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메-바르티가 사건.
수많은 세월 동안 원수이자 동반자였던 두 나라 사이의 유일한 중립 지대. 그 도시의 시민 모두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살해당한 사건.
그것이 메-바르티가의 시작이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명료하리만치 간단한 수법으로 죽은 사람, 사람들. 기술의 발달 덕분에 범인은 달이 한 번 돌아가기도 전에 잡혔다. 한 명이 더 잡히고, 세 번째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네 번째 같은 범인을 잡았을 때, 그들은 상황이 미쳐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클 자네의 답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게 되면 기술적으로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남지 않는가. 그리고 침입자 둘의 관계성을 설명할 수가 없네.”
선험자의 부드러운 설명에 그는 더욱 머쓱해졌다. 통솔자는 문제를 잘못 푼 학생이 된 기분으로 남몰래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자네 말이 맞아, 테이무드. 피차 비슷한 결론인 것 같으니 부연은 없어도 되겠지. 아, 이건 말해야겠군. 내가 계속 생각해 봤는데 어느 한 쪽을 가짜로 놓고 이야기하려니 자꾸 뭔가 걸리더라고. 너무 허술해서 진짜 같고, 너무 그럴듯해서 진짜 같더군. 그리고 서로가 지나치게 닮았어. 누군가의 꿍꿍이가 뒤에 있는 게 아니라면 둘의 생김새가 같은 건 자연적인 일이란 소리 아니겠나.”
이제 답을 내릴 때다. 지금까지 이야기하면서 자꾸만 가슴 한편에 드는 찝찝함을 니클러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이번 사건의 뿌리와, 들어맞아야 하는 모든 우연을 석둑 잘라버리려니 입맛이 썼다. 자신이, 그리고 앉아 있는 이들이 보지 못한 패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으며, 이 지나치게 비합리적이며 있을 수 없는 계획이 실행된 데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 모든 것을 저울에 올려 달아 본 결과가 지금의 가설이었다.
“알, 설명해 주게. 그 둘 사이에 특기할 만한 관계성이 있었나?”
이제 심판청에서 하나의 확언을 내려 주기만 하면 이 고민도 마침표를 맞을 것이다. 선험자의 고개가 유리탁상의 허리로 향했다. 알만이 유독 늦게 회의에 참석했으니 이 시점에서 거의 모든 조사를 마쳤을 것이다. 알 라크테이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목례했다. 서류의 일부가 탁상 위에서 그의 손으로 옮겨지고, 심판청의 수장은 엄숙하게 발언했다.
“……검사 결과 둘은 생물학적으로 연령이 다른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례적인 상황이기에 정확한 사실을 규명할 수는 없지만, 동일 인물이 확실합니다. 추정 사실이 아닙니다.”
5홀의 네 번째 자리에서 선고가 났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로임-벤 최고의 수사 및 사법권위를 자랑하는 기관의 공식 발표이며, 이번 대 심판청의 수장은 젊은 나이에도 빈틈없는 일처리와 신뢰받는 관리로 내외(內外)의 존경과 신임을 받는 홀이었다. 틈을 두지 않는 그의 확언은, 제한된 조건 내에서 가능한 모든 조사를 충분히 한 후 이상이 없을 때에만 일컬어진다. 그리고 그의 충분한 조사란, 34세에 한 사람을 나라의 최고 사법기관의 수장으로 올리기에 모자람 없는 일처리인 것이다.
나머지 다섯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렇게 되면 가정은 필요 없게 된다. 명실상부한 인간 분열이다. 처음 가능성을 제시했던 선험자마저 헛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기이한 상황이 아닌가.
“이게 질 나쁜 수작이면 차라리 다행이지. 가장 좋은 상황은 둘 다 가짜인 거고, 하나라도 진짜면 상당히 골치 아파져. 그리고 가장 최악의 경우는 누군가가 진짜를 찾아내서 여기 오도록 만든 경우인가.”
어쩐지 한숨 같은 언어였다. 그 말을 끝으로 선험자는 잠시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에게도, 모두에게도.
