 만류도 못 들은 체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 큰 도시의 반절을 가로질러오면서도, 여전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누군가 붙잡고 물어볼까 하다가도, 누구도 믿어선 안되고 말은 무조건 아껴야 한다던 바던의 말을 기억하며 계속 참아왔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단 한 마디도 낭비해선 좋을 게 없다.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신은 이 세상 모든 신을 닮은 종족의 창조자이시다. 신은 전능하시며 또한 잔인하시고 동시에 자비로우시다. 인간들은 그러한 창조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행하라 명한 일을 해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고 사실이다. 신을 위해 신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것은 이교도가 아닌 이상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신의 가르침을 따를지언정, 그 누가 감히 신의 이름을 빌려 뭔가를 할 수 있단 말이지?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또 다시 여기저기서 역겨운 구호가 퍼져 나온다. 진짜 이교도가 있다면 바로 저들이다. 신의 뜻을 곡해하고 자신들 입맛에 맞춰 써 먹으려 한다. 그 시끄러운 입을 전부 틀어 막고 싶지만, 데보니의 일을 생각하면 나서지 말고 이대로 다물고 있어야 한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찾으려는 것인지, 구호를 마친 남자는 곧 주변을 돌아본다. 나를 포함해 자신을 둘러싼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마주본다. 동시에 횃불을 들지 않은 오른팔론 손바닥이 위로 보이게 한 채 살짝 들어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잊지 않고 입을 뻐끔거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거린다. 구호를 따라 하라는 무언의 강요인 듯 하지만, 다들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뿐 아무도 따라 하지 않는다.
잠시 후 또 다시 인파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잠시 성벽을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려 섰던 남자는 큰 소리로 외치며 주위를 둘러 본다. 하지만 사람의 벽을 넘어서 들리는 그 당연한 구호가, 사람의 벽 안 쪽에선 아직 울려 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여봐요. 이게 뭔 일이래?”
“그려. 이거 얘기 좀 혀 봐. 대체 머가 먼지 알 수가 있어야제.”
남자의 오른편에 서 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중년의 조금 뚱뚱한 아주머니가 그에게 질문을 던지자, 곧이어 그 옆에 있는 할아버지도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나만 모르는 게 아니었네.’
“아. 얘기 못 들었어요?”
“이, 뭐. 대체 멋들 하고 있는겨? 다들 나오라 그르길래, 난 뭔 큰 예배라도 있는 줄 알고 말여. 어? 걍 따라 왔는데 말여…”
“아, 그러니까, 이거요? 그게, 흐하하하하 하하하하.”
한 눈에 들어 올 정도로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의 물음에 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마치 연기를 하 듯 어설픈 소리를 내뱉던 그는 잠시 후 자연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입을 연다.
“오늘 밤, 왕을 쫓아낸답니다.”
“에? 와, 왕을 쫓아낸다고?”
“그게 먼 개풀 뜯는 소리여.”
“뭐? 왕이요?”
‘왕을 쫓아낸다고?’
남자를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에선 놀라움이 읽힌다. 아마 내 표정 역시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상을 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데보니의 일은 마치 꿈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평온했던 단티아의 지난 몇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갑작스럽다.
“그게 말이죠…”
“그… 뭐여… 알아 먹게 좀. 어, 말 좀 혀봐. 왕을 쫓아낸단게 대체 먼 말이여…? 내가 이 나이 먹도록 말여. 그런 건…”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남자는 더듬더듬 말을 잇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다 말고 또 다시 큰 소리를 지른다. 옆에 선 아주머니가 남자의 눈높이까지 손을 들어 올려 손사래를 친다.
“아이, 총각. 그거 좀. 응? 잠깐 그만두고. 그, 하던 얘기 있잖아. 그거 좀 계속 해봐.”
“아, 그게 좀… 그럼, 그럴까요?”
남자는 높이 치켜 든 횃불을 들고 있던 손을 바꿔 든다.
“그럼, 예. 잠시만요.”
그는 가벼워진 왼손으로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한다. 나를 포함해 조금 전 질문을 던진 아주머니와 할아버지, 또 말 없이 듣고만 있는 두 명의 젊은 여자와 목 뒤까지 늘어지는 긴 흰색 두건을 쓰고 있는 남자까지 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던 작은 원이 더욱 더 작고 견고해진다.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스쳐 본 남자는, 곧바로 검지손가락을 쭉 편 왼팔을 들어 등 뒤를 가리키며 입을 연다.
“지금 저기서 수도자들이 중요한 걸 좀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일 아침이면 단티아 왕족이란 놈들은 모두 사라진단 말이죠.”
“왕이 없으면 우린 어떻게 산대?”
