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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땅의 주인
작가 : 두부한모
작품등록일 : 20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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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신을 위하여 (6)
작성일 : 16-08-20     조회 : 464     추천 : 0     분량 : 1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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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0년 가을 2일 저녁

 

 @ 단티아 남쪽 근교

 

 # 단티아 신전 대신관 발리르.

 

 

 “됐어! 전부 작업 멈추고 모여!”

 

 점심 무렵부터 일을 감독해 온 놈들 중 하나가 큰 소리를 친다. 신전에 저런 놈이 있었나 몇 번이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잡히는 게 없다. 다들 같은 옷에 같은 머리, 뭣보다 기백 명이 넘는 신관과 수도자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것도 어려운 노릇이고, 반역자들이 신분을 위장하는 건 흔한 일이니 보이는 그대로 믿을 수도 없는 일.

 

  “저… 대신관님. 이제 그만 하셔도…”

 

 쭉 옆에서 같이 땅을 파 온 젊은 신관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려 그를 바라보니 말라붙은 핏자국이 상의를 거진 덮고 있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퉁퉁 분 코는 중간쯤이 미묘하게 휘어 있다. 오른 눈두덩은 완전히 파래서 대체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이 나이의 신관이라면 돈 깨나 있는 집 자식일 터이나, 누군지 전혀 모르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 낯이 익은 것도 같지만, 얼굴이 이리 엉망이어서야 부모조차도 알아보지 못하겠지.

 

 “그, 그래… 그러게나.”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손에 들고 있던 흙바가지를 슬쩍 내려 놓은 뒤 허리를 쭉 폈다. 날이 밖을 때까지 이어진 놈들의 폭행과 여태껏 계속 된 쉼 없는 작업으로 허리와 등, 팔뚝과 허벅지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아프다고 말해도 놈들이 치료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듣지도 않겠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눈알만 슬쩍 굴려 주위를 살펴 본다. 고작 한나절 땅을 판 것 치고는 제법 큰 구덩이가 되었다. 어느덧 깊이는 이미 사람 키를 훌쩍 넘어섰고 사람을 대충 스무 명쯤 길게 눕히면 이 끝에서 저 끝이 닿으려나.

 어쨌든 조금 전 놈의 말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옮기는 이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되레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알테어 대신관은 새벽부터 행방을 알 수 없고, 크리스텁 대신관도 일찌감치 밖으로 나가 놈들에게 무어라 한 이후 눈에 띄지 않고 있다.

 무엇이던 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지만, 역시 나서는 건 성격에 안 맞는다.

 

 “뭐하고 있어? 다들 모이라니까! 빨리!”

 

 예의 그 놈이 다시 큰 소리를 친다. 다시 슬쩍 주위를 살펴보자, 이번엔 더 많은 시선이 내게 쏠려 있다.

 

 “대신관님. 어떻게 해야… 다들 이쪽을 보고 있습니다.”

 

 더 가까이 붙어선 젊은 신관이 작은 소리로 물어 온다. 뭘 어떻게 해? 나도 몰라.

 날 쳐다보고 있는 예의 그 놈의 시선이 다시 느껴진다. 여기서 이대로 계속 버틴다고 땅 속으로 꺼질 수도 없는 일. 종일 땅을 파낸 팔뚝과 허리가 아프고, 그것보다 놈들에게 맞은 곳이 더 아프다. 또 때리려 들기 전에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낫겠지. 근데 대체 저 놈들은 누구길래 이러는 건지.

 

 “글쎄, 일단 가보세나.”

 “예. 예, 대신관님.”

 “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에게 작은 소리로 대답을 한 후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것만으로도 등과 가슴팍이 아프다. 이대로 누워서 자고 싶고, 더는 일하고 싶지도 맞고 싶지 않다. 누가 내 대신 맞아준다면, 돈이야 얼마가 됐던 쥐어주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들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금방이라도 무릎이 풀려 쓰러질 것 같다. 차라리 쓰러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쓰러져서 안 움직이면 좀 편할까? 아니면 놈들이 와서 또 때리려나? 젠장, 그렇겠지. 그럼 움직일 수 밖에 없지.