누구의 입도 열리지 않은 정적인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실례지만 한 마디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혹시 니클러께서는 이번 ‘라일’의 몇 년 후 모습이 분열되었다고 보시는 건가요?”
보필자, 란플이 사뭇 진지하게 운을 떼었다. 대답에 앞서 니클러 베나임은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틀어져 있는 모든 논리는 기술적인 문제로 귀결되며, 로임-벤의 통치자가 모르는 기술이란 앞으로 나올 기술이나 나오지 않을 기술뿐이다.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해도 전제부터가 맞지 않으니 답은 여럿일 수 없다.
“그렇소, 보필자. 같은 사람이 둘이니 인간 분열이지. 하지만 나이가 다르니 앞으로 있을 흐름에서 분열된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내가 본래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한 건 지금 이 상황, 이 흐름에 있을 수 없는 인물이 사건을 일으켰다는 뜻이야.”
나이를 먹은 탓인지 힘이 부친다. 잠시 숨을 몰아쉰 뒤 니클러는 문장의 마지막을 내보내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그대로 늘어나는 걸로 그쳤지만 이젠 그 흐름의 범위가 늘어나기 시작한 걸세. 우린 이미 메-바르티가 때 그 가능성을 보았어.”
란플의 손이 떨렸다. 인간 분열이 확장된 첫 사례로 남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감탄하며 그는 방금 선험자가 한 말을 꼼꼼히 기록했다.
“설명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오딤의 손자가 궁에 침입하는 사건이 인간 분열과 맞물려 현재와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는 말씀이시죠.”
리드로스는 가라앉은 눈 밑을 눌렀다. 아무래도 회의는 좀 더 길어질 모양이었다. 결국 오늘의 자리는 침입자와 오딤의 관계성을 논하는 걸 넘어 한 바퀴 돌아 메-바르티가까지 단 위에 올리게 되었다. 여전히 그의 여유를 괴롭히는 가장 큰 악당, 언제나 있는 회의의 주인공.
희한하게도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무의식이란 건 재미있다. 어쩌면 그는 오딤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부터 어렴풋이 이런 그림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오딤이라는 이름을 논하면서 메-바르티가를 빠트린다는 건 입 없이 말을 하려는 것과 같은 행위다.
간혹 독단적으로 의견을 이끌어 나가는 조율자와 선험자지만, 그건 누구보다도 가장 정확하게 앞을 헤아리기 때문이었지 어떤 속셈을 두고 판을 짜느라 허언을 한 적은 이제껏 없었다. 다만 이번 경우는 너무 황당무계해서 쉬이 믿기지 않았던 데다가, 오딤이라는 선례가 있는지라 그는 언제나 사람의 말을 거르며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갈등이 무색하게도 비꼬아 들은 논리가 어려운 난제 중 하나를 풀어내었다. 이제 그의 입술이 말할 것은 관련 사건과의 비교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도록 하지. 메-바르티가 당시 헤렘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발생했던 신원 미상의 전사자들을 기억하시오?”
메-바르티가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중립도시 ‘메’의 참사사건 조사권을 건 두 나라의 마찰. 파견된 것은 육백, 돌아온 이는 칠백 이상. 맞지 않는 산술의 답이 괴이한 진실이 되어 나타나 혼란을 남겼던, 사건의 중간 조각.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이상하단 말이오. 제복이나 검시에서 나온 신원은 확실한 로임-벤 국민이었는데 달에는 기록이 없었단 말이지. 연령도 제각기……”
말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어느 새 사이에 들어찬 깨달음이 제멋대로 입 안을 놀린다. 리드로스는 드디어 해묵은 답을 알아냈다.
“그게 징후였군. 분열이 미미했기에 태어나서 병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자들의 시신만 나타난 거요. 살아 있는 인간을 통째로 복제할 수준은 못 되었던 거지. 그랬던 거라면 흐름의 법칙에도 들어맞소!”
