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네 갈래의 꿈, 여섯으로 나뉜 이야기.
멈췄던 주사위는 다시금 굴러가기 시작했다.
비석 없는 묘지가 그곳에 있다. 황야의 흙으로 짜인 무덤 앞에 소년은 고개를 내린다. 이제 이야기를 읊조리던 입은 옛 것이 되었다. 시간의 알껍질을 하나씩 두드려 가며 말하던 이야기, 추억, 그 이야기.
언제나처럼 투박한 의자에 앉아 무릎에 책을 올려놓은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한다. 한참이 지나도 앙상한 손이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때에 소년은 비로소 그를 잃은 것을 알았다. 이미 그리워질 이름은 할아버지, 사서, 보호자, 혈육, 이야기꾼.
끝을 잴 수 없는 황야 한가운데서 날이 기울듯 언제나 있었던 노인의 언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바래기 시작한. 소년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씁쓰레하게 낡은 페이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노인이 죽었다― 는 것은 혼자라는 것을 의미했고, 혼자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과 같았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안을 들여다본다. 집으로 이어진 굴은 길어서, 검고, 두려웠다.
“안녕히 계세요.”
마지막 인사가 끝났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사실이 소년을 슬프게 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조용히 바위문을 닫았다.
황야는 밤이었다. 아래로는 모래먼지가 그의 머리빛처럼 흐르고, 올려다본 곳에선 마실 수 없는 강이 눈물색으로 떨어진다. 흔적이 바람 위에 내리는 사이와 사이. 마주한 곳에서 달들은 눈을 든 자들을 내려다본다. 언젠가부터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두려움이 필요하기 마련이지만, 소년의 눈동자는 거짓말처럼 무구하게 달무리를 담았다. 검은 지평선의 사위(四圍)가 서서히 모래빛에 잠기어 간다.
어제와 같은 밤, 어제도 있었을 아득한 광야. 그러나 오늘 바라본 그곳은 견딜 수 없는 냉막함을 둘러 새벽을 쫓듯 쏘아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늘 달을 향해 한낱 천진한 호기심으로 악의 없는 시선을 휘둘러 왔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색 없는 표정. 절벽 앞에 선 이들처럼 허공의 손을 붙잡고 묵묵히 간극을 잰다. 거짓말쟁이도 훼방꾼도 허풍선이도 담겨 있지 않은 깨끗한 공허. 너머에 늘어선 열한 개의 달. 기억은 이어지는 영겁처럼 쌓여 순수하게 끌리어 왔다. 깨지는 이때까지도.
이제 흐린 채색이 번지기 시작한다. 달들의 껍질이 서로 지워지며 일렬로 서고, 부서진 잔해가 일렁인다. 고개 든 소년은 나지막이 생각했다. 우는 것 같다―.
한 마디가 스치었다. 그리고 찾아든 후회. 이유는 알고 있었다. 치기 어린 거짓말의 대가(代價). 조악한 자존심의 발버둥. 허술한 사고를 두드리며 날카로운 진실이 그를 몰아세운다. 달에는 눈물샘이 없다. 달은 울지 않는다. 우는 것은, 달이 아니다.
소년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끝까지 참았던 물자국은 기어이 달사위에 어리었다. 소리 없이, 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얇은 소나기가 거듭 눈동자를 간지르더니 이윽고 나날은 짙푸른 숨결을 토하며 흐느낀다.
비가 내린다. 눈 안의 황야에, 모래를 닮은 시선에. 비가 내린다. 열띤 감로가 땅을 적시고, 참으며 오랫동안 견뎌 온 목마름이 숨겨 왔던 소리를 지른다. 그리운 이름, 사라진 이름, 잃어버린 이름. 내리는 비 너머로 달이 보이고, 떠오르는 모래에 가라앉은 생각이 역류한다. 사라진 체온 너머로 비치는 싸늘한 숨결. 인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이별.