 

 “대신관님. 절 붙잡으세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젊은 신관이 어느새 다가와 어깨를 내민다. 그래, 뭐가 됐던 맞는 것 보단 낫겠지. 오늘따라 하늘을 낮게 덮은 회색구름과 땅을 스치듯 낮은 바람이 고마웠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

 

 “대신관님. 대신관님.”

 

 누군가 팔을 붙잡고 흔들어 대는 통에 정신을 차렸다. 기껏 모아 놓고는 잠깐만 기다리라던 놈들의 말에, 잠시만 쉬자며 벽에 기대 앉았다. 그 상태로 깜빡 잠들어 버렸던 모양이다.

 

 “대신관님, 놈들이 대신관님을 찾고 있습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살짝 눈을 떴다. 눈에 무엇인가 들어갔는지 아니면 씐 것인지 검붉은 것이 눈앞을 온통 덮고 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크게 내 저어보지만 전혀 나아지질 않는다.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숨을 고른 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겨우 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걸음을 옮길 때 부축해줬던 젊은 신관이 이쪽을 보고 있다. 무릎을 꿇고 상체를 세운 그의 가슴팍은 여전히 피로 얼룩져 있고, 멍든 곳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저마다 바닥에 주저 앉은 신관들과 수도자들 일부가 말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나 같이 흙더미를 뒤집어 쓴 듯 지저분하고 피곤한 얼굴들. 일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고, 몇 몇은 바닥에 누워 잠이라도 자는지 움직이지 않는다.

 

 “날 찾는다고?”

 “예, 그렇습니다. 한참 아무 말도 없다가 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좀 나더니 그. 좀 상스러운 소리로…”

 “상스럽다니 무슨 말인가?”

 “그, 그런게 있습니다. 하여튼, 발소리나 말하는 소리가 많이 들린 걸 봐선 사람들이 꽤 온 것 같습니다.”

 

 그의 시선이 위를 향한다. 아마도 흙벽 위를 보기 위함인 듯, 고개마저 이리저리 돌려본다.

 

 “나와라~ 나와라~ 빨리 나와라~ 다리 아프고 입 아프다~”

 

 머리 위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저 놈이 날 찾고 있다는 얘기겠지. 아니면 놈과 같이 이 터무니 없는 짓거리를 벌인 놈들이. 아니면 이제서야 이상함을 파악한 할티르가 찾고 있는 것일까? 하긴, 나가보지 않고서야 알 수가 없지.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두어 번 반복하고 놈의 목소리가 비웃음과 함께 멎었다. 위쪽을 살피던 젊은 신관이 고개를 내려 다시 날 바라본다.

 

 “대신관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뭘 어쩌겠어. 일어서는 거나 좀 도와 주게, 뭔지 몰라도 빨리 끝내지.”

 “지금 올라가시면 그게… 아니, 아닙니다.”

 

 젊은 신관이 무릎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오른 편에 자리를 잡고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운다. 그의 팔이 닿는 모든 곳이 아프다. 잠시 쉬었던 덕인지 힘은 좀 돌아온 것 같지만 온몸은 숨만 쉬는 것으로도 고통스럽다. 하여튼 돌아가면, 때린 놈들 삽질시킨 놈들 전부 찾아서 사형이다.

 

 * * *

 

 “하아, 하아, 하아….”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두 눈을 꽉 감고 허벅지를 부여잡은 채, 거친 숨을 연달아 뱉어냈다. 밟을 때마다 끝이 무너져 내리는 흙 계단을 기다시피 걸어 올라오니 정말 죽을 맛이다. 젊은 신관이 뒤를 받쳐줬기 망정이지 흙 바닥에 몇 번이나 홀랑 넘어가 뒤통수를 찧을 뻔 했다,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올라왔다. 혹시나 무너질까 계단이 끝나고도 몇 걸음이나 더 걸었으니 더 걱정할 필욘 없겠지.

 이 나이를 먹고 이런 대접이라니, 놈들은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도통 알 수 없다. 나를 콕 집어 부른 걸 보면 내가 누군지는 분명히 알고 있을 터.

 

 “아, 발리르. 그 꼴을 보니 정말 반갑습니다.”

 

 조금 떨어져 들려오는 목소리와 여러 발소리들. 누군지 모르겠지만, 불쾌함을 가득 담아 인상을 쓰고 천천히 눈을 떴다. 이쪽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십 여명. 가운데 선 키가 작은 사람은 수도자의 복장을, 나머지는 전부 근위대의 갑옷에 망토는 걸치고 있지 않다.