들뜬 목소리의 남자의 말에 아주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한껏 말 끝을 올리며 반문한다.
“에이, 아줌마. 왕이 없다고 못 살긴요. 없으면 살긴 더 좋지.”
“그게 가능하긴 한겨? 왕 없이 멀 어찌 산단겨?”
이번엔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남자는 왼손을 휘휘 저으며 실소를 머금은 채 대답을 잇는다.
“하, 그 참…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게 어련히…”
멀리서 또 다시 큰 소리가 들려오자 대답을 끊은 남자는 고개를 돌려 성채 쪽을 본다. 그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의 커다란 코에 자꾸 시선이 간다. 잠시 눈치를 살피는 듯 고개를 몇 번인가 끄덕이며 둘러보던 그는, 다시 이 작은 모임으로 시선을 돌린다.
“어쨌든, 왕이 없어도 다 잘 될 겁니다. 그게, 아니. 오히려 왕이 없으면 더 살기 좋아질 거에요.”
“아, 난 이해가 안되네. 그니까 총각. 좀 더 자세히 말해봐. 난 여태껏 부엌일만하고 살아서 그런 거 잘 몰라.”
“그러니까. 지금 왕이 있다고, 수비대가 있다고…”
남자는 잠시 고개를 돌려 성채 쪽을 바라 본 뒤, 다시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며 말을 잇는다.
“하는 게 뭐가 있나요? 그런 거 없어도 우린 다 살 수 있습니다.”
“왕이 없다고 뭐 좋아지는 거라도 있나?”
“왜 없겠어요? 참나.”
웃으며 짧게 코웃음을 친 그는 한층 올라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왕이 없으면. 그러니까 저 단티아란 놈들이 없어지면, 왕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됩니다 수비대가 없으면 억지로 수비대원이 되거나 세금을 뜯길 필요도 없고요.”
“그게 진짜여? 세금이 필요 없단 말여?”
“세금뿐인가요. 할아버지는 별로 상관 없겠지만, 여기 젊은 분 사람들은 저 놈들 땅에서 대신 농사 안 지어도 되요. 그리고 옷이니 이불이니 만들어 바치거나 할 필요도 없어지고요.”
“그려? 나야 머 안 뺏어간다면야 좋긴 한데… 근데 말여. 그 해적 놈들이나 저기 산도적 놈들은 어쩐댜?”
“그건 말이죠. 하아…”
남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는 또 다시 성채 쪽을 슬쩍 흘겨 본 뒤 말을 잇는다.
“지금 이 왕이랑 그런 놈들이랑 없애버리고, 그러는 게. 여기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남부 전체에서, 세상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어요. 벌써 끝장낸 곳도 있고, 또 금방… 그럴 게 있어요. 그러니까…”
남자는 횃불을 들지 않은 왼손을 다시 들어 목덜미를 한 번 긁더니 오른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옮겨 든다.
“우리가 이렇게 배 곪으며 사는 것도, 전부다 저 왕이라던가. 지들이 귀족이라고 부르는 지 잘난 놈들이 뺏어가기 때문이니까. 그러니까. 저 것들을 다 몰아내고, 죽여 버리면. 더 이상 도적놈들이 설칠 이유도 없어지는 거라고요. 애초에 세금 뺏길 일도, 왕을 위해 죽을 일도 없어지면 도적들도 결국 마을로 돌아와 살게 될 겁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무작정 손을 뻗어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기 시작했고, 잠자코 듣고 있던 나도 이를 피할 수 없다. 이 작은 사람의 벽 안에 있는 이상 땀에 절은 그의 손을 잡을 수 밖에.
나를 마지막으로 모두의 손을 한 번씩 잡은 그는, 모여선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연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다 같이 외쳐 주세요. 그러면 저 놈들 모두 없애고, 행복해 질 수 있으니까.”
단순한 외침만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데보니의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해 보였던 것은 손에 들린 각종 연장들과 빈 자루들이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남자 역시 데보니의 그들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저기, 근데 말야 총각.”
“네? 왜요.”
“이렇게 모여서 소리 지른다고 뭐가 되긴 하는 거야? 왕이 근위대라도 끌고 나오면 우리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저기 수비대도 있고 말이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주머니의 질문에 남자는 다시 웃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하하하… 아니, 그런 건. 흐하하… 걱정… 하아 하아.”
웃느라 잠시 대답을 멈춘 남자는 말을 멈추고 호흡을 고른다. 헛기침을 서너 한 그가 다시 입을 연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벌써 수도자들이 다 손을 써 뒀으니까, 여러분은 그냥 같이 소리쳐 주기만 하면 되요.”