눈에 흐르는 빗줄기가 하나 하나 걸음을 더해 갈 때마다 황야라는 대지는 숨 쉴 수 없는 바다로 떨어진다. 지평선이 달에 녹고 달이 하늘에 녹으며 하늘이 지평선에 녹아 울음을 운다. 이곳엔 소리가 없다. 코를 스치는 모래의 흔적도 황야로 가득한 땅의 감각도 마른 환상같이 부서진다. 황야의 서늘한 그림자가 날선 기억을 안고 쫓아오는 표류의 한가운데서, 헤매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순간이 너무나 간결하고, 갑작스럽고, 찢어지듯 다가와서 알지 못하고 바라보았을 뿐이다. 깨어 있는 꿈처럼, 무엇이라고 형용하기 힘든 파편들이 말없이 사열하며 주위에 쌓이었다. 그는 기묘한 어조로 존재하는 것들을 마주보았다. 황야를 지워내고 다가온 어지러운 언어들은 시체 같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의 단편 같기도 했다. 부서진 틈새가 무언가로 접합된 채 간신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며 살아 있는데, 낱낱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나열해 둔 모양은 얼마 남지 않은 숨을 몰아쉬는 듯 섬약했다.
이유 모르게 거부감이 치돋았다. 고개를 저어도 망막에 붙은 것처럼 광경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지러운 잔상을 지워내려 소년은 눈을 감았다. 그것은 시야 안까지 쫓아왔다. 환영은 눈 속을 비춰내며 한순간 음영이 되더니 파편의 갈래를 따라 수많은 색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엄습하는 소름 끼치는 기척. 피하려 몸을 움직였지만 디디는 감각이 증발하고, 도망칠 새도 없이 재 날리는 허공으로 떨어져 간다. 깨져가는 잔해가 입 막힌 언어를 흘리듯 조각을 떨며 위에서 손을 뻗어왔다. 잡을 것인가 뿌리칠 것인가. 소년은 선택하려 했으나 판단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사라졌다. 명멸하는 불확실한 기억만이 간극에 메워진 채 백일몽은 밤의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그곳은 황야. 어느 새 소년의 손은 바닥에 누워 모래더미를 잡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의 기묘한 일을 논리적으로 맞춰 보려고 애썼다. 별안간 다가온 환상, 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그 무언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고 현실이라기엔 지나치게 혼탁했다. 그렇게 셈을 헤아리길 몇 차례. 모래에 파묻혀 생각에 몰두하는 것은 복잡한 마음을 잠시 잊기에 좋았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을 순 없었다. 이윽고 소년은 조각 맞추기를 포기하고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온통 모래얼룩 투성이였다.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모두 닦아내자 비로소 시야가 트인다. 되찾은 황야는 언제나처럼 아득하고 적막했다. 익숙함이란 그런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 모래길을 뛰어가, 집의 문을 열고, 좁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낡은 카펫 위에 오래된 의자가 있다. 거기엔―
이제 아무도 없다.
어제와 같은 오늘은 이제 없다.
더 이상 과거일 수 없는 지금과 다시 그리워질 온기를 상기하며, 소년은 서서히 자박거리는 걸음을 헤아린다. 이별이었다.
남은 것은 발소리. 황야의 마지막은 기색 없이 가까워지고 집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발자국의 수를 잊어버릴 즈음, 자신에게 자신이 묻는다. 나는 왜 떠나려 하는 거지? 생각할 것도 없이 변명 같이 차오르는 대답들. 거기에 대고 무의식이 웃기지도 않게 중얼거린다. 아주 짧은 찰나에. 행복이 또 다른 행복을 찾고, 슬픔이 슬픔을 잊으려 걷고, 분노가 이유 모를 혼란에 헤매고, 즐거움이 희망을 즐거워하고, 갈구가 이전부터 원했던 것을 바라보며, 두려움이 두려움을 멀리하려 또 다른 두려움으로 향했다고. 생각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걸음 끝에 땅이 스쳐간다. 소년은 집을 떠났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조롱하는 외로움을 헤치며. 언젠가 스러질 모래자국처럼 알 수 없는 기약을 향해.
그는 모른다.
끝없이 펼쳐진 달들의 시간 아래서 두려워하는 자들을.
그는 모른다.
사라진 여명의 뒤로 이어지는 끝없는 황혼을.
그는 모른다.
순수로 남았던 작은 대지는 옛 이야기의 유물처럼 기억 속에 바래어 있다는 것을.
하늘에 달이 있다. 이야기가 그 안에 있다. 역사가 그 위에 잠들고, 잊히지 않는 노래가 아래서 끝없이 이어진다. 죽은 여명도, 사라진 이름도, 살아 있는 목소리도 창공의 묘비에 담겨 살아간다. 존재했던 것들이 잗갈려 흔들리며 빛나는 그 곳에서.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되고, 별엔 이야기가 있어.
언젠가 들은 것 같은 말을, 그는 중얼거렸다.
그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광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