 

 ‘아, 그래. 살았다.’

 근위대. 할티르가 날 구하러 근위대를 보내줬다. 고작 수도자 몇 십 놈들이 오밤중에 신관들을 모아 구타하고 강제로 삽질을 시킨 게 전부인데. 어째서 그걸 바로잡는 데 한나절이나 걸렸는지 알 수가 없다. 신전 밖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모르겠지만, 근위대가 직접 왔단 얘기는 이제 곧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 끔직했던 하루 종일이 떠오르자 절로 쓴웃음이 나오고, 답답했던 가슴이 점점 가라앉는 듯하다.

 굽히고 잇던 허리를 펴고 바로 서서 정면을 바라본다. 다가오는 그들 양측으로 삼사십 명 정도의 병사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 대오를 이루고 있다. 멀리 단티아 성이 보이고, 유독 낮게 깔린 회색구름을 배경으로 단연 높게 솟은 붉은 성채와 왕의 탑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으로 성내 유일하게 거대한 하얀 지붕을 가진 대신전의 둥그런 윗부분 역시 곧바로 눈에 띈다.

 

 이윽고 눈 앞에 선 그들이 발을 멈추고, 가장 앞에 선 수도자가 지저분한 수염을 흔들며 위아래로 날 살핀다. 그의 얼굴은 어디가 눈에 익는다. 하지만 이름이 무엇인지, 신전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역시 기억에 없다.

 

 “어떻게, 지난 밤 평안하셨습니까?”

 “편했냐고? 지금 눈으로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역시 대신관께선 다르시군요. 이런 여유가 있다니.”

 “허, 참나.”

 

 다르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빤히 상태를 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태연히 뱉어내는 저 뻔뻔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이런 씨… 아니, 그럴 때가 아냐. 피곤하니 일단 뭐가 됐던 돌아가고 보자.

 잔뜩 굳어 있을 얼굴 표정을 바꾸기 위해 온 얼굴에 힘을 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어쨌든 끝난 거 같으니 돌아가는 길엔 대신관의 위엄을 보여야지. 소리 없이 아아 해보고 오오 해보고 마지막으로 길게 으어어 하고 외쳤다.

 

 “하하하하. 재밌으십니다.”

 

 그가 웃으며 말을 던진다. 무례한 놈. 내 소문을 들어본 적 없단 말인가? 좋아, 그렇다면 돌아갈 필요도 없이 이 자리에서 이름값을 해주지. 그리고 돌아가면 두 배로 값을 치르게 만들겠다. 반드시 어젯밤 그 놈들과 같은 벌을 받게 할 테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 물었는지 어쩐지 턱이 아프다.

 최대한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놈의 눈을 똑바로 내려본다.

 

 “왜 이제야 왔어? 일 처리 속도가 그 정도 밖에 안 돼?”

 “에?”

 

 수도자가 대답은 하지 않고 자신의 옆에 선 덩치 큰 근위대원을 돌아본다. 덜 떨어진 놈. 어떤 이유로 근위대와 같이 왔는지는 몰라도, 아마 연락책이나 되고 말겠지.

 

 “수염이나 쫌 정리하지. 옷은 또 그게 뭐야? 대신관을 모시러 온 놈이 말야.”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놈이 또 다시 말도 잇지 못하고 주변을 돌아본다. 긴장한 듯한 그의 표정. 이래서 아랫놈들은 안 된다. 인상 좀 썼다고 할 말을 잃어 버릴 정도라면 사람들 앞에서 예배는커녕 인사조차 쉽게 하지 못 할… 그러니 저 나이를 먹고도 신관이 못 된 거겠지.

 놈이 자꾸 돌아보는 덩치 큰 근위대원 쪽이 오히려 책임자인가. 고개를 왼쪽으로 조금 돌려 그의 얼굴을 마주본다.

 

 “자네들도 마찬가질세. 근위대원이나 돼서, 왕가의 상징인 붉은 망토를 잊고 오다니. 왕명을 수행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근위대원 쪽도 대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두 한심한 놈들이 서로 얼굴이나 마주보고 있다.

 

 “뭘 보고만 있어? 마차는 어딨나?”