“손을 써뒀다는 건 무슨 소리래? 그럼 수비대는 안전… 여기 이러고 있어도 말야, 아무 해도 없단 얘긴가?”
“그런 자세한 건 모르셔도 되고요. 일단은 구호만 같이 외치면 다 알아서 됩니다. 뜻 있는 수도자들이 나서서 해낸 일이니까 여러분은 믿고 따라오기면 하면 됩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다시 성채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 머여. 왕을 쫓아내 봤자, 어차피 딴 넘이…”
남자는 할아버지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손을 뻗어 할아버지의 말을 제지한다.
잠시 후, 또 다시 성채에 가까운 광장 안쪽으로부터 큰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서야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자 지금이에요.”
잽싸게 말을 마친 남자는 숫자를 세 듯 크게 고개를 한 번, 또 한 번 끄덕인다. 그리고 마지막 끄덕임과 함께 큰 소리로 그 끔찍한 구호를 외친다.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자,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그의 구호가 끝나자 마자 여태껏 묵묵히 듣고만 있던 옆의 젊은 여자 중 한 사람이 더듬더듬 구호를 따라 외쳤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 모여선 사람들을 굳은 얼굴을 한 채 둘러보던 남자가 아주머니를 쏘아본다.
“왜 안 따라 해요? 따라 하셔야죠.”
“나는 그게. 그… 진짜 괜찮은 건가? 총각, 난 저기. 먹여야 할 새끼가 셋이나 있어서 말야.”
“에이, 그런 걱정을 마시라니까.”
얼굴을 한층 더 찌푸리며 대답을 마친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조금 전 구호를 따라 외친 여자를 보며 활짝 미소 짓는다.
“조금 전엔 정말 잘 하셨어요. 다음엔 조금 더 크게.”
그는 그대로 고개를 돌린 뒤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본다
“걱정 안 해도 되요. 근위대고 수비대고 말이죠. 난 체 하던 놈들? 그것들 다아 없어졌고. 우리들, 어? 우리들 편이니까.”
자신의 가슴팍을 몇 번이나 두들기며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나를 돌아 본다.
“너도 잘 따라 외쳐. 저런 개 같은 놈들을 몰아내야,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이 굶지 않고 살 수 있어. 알았지?”
거듭 당부를 한 그는 다시 성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횃불을 왼손으로 다시 바꿔 든다.
그의 뒤통수에 조금 전까지 미소 짓던 얼굴이 겹쳐진다. 동시에 데보니에서 일어났던, 크루니에서 일어났다던 일이 떠오른다. 대체 우리 가문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히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아무런 기미도 없이 수비대가 그들의 창 끝을 거꾸로 겨누었던 이유. 그들은 딱히 아버지나 숙부님, 혹은 일레인 가문을 목표로 하진 않았던 것이다.
‘혹시라도 알아보면 어쩌지?’
문득 떠오른 걱정에 고개를 떨구고 가슴팍과 양팔을 살핀다. 단티아에 도착해 배를 처분한 후 골목집을 살 때 버려져 있던 옷들 중에서만 골라 입고 있다. 시장에서부터 광장에 올 때까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꺼낸 적 없으니 딱히 책 잡힐만한 건 없겠지.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남자가 외치는 구호 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 본다. 어느새 다시 고개를 안쪽으로 돌린 그는, 다시금 한 사람 한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몇 일전까지도 고개 숙여 인사하던 병사들이 같은 말을 외치며 길거리를 누비고, 같은 말을 외치며 저택에 쳐들어 오려 했다. 같은 말을 외치며 저택을 털고 불을 놨을 것이며, 같은 말을 외치며 또 다른 저택을 찾아가 박살을 내 놨을 것이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지금 따라 해야 한다. 하지만 떠 올리고 싶지 않아도 가린 형의 뒷모습이, 거리를 차지했던 그들이 생각난다. 움직여야 하는데, 혀와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젠장,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택에 돌아오셨을까? 가린 형은? 바던과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겠지?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남자의 구호가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옆에 선 두 젊은 여자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청을 파고든다. 남자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본 뒤, 곧바로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자, 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저, 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방금까지 좌우로 눈치를 살피던 아주머니가 조금 굳은 얼굴을 한 채 더듬거리며 따라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를 쏘아보는 남자의 눈길이 보다 강렬하게 느껴진다.
“으… 어, 아…”
반사적으로 실 없는 소리가 튀어나오고, 몸이 뒤로 젖혀져 반걸음 정도 물러섰다. 그가 얼굴을 더 바짝 붙이며 쫓아오고, 그의 손에 들린 횃불 역시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을 만치 가까워진다.
“이놈 봐라. 이거 혹시…”
“아이, 니… 그으…”
또 다시 헛소리를 뱉어버렸다.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하지만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과 함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가 않는다. 뛰어서 도망도 칠 수 없게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젠장. 어째.’