오래 묵었던 통치자의 의구심이 해갈(解渴)되었다. 머릿속이 깨끗하게 씻기는 느낌을 따라 고양감이 손끝에 전해진다. 이렇게 모든 것이 명료해 보이는 기분은 간만이었다. 다만 니클러의 표정이 그리 기뻐 보이지 않는 것이 한 점의 티끌이었다.
선험자는 대답을 준비했다. 이렇게 수수께끼 하나가 맞춰졌다. 뒤에 더 큰 문제와 함께 올 녀석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니클러 베나임은 우선 분열에 대한 이야기를 수확하기로 마음먹었다.
“음. 그 시신들의 연령대가 달랐다는 건 그 시신들의 분열되는 흐름이 그만큼이었다는 소리지. 이제 이건 더 이상 기현상이 아니야. 명백히 흐름의 불안정에 따른 문제이니, 기술적인 연구를 추천하는 바요. 죽을 뻔한 세계를 겨우 살려놓은 부작용의 일부일 수 있으니 하루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해.”
선험자의 발언이 끝났다. 의문은 풀리고,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꺼내어진 지금이 적기였다. 검토하려 쉬었던 말을 이제는 상 위에 꺼내어 보일 때다. 조율자의 기다림이 끝났다.
“선험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요. 나 테이무드는 조율자의 자리를 대고 이 사건이 메-바르티가의 확장이라는 걸 확신하겠소.”
놀라움은 언제나 의식의 사각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다. 자리에 앉은 이들의 동공이 흔들리고 맥박이 달리기 시작했다. 강도 높은 발언이었다. 조율자로서 모든 책임을 지고 만약 이 사건이 자신이 제시하는 방향대로 해결되지 않을 시 자신의 전권을 동원해 수습한 뒤 사임하겠다는, 이름을 건 선언.
“생각하시는 바가 있습니까?”
이건 또 예상 밖의 전개다. 당혹스러움이 목에 걸렸다. 소리가 엇나갈 뻔한 성대를 진정시키며 리드로스는 진중히 그에게 물어보았다. 테이무드는 여전히 진지했다. 농담이나 비꼬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조율자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통치자의 의문에 대답을 돌렸다.
“방금 논의한 대로 메-바르티가 당시까지는 일정 수 이상 늘어나지 않던 분열이 갈수록 범위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실 것이오. 이번에 연령이 서로 다른 ‘라일’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건 분열의 영향을 받는 흐름의 폭이 대폭 확장되었다는 것 아니겠소. 이전에 있었던 인물들과 먼 앞으로 있을 인물들이 분열되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지.”
생각할 흐름을 오래 줄 것도 없었다. 인간 분열이라면 예전에도 깊게 논의했던 일이고, 상황 또한 충분히 검토했다. 다만 잠시 변화가 멎는 것 같던 분열이 드러낸 새로운 면모는 지금까지 상정했던 여유를 비웃는다.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조율자는 모두에게 진언했다.
“분열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소. 이 일은 중대성을 감안해서 엄격하게 해결해야 하오. 그리고 빠를수록 좋지. 드문드문 일어나기만 한다면 충분한 흐름을 두고 현상을 관찰해서 해결하면 되겠지만 지금 일어난 인간분열을 포함해서 가늠해 봤을 때 아무리 늦어도 몇 년 내에 11국 전체에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오.”
진짜와 가짜. 혹은 진짜와 진짜. 그러나 자리는 하나, 사람은 여럿. 어떻게 대입해도 타협이 불가능한 규격이 망가지는 사회. 의, 식, 주를 비롯해서 온갖 관계가 비틀어진다. 부모는 누구를 자식이라 부를 것이며, 자식은 누구를 부모라 불러야 할 것인가?
“확실히 묻겠소. 조율자, 당신은 방금 자리를 건 말을 발의하셨소.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좌로서 묻건대 정말 확신하시오?”
들을 것도 없이 정해진 답이지만 직무는 유기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리드로스는 좌에 앉은 자로서 그에게 물었다. 단정하게 이유를 세운 대답이 들려왔다.