 

 또 다시 물어도 여전히 답이 없다. 조금 가라앉았던 속이 다시 부글부글 끓는다. 대신관을 구하러 고작 이 따위 놈들 밖에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근위대 수준이 낮았나?

 정말 나서는 건 싫지만, 이런 놈들뿐이라면 내가 직접 나서서 가르쳐야 하는가? 젠장, 정말 한심한 꼴들뿐이군. 이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에 빨리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왕가의 일원으로써 삐쩍 마른 수도자 뿐만 아니라 근위대에게도 한마디 하지 않고선 도저히 그냥 못 넘어가겠다.

 

 “아니, 마차가 없으면 말이라도, 말이 없으면 수레라도 끌고 왔어야지. 대체 뭘 멍하니 보고 있어? 언제까지 내가 흙바닥에 있어야 하나!”

 

 그 용맹했던 근위대가 몇 년 사이 이 꼴이 되다니. 이래서 내가 차남이 아닌 삼남이었어야 한다. 순딩이 같은 할티르 대신 당당하게 나설 줄 아는 나 같은 사람이 왕이 되었어야 하는데.

 

 “아, 빨리! 뭐하고 있어? 근위대 수준이 그거 밖에 안 돼?!”

 

 조심스레 등에 닿는 손.

 

 “저, 대신관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라오는 동안 날 부축해 줬던 젊은 신관의 목소리.

 

 “조금 말을 아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상황이 지금. 그런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일단 소리를 낮추심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여튼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죄 한심한 놈들뿐이군.

 

 ‘하~’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한 숨을 뱉어냈다. 오밤중에 대신전에서 난리가나더니, 한나절이 지나서야 사태가 끝나나 싶은 것만으로도 속이 탄다. 그런 참에 멍청이들이 쓸 데 없이 시간만 까먹고 있다. 왕가의 법도가 그래서 할티르가 왕이 되긴 했지만, 이래서야 나라가 어찌 굴러간단 말인가? 그래, 그럴수록 내가 더 부족한 동생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알아서 잘 할거라 생각하고 그 동안 내가 너무 안일했다.

 눈을 뜨고 앞을 본다. 미소는 온데간데 없이 굳은 얼굴로 수도자가 이쪽을 보고 있다.

 

 “대신관님.”

 “뭔가?”

 “우리가. 여기 있는 우리가 누군지는 아십니까?”

 

 이건 한심함을 넘어섰다. 멍청한 건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지.

 

 “나 참,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근위대잖나? 내가 눈이라도 다친 거 같아?”

 “그런 얘기가 아닌… 아니, 아니. 그럼 우리가 왜 여기 온 줄은 아십니까?”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오밤중에 난리를 친 놈들 다 잡아들였으니, 이제 안전해졌다 생각하고 구하러 온 거 아냐?”

 “으하하하하하하.”

 “프흐흐하하하.”

 

 갑자기 너나 없이 눈 앞에 선 근위대원들이 웃기 시작한다. 기분 나쁜 놈들. 반역자 때문에 구덩이에 처 박혔고, 한참이 흘러 이제서야 구덩이에서 나오라 하여 나왔더니 근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다. 구하러 온 게 아니라면 대체 뭐가 있단 말인지.

 뒤에 놈들이 웃던 말던, 앞에 선 둘은 또 자기들끼리 고개를 바짝 붙인 채 이쪽을 보고 있다.

 

 “제가 뭐라 그랬나요?”

 “확실히 형제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제가 과하게 반응한 모양입니다. 몇 일 더 놔둬도 될 걸 그랬습니다.”

 

 형제? 수도자들 사이나 신관들 사이에선 일반적인 호칭이지만 근위대원에게 형제라니? 진짜 친형제란 말인가? 멍청한 거 빼곤 하나도 안 닮았는데.

 

 “이번엔 제 말이 맞았으니, 새벽에 있던 일까지 합치면 무승부입니다.”

 “새벽 일이라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 아, 그거 말입니까? 아니, 벌써 하루가 다 지나 가는데, 아직도 그런 걸 신경 쓰시면…”

 “농담입니다 하메인 형제. 농담.”