내가 일레인이란 걸 이 남자가 알아 낸 걸까? 알고 있던 것인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절대로. 데보니에서조차 길거리에 혼자 선 날 보고 신경 쓰던 이는 없었다. 고향에서조차 그럴진 데, 다노니아에선 더더욱 불가능하다. 이런 자가 일레인이란 이름을 생전 들어는 봤을까? 그냥 단티아에 살던 다른 귀족 자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 그 정돈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꼴을 보곤 무슨 수로?
“이 자식 이거 암 말도 못하고 이상한데. 머리 깎아 놓은 것도 그렇고, 얼굴도 허연게…”
횃불을 들지 않은 남자의 오른손이 내 얼굴 쪽으로 다가오고, 피하고 싶어도 힘 없는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손이 볼에 닿는 순간, 아주머니의 손이 남자의 손을 잡아챈다.
“아이, 총각. 왜 그래. 아직 어린애한테.”
그는 아주머니를 향해 재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동시에 위협이라도 하듯 다른 손에 들린 횃불을 아주머니의 얼굴로 가져간다.
“어린애라뇨?”
그는 크게 콧방귀를 뀐 뒤 말을 계속한다.
“열네댓은 돼 보이는데. 난 이 놈보다 작을 때부터 부두에서 짐도 나르고, 똥도 퍼 나르고 그랬다고. 단티아 성내에 귀족 새끼들 빼고 이렇게…”
“에이그. 그거야 총각 얘기지. 나도 내 새끼들한테 집안일이나 심부름 빼곤 안 시키는 데 뭘.”
아주머니는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놓은 뒤, 곧바로 내 어깨를 집는다. 그 손길을 따라 나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게 또 다시 어깨가 움츠러든다.
“얘야. 겁먹지 말고, 처언천히 말해 보렴. 너 뭐하는 애니?”
“아, 저… 그…”
어깨를 뒤로 빼 보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또 다시 실 없는 소리를 내뱉어 버렸다. 양팔 전체에 닭살이 돋고, 온몸이 차게 식는 느낌이다.
‘젠장, 또. 안돼 진짜.’
코 앞에 얼굴을 들이민 아주머니와 남자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일단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더 이상의 헛소리를 막기 위해 양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 막는다. 날 살리기 위해 몇 명의 생사를 알 수 없어졌는가. 그리고 몇 사람이 숨어서 날 기다리고 있는가. 내 목숨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죽을 거라면 데보니에서 죽었어야지, 이 먼데서 죽기 위해 살아온 게 아니다. 소식을 알 수 없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난 절대로 죽을 수 없다.
‘우선 심호흡이라도…’
“얘야. 괜찮으니까 나 좀 보렴.”
어느새 반대쪽 어깨에도 올려진 손이 나를 살짝 흔든다.
눈을 뜨란다고 뜨는 게 더 자연스러울까? 이대로 감고 있으면 역시 의심 사려나? 그냥 확 누워 버릴까? 어느 쪽도 부자연스럽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양손으로 입을 가린 그대로 천천히 눈을 뜨기로 한다. 백 번을 다시 생각한다고 해서, 아니 이런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한단 말인가.
“너 혹시… 그, 마. 말을 못하는 거니?”
‘이거다.’
여전히 정면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아주머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천천히 건넨 질문.
“음, 으으음…”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크고 천천히 끄덕였다. 코 끝이 싸해지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래,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은 아니다. 자꾸만 미간이 좁아지려는 걸 의식적으로 힘을 준다. 돌파구를 찾아 놓고 엉뚱한 이유로 망쳐선 안 된다.
“거봐 총각. 우리 딸애 정도 밖에 안 되는 거 같은데, 괜히 소리는 질러서…”
“아니, 비켜봐요.”
남자는 잔뜩 굳은 얼굴로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아주머니의 양 손을 떼어낸다.
“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세상 어떤 벙어리가 이렇게 깔끔하게 머릴 자르고 얼굴에 멍하나 없나요? 이 새끼 이거, 어디 돈 많은 배불뚝이가 쫄아서 지 아들을 대신 내보낸 거 같은데.”
남자가 내 오른쪽 어깨를 붙잡고 몸을 돌려세웠다. 그의 손가락이 어깨를 파고들고, 날 노려보는 그의 눈길은 날카롭다. 왼쪽 볼에 뜨거움이 그대로 전해질만큼 가까이 횃불을 들이댄 그가 다시 소리친다.
“너. 새끼 배불뚝이! 니 부모들 어딨어? 벙어리니 어쩌니 수작부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러면 특별히 넌 살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