“이번 사건이 인간 분열이라는 전제를 둔다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합니다. 서로 나이가 다른 두 사람, 기술적인 오류와 모순 모두. 우리가 모르는 말이 판에 나와 있었기에 사건이 제대로 읽히지 않은 것뿐입니다. 확신하냐고 물으셨으니 좌의 귀에 이 홀은 당연하다는 말을 올립니다.”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적절한 격식과 충분한 예의로서 진상하는 말. 첫 번째 홀로서 부족함 없는 답변이었다. 리드로스는 흔들림 없는 조율자의 태도를 견주며 몇 걸음 앞을 상정해 보았다. 가야 할 것도 별반 다르지 않을 길이다.
“그렇게까지 말하시니 받아들이겠소. 이후 인간 분열에 대한 안건은 조율자 그대의 뜻을 우선으로 할 것을 이 자리에서 현명하신 여왕의 권위를 빌려 공언하는 바요.”
예정된 바대로 가장 고귀하고 지혜로운 이름으로 허락의 말이 내렸다.
“홀이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어느 새 거울의 저편이 어스레하게 밝았다. 열한 개의 달이 날을 시작하기 충분한 빛을 내리려 하는 흐름. 오늘 있었던 뇌우와 같은 격론은 모두 지나고, 닫혀 있던 문을 열 때이다. 갇히지 않은 공기를 기대하며 리드로스는 선언했다.
“논의는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라 여기오. 이제 자리를 물리도록 하지. 모두들 휴식을 취한 뒤 각자의 소임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그렇게 마침표를 외치기는 했으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회의를 정리하기에는 아직 불민한 부분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알 라크테이가 올린 손을 보면서 그의 속에 든 생각이었다.
“아직도 뭔가 남아 있는가?”
나오는 목소리가 다소 거칠었다. 또 밤을 새었으니 쉬었을 것이다. 피곤했다. 침실로 가는 건 한참 후의 일이 될 거라는 사실이 싫었다. 하지만 안건이 남아 있으니 불평으로만 끝나게 될 일이라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좌에 앉은 이후 늘 있었던 기다림이었으니까. 단순한 질문이기를 바라며 그는 일단 알의 말을 듣기로 했다. 곧 간결한 한 마디가 다섯의 귀에 울렸다.
“현재 수감되어 있는 ‘라일’의 처우를 지금 결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지적이었다. 어절마다 피로와 두통으로 눈이 감기느라 짜증이 나긴 했지만 적절한 발언이다. 인간 분열을 논의하느라 잠시 뒤로 미뤄 두었던 매듭을 마무리 지어야 완전하다는 보증을 적어 내리지 않겠는가.
“그렇군. 심판자의 의견은 어떻소?”
되묻는 말에 알은 잠시 고민하고서는 천천히 답변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더불어 정확한 신원을 밝혀야 합니다. 당장 결정하는 것은 이르다고 여겨집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긴 회의 끝에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확실해진 사실은 딱 두 가지. 이 사건이 인간 분열에 의한 특수한 경우라는 것과, 침입자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점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그의 신원은 여전히 미제로 잠긴 채였다. 결국 아직 답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가 입을 열 것 같소?”
리드로스는 물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기술적인 방법으로 기억이 아예 읽히지 않을 시엔 상당히 곤란해진다. 자발적으로 협조해 오더라도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예 말을 트지 않는다면 정말 곤란해진다!
통치자가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해 보는 동안 답변이 왔다.
“제가 조사를 위해 방문했을 때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침입자를 아냐는 질문에 한 번 고개를 저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리드로스는 턱을 한 번 쓰다듬었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반응을 보인다는 건 좋은 신호다.
“한 번이라도 직접 봐 둘 필요가 있겠군. 알, 그가 정말 오딤의 혈육일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으로 논하자면, 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니 리드로스 자신도 의견이 기울어진다. 그는 정말 오딤의 손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워낙 기이한 줄거리인지라 완전히 받아들이려니 확신이 부족했다. 분동이 이리저리 옮겨지는 틈을 읽고서 선험자가 그 사이를 잡아챘다.