 

 나를 무시하고 둘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바쁘다. 한심함에 멍청함, 그리고 무례함까지 갖췄다. 놈들이 날 무시하는 이유는 역시 근위대원들이라 그런 것인가? 남부 제일의 기사들이네 어쩌네 해도 어차피 하찮은 놈들. 필시 나를 일반 신관들과 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라고 다른 이름을 못 댈 것도 없지.

 

 “이봐!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못 움직여? 근위대원들 상태가 왜 이리 한심해졌어? 발린은 어딨어? 발린은!”

 “아하하하하하.”

 “발린! 발린! 도와줘요 발린! 크하하하!”

 

 뒤쪽에 선 근위대원들은 겁을 먹기는커녕 더 크게 웃기 시작한다. 심지어 자신들의 대장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까지.

 

 “자, 형제님들! 움직여 주세요!”

 

 멋대로 소리친 뒤 이쪽을 흘깃 보고는 무시하는 수도자.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병사들은 웃음을 멈춘다. 십여 명의 근위대원들은 뒤로 돌아 걸어나간다. 헝겊 같은 것을 이어 붙인 어설픈 포장을 덮은 수레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지난 밤부터 보이지 않던 마법사들이 이십여 명 모여서 있다. 옆에서 들려오는 어수선한 소리들. 고개를 살짝 돌려보자, 여태껏 대오를 맞추고 서 있던 수비대원들도 저마다 자리를 옮기고 있다.

 날 태우고 돌아갈 수레도, 호위해 줄 마법사들과 수비대도 준비해 놓고 굳이 욕을 먹고 서 있었다니. 그리 욕 먹는 게 좋다면 돌아가서 확실하게 손 봐주리라. 또 다시 꽉 깨문 턱이 아파 온다.

 

 “대신관님, 조심하십시오.”

 

 젊은 신관의 낮은 소리.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잔뜩 얼어붙은 얼굴로 그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고 있다. 이 놈은 또 왜 이래. 새파랗게 젊은 놈이.

 

 “하만 형제님! 준비 끝났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오를 갖춰 서 있던 수비대원들이 어느새 구덩이를 따라 반원을 그리며 둘러서 있다. 마치 짝이라도 지은 듯 그들의 손에는 제각기 창과 활이 번갈아 들려 있다. 구덩이 안에는 아직 신관들이, 수도자들이 잔뜩 있다. 수십 명이나.

 

 “예정대로 진행하세요! 날이 좋지 않으니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야 될 것 같습니다. 바람이라도 불면 골치 아파져요.”

 “예! 알겠습니다.”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유일한 흙 계단 옆에 자리 잡은 수비대원이 큰 소리를 치곤, 이쪽을 한 번 스쳐 본다. 일반 근위대원치고는 나이가 있어 보이는 그의 얼굴. 그는 구덩이를 향해 돌아선 뒤, 활을 들지 않은 손으로 화살통에서 화살 여러 대를 꺼낸다.

 

 “당겨!”

 

 소리를 지른 수비대원은 활을 든 손에 화살을 모아 쥐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 대를 활시위에 메고 그대로 잡아당긴다.

 어? 왜? 신관들을 구덩이에서 꺼내려면 화살이 아닌 밧줄을 들어야지 않나?

 

 “이봐. 이봐들! 뭐 하는 짓인가!”

 

 젊은 신관이 소리를 지르며 곧장 그에게 달려든다.

 

 “당장 멈춰! 이게 무슨 짓인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달려드는 신관을 바라보는 수비대원. 그 바로 옆에 선 창을 든 수비대원 역시 구덩이를 향했던 고개를 돌린다.

 

 “계속 하십쇼. 제가 맡겠습니다.”

 

 그는 양 손으로 길게 잡은 창의 가운데 부분을 앞으로 내밀며 신관을 막아 선다.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서로 붙잡고 밀고 당기는 사이, 활을 든 수비대원은 어느새 구덩이 아래쪽을 보고 있다.

 

 “조준! 각자 가까운 놈으로!”

 “그만! 그만두라고! 비켜서란 말이다!”

 

 또 다시 시끄러운 소리. 좌우로 시선을 돌리자, 구덩이를 향해 다른 수비대원들 역시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활을 들고, 창을 들고. 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만 둬! 저 안에 누가 있는지는 알고들 하는 짓거리야?!”