“내 정리해 보지. 나와 테이무드는 녀석이 오딤의 손자라는 가설을 강력히 밀고 있지만 아직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결국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낸 건 혈통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둘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 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네.”
중심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는 지금의 조사에도, 앞으로 있을 흐름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은 유력한 의견이긴 하지만, 아직은 물증(物證)이 없는 사견(私見)이다. 최고 결정권자는 다른 단서가 발견될 때까지 중립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테이무드와 자신, 알과 란플, 마클로 나뉜 오늘 이 의견의 삼각이 합리주의자인 리드로스에게는 꽤 괜찮은 균형이라고, 그는 여겼다.
“결국 ‘라일’의 신원을 특정하는 게 관건이겠군요.”
알이 말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대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알 라크테이, 다시 발언하겠습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늦어도 며칠 내로 오늘의 ‘라일’을 폐궁에서 이감(移監)하겠습니다. 의견을 여쭈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5홀을 향해 한 말이지만 사실상 통치자에게 묻는 것과 같았다. 접촉 가능성을 줄여서 나쁠 것 없다는 판단 하에, 리드로스는 수긍했다.
“문제될 건 없지만…… 여러 가지 절차도 있고 하니 오늘 중만 아니면 좋을 것 같소.”
“알겠습니다.”
리드로스는 점점 더 머리가 아파왔다. 신원을 밝힌다고는 하지만 알의 입에서 이감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본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검증된 단서는 사실상 이게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비 등록자이니 기술적인 기억 추적으로도 제대로 된 단서가 나올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 어떻게든 한 번은 입을 열게 할 필요가 있지만, 말한다고 해도 그걸 믿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대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이쯤 되면 무섭군.”
그는 마치 도박판에 얹혀 있는 기분이었다. 무(無)와 완전으로 갈린 줄다리기. 한 곳에 지극히 높은 확률로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면 반대편에 타국(他國)과 거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당연히 잡을 수 있는 곳은 둘 중 하나다.
그가 정말로 오딤의 손자라면 메-바르티가의 관련국(國)인 헤렘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상황이 정말로 누군가의 개입 없이 이루어진 것인가? 당연히 말이 안 된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말이 안 되게 일어났을 가능성이 일말이나마 있다. 인간 분열이라는 미친 변수가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이 사건은 훨씬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그가 입을 열던 열지 않던 당분간은 옥에 수감해 두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하겠소. 묘안이 없는 이상은 이 방법밖엔 없다고 여겨지오.”
“아니면 이런 방법은 어떤가?”
갑작스러운 니클러의 제안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귀를 기울였다.
“지금 우리에겐 미끼가 있어. 그런데 이 미끼가 정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건지, 누가 일부러 잡아서 보낸 건지, 아니면 미끼 행세를 하는 뻔뻔스러운 포식자인지는 알 수가 없어. 이걸 이대로 묵혀봤자 상자 속에서 오래되기만 할 뿐이야. 혹은 죽거나 병에 걸린다는 이야기도 있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이걸로 낚시를 해 보는 거야. 그래야 어떤 녀석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
현 상태에서 바로 이끌어 낼 수 있는 효용과 방법이 있다고, 선험자는 말하고 있었다.
“낚시……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짐짓 귀를 기울이며 알이 질문했다.
“간단한 방법일세. 이 나라 안에, 만약 필요하다면 지나치게 국경을 넘지 않는 범위 안에 그를 풀어놓는 거야. 설마 방면하라는 소리로 들을 머저리는 이 자리에 없는 걸로 알겠소. 당연히 감시역이 붙을 걸세. 어지간한 녀석은 주사위를 굴려 보기도 전에 당할 만한 녀석으로. 그 적임자에 대해선 추후 통솔자의 추천을 받도록 할 거고, 여튼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는 거야. 그 외에 추적이 되게 한다든가 기술적 조치도 필요하겠지. 붙은 자가 말을 붙이는 게 경계를 풀기 더 쉬울 거고, 도망가려 해도 쉽게 제압할 녀석을 둔다면 문제는 없을 걸세. 일종의 집행유예를 주는 거지.”