 

 여전히 큰 소리를 치며 달려드는 젊은 신관을 막아선 병사가 몇 차례 밀고 당긴 끝에 신관을 밀어 넘어뜨린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더러운 자들이죠”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옆에 서 있는 지저분한 수염의 수도자. 또 다시 나를 무시하듯 정면의 구덩이와 병사들만을 보고 있다.

 

 “발사!”

 

 “안돼!! 아악!”

 

 단호한 목소리에 이은 바람을 가르는 시위와 살들의 소리.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본다. 그 넓은 구덩이 위로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바닥에 누운 젊은 신관의 가슴팍엔 기다란 막대기가 꽂혀있다.

 

 ‘뭔데? 말도 안돼. 수비대가 왜? 뭐야 대체 이게?’

 뭔가 잘 못 돼도 한 참 잘못됐다. 수비대가 신관들을 향해 활을 쏘고 창을 겨누다니? 당장 멈춰야 한다. 몸을 돌려 수도자란 놈을 쳐다보며 동시에 놈의 멱살을 잡는다.

 

 “이, 이봐. 이게 무슨 짓인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수도자는 멱살을 쥐고 흔들어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구덩이만을 보고 있다.

 

 “당장 멈춰! 멈추라고!”

 

 힘주어 흔들 때마다 작은 키에 마른 수도자는 앞 뒤로 흔들린다. 저항할 생각도 없는 듯 쉽게 흔들리지만, 이쪽을 볼 생각이 없는 듯 몇 번을 흔들어도 시선조차 나를 볼 생각을 않는다.

 

 “당겨!”

 

 수비대원들이 갑자기 신관들을 공격할 이유는 없다. 기껏 구하러 와서는 왜 갑자기 돌변한단 말인가? 신전에서 일이 있었단 일을 잘못 전해 듣고, 구덩이에 있는 신관들이 반역자라고 생각한 것일까? 날 대신해 벌 주려 한 것인가? 그래, 그런 게 틀림 없다.

 

 “이봐! 당장 멈춰! 저들은 반역자가 아니야!”

 

 다시 수도자란 놈의 멱살을 흔들어도 역시나 놈은 반응하지 않는다.

 

 “아니, 멈추는 건 그쪽이 아니지.”

 

 갑자기 오른편에서 굵은 목소리와 억센 손바닥이 나타나 멱살을 잡고 있던 내 손목을 움켜 잡는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눈에 들어오는 덩치 큰 근위대원. 젠장 이건 또 뭐야.

 

 “그 손으로 붙잡아야 할 건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의 옷이야. 따라 와.”

 

 놈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팔목이 금방이라도 우그러들 것 같다.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구덩이 쪽을 보고 있는 수도자 같은 놈의 멱살을 놓고 싶진 않지만, 근위대원이란 놈은 덩치만큼이나 힘도 좋다.

 

 “힘 빼지 말고 따라 와. 힘 쓸 곳은 따로 있으니까.”

 

 내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는 놈의 눈은 힘이 가득 들어가 있다. 그래, 네놈도 돌아가면 각오해라.

 

 * * *

 

 수레를 덮은 포장을 살짝 들추자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상한 고기를 토사물에 버무린 듯한 역한 냄새에 무심코 포장을 잡은 손을 놓아버렸다.

 

 “이봐. 이건 뭔가?”

 

 근위대원이란 놈의 얼굴을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조금 돌리자, 예외 없이 놈의 칼 끝이 어깨를 건든다.

 

 “잡소리 말고 걷어.”

 

 ‘씨발. 대체 뭐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뒤편의 구덩이에선 더 이상 비명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신전에 들어가며 그 이름을 버렸다 해도, 왕을 지켜야 할 근위대가 엄연히 왕족인 내 등에까지 칼을 대고 섰다.

 

 “빨리! 뭘 꾸물대고 있어?!”

 

 또 다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놈의 시끄러운 소리. 젠장.

 다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본다. 어설픈 포장을 덮은 수레가 이십 여대. 숨을 크게 들이 쉬고 그대로 멈춘다.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바로 앞에 있는 수레의 포장을 조금 들쳤다. 얼핏 사람의 다리처럼 보이는 형체가 눈에 들어온다. 검은 바지. 아니, 진한 빨간색이나 파란색인가? 어둑한 하늘 덕에 포장의 깊은 곳은 윤곽 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 들쳐봐야 확실히 알 수 있으려나.

 

 “후우~.”

 

 멈추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어 본다. 역한 냄새가 뱃속으로 들어 오래가지 못하고 끊어버렸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세고, 힘껏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포장을 젖혔다. 갑작스레 힘을 쏟은 탓인지 밤새 두들겨 맞은, 종일 땅을 파낸 온 몸이 쓰리고 아프다.

 수레에 대충 구겨져 넣어진 시체 한 구. 헝겊 같은 걸로 마구 감아 놓은 얼굴은 완전히 피로 범벅이 되었고, 머리는 온전히 남아 있는 것 없이 찌그러져 있다. 밧줄로 셀 수 없이 동여맨 몸통은 엎어진 채 등이 하늘을 향해 있고, 다리는 완전히 꺾여 수레의 양쪽을 채우고 있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비단 옷.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고선 엄두도 낼 수 없는 물건이 머리통에서 흘러나온 피로 검붉게 물들어있다.

 

 “으윽… 이, 이게 뭔가?”

 “새로운 일거리. 여기 수레들 전부 끌고 가서 구덩이에 버려.”

 “뭐? 젠장, 그게 무슨 소리야.”

 

 다시 놈을 돌아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 하자, 또 다시 놈의 칼 끝이 어깨를 찌른다.

 

 “대신관인 내가. 대체 왜 내가 이런 짓을 해야 된단 말이냐?”

 “흐하하하하하. 와나, 진짜. 진짜로 몰라서 묻는 거야?”

 “….”

 

 젠장, 그럼 모르니 묻지 하고 쏘아붙이고 싶어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구덩이 안에 있던 신관들은? 오륙십 명 정도 되는 그 신관들의 생사는 알 수가 없고, 바로 앞에 있는 수레뿐이 아니라 눈 앞에 있는 이십 여 대의 수레에도 전부 시체가 들어 있는 모양. 수비대와 근위대도 이런 일에 참가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일부 수도자들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해도 해도 너무 하군. 정말 아직도 몰라? 아님 모르는 척이야? 니가 알던 세상은 끝났어. 그 지랄 맞은 잔인하고 자비로운 신 말고 그냥 자비로운 신의 뜻만 남았다고.”

 

 세상이 끝나다니? 신이 어떻다니? 이런 미친 반역자들. 그러고 보니 수십 명이나 몰려왔지만 부관들 하나 없다. 그렇다면 같잖은 놈 몇이 벌인 반란인 것이겠지. 못 배운 놈들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 지금이라도 상황 파악을 시켜주자.

 

 “왕을 지키고 단티아를 지켜야 할 근위대와 수비대가 이게 무슨 짓인가? 감히 신관들을 이렇게 대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몇 놈 모여서 이런 짓 벌여봤자 잡병들끼리 대체 뭘 한다는 거야? 수비대나 근위대가 알아채면 곧 끝장이니 지금이라도 무기 버리고….”

 “한심해서 더는 못 들어주겠네. 근위대장이니 수비대장이니 멋대로 불러. 전부 다 여기 있으니까. 그러니까 가서 묻어주라고, 그 손으로.”

 “무, 무슨 소리야?”

 

 다시 오른쪽으로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놈의 칼이 어깨를 파고들지만 그런 건 상관 없다. 날 내려보는 근위대원이란 놈의 얼굴엔 비웃음이 서려있다.

 

 “귀 먹었어? 가서 구덩이에 묻어버려, 전부다. 니 놈 동생이니 조카니 끝까지 단티아에 목숨 바친 놈들 말야. 그 좆도 아닌 이름 지키다 뒤진 놈들을 위해 특별히 마지막 단티아한테 주는 기회야.”

 

 고개를 앞으로 돌려 수레를 내려다 본다. 검붉게 물든 옷감 사이에 묻혀 홀로 제 색을 내고 있는 금빛 용의 형상. 남부를 수호하는 붉은 용은 남부의 주인인 왕의 등에서 거대한 불길을 뿜으며 여전히 그 위엄을 뽐내고 있다.

 

 “남부의 왕? 합법적인 주인? 지랄하네. 왕이니 귀족이니 하는 것들 없어도 충분히 잘 사는 걸 보여줄 테니, 지옥에서 지켜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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