즉, 의심하며 대에 매기 전에 시험적인 사용으로 효능을 입증해 보자는 말이다.
“흠……. 괜찮을 것 같은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군요.”
오딤의 딸 및 사위와 함께 놔두기에는 불안한 인자지만 그만큼 중요한 조각이 될 수도 있는 요소다. 모두가 일말의 가능성이라는 무책임한 단어에 연신 휘둘리며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의 파급이라는 건 밖으로 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료했다. 우선 테이무드가 고갯짓으로 긍정했다. 불안하긴 하지만 강압적인 방법으로 섣불리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그리고 통솔자가 손을 들었다.
“다행히 적임자가 한 명 있는 것 같습니다. 추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클의 이야기를 끝으로 입을 여는 이는 더 이상 없었다. 긍정의 동의어와 같은 적막을 선험자는 눈을 감고 둘러보았다.
“좋군. 그럼 모두 이 방법에 찬성한 것으로 알겠소. 그리고 중대성을 감안해서 녀석의 신변에 대한 권한을 심판청에서 양도해 주게나. 안 그래도 바쁜 기관이니까, 내가 직접 처리하는 것이 낫겠어. 괜찮은가 알 군?”
“알겠습니다. 선험자께 그에 대한 권한을 위임하겠습니다. 이 말은 기록될 것이며, 통치자께서 증명해 주실 겁니다.”
리드로스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선험자가 말한 집행유예에는 통치자도 꽤나 솔깃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인 듯 싶었다. 정말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상시 포탑의 감시가 있으면 적어도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으리라.
“알겠소. 현재 수감 중인 침입자의 처우는 선험자께 일임하도록 하지.”
그리고 더 이상 침묵을 깨는 이는 없었다. 드디어 종을 울린다.
“이것으로 회의를 종료하겠소.”
통치자를 시작으로 모두가 빠져나간 복도의 중간에서, 마클은 지팡이를 천천히 디디는 선험자의 등을 만났다.
“니클러 님.”
오늘따라 왜인지 직접 걸어가고 계시는 선험자를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어 마클은 옆에서 말을 걸었다. 날을 샌지라 피곤하실 텐데도 저만치에 있는 수행원들은 움직일 기색이 없다.
‘그렇다는 건……’
“이제 나왔나 마클 군. 기다리고 있었네.”
혹시나 했지만 정말이었다.
“역시 절 기다리고 계신 거였군요.”
마클은 머쓱하게 웃었다. 선험자께서는 당최 빈틈이 없다. 존경하면서도, 아무래도 앞에 서면 긴장하게 된다.
“아까 자네가 말한 적임자 말인데, 오후쯤 나한테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겠습니다.”
니클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자네가 같이 오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 아이만 보내게. 안 그래도 오늘은 충분히 바쁠 테니까.”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짐짓 비장한 아랫연배의 표정에 니클러는 괜스레 웃었다.
“자네는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경향이 있어. 물론 자네의 큰 장점이지만 간혹 허술해질 줄도 아는 게 좋아. 그리고 나에게도 일이라는 게 있다네. 이후 폐궁에 적어도 한 번 들러야 하고…….”
흐려진 대화를 남기고 그들은 복도를 마저 걷는다. 선험자의 눈길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주름으로 장식된 오래된 동공엔 일렁이는 사각의 좁은 빛보다 얼마나 많은 것이,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이 비치는 것일까. 완력만 있는 그에겐 헤아릴 수 없는 경지였다. 마클은 존경을 담아 몸을 숙였다.
“조언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소년을 보러 가실 때 불편함이 없도록 해 두겠습니다.”
느린 걸음을 더해 가던 발이 멈췄다.
“글쎄.”
조소 같기도 하고 인자한 미소 같기도 한 곡선을 입에 머금으며, 니클러는 말했다.
“회의실에 가기 전에 만났어. 녀석에게는 그 때 모두 말해 두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