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이 아직 어두울 때의 일이다.
낯선 방문객은 둔탁한 소리를 끌며 도착했다. 무엇을 들었는지 소년은 기억하지 못한다. 돌아앉은 건 외물(外物)에 대한 반사였다. 제멋대로 움직인 감각이 상황에 들어맞았을 뿐, 의도는 거기에 없었다. 벽이 노인으로 바뀌기까지, 이것이 그가 인지하고 있던 전부였다.
“나는 니클러 베나임이라고 하네. 이 나라의 선험자이기도 하고.”
하얗게 센 머리마저 거의 빠진 작달막한 노인이 말했다.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표정을 벽과 헷갈리는 통에, 소년은 인사를 건넬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창밖이 아직 어두울 때의 일이다.
덜 이지러진 날이 방을 비추는 모양새가 그때까지도 수선했다. 아직 건네지지 않은 말과, 잦은 소란을 등진 모습을, 노인은 잠시 바라보았다.
얼굴을 견주기도 전에 쉬이 알 수 있었다. 앉아 있는 것은 오딤의 표상이었다. 자신이 본 적 없는 나날 중 한 곳을 떼어다 붙인다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회상을 자극하면서도 낯선 뒷모습. 방문한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노인은 잠시 잊을 뻔했다. 이름 모를 어린 지인의 형상은 말도 시선도 아낀 채 앉아 있었다.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부를 방법을 고민하다가 니클러는 익숙하게 지팡이를 어딘가에 비껴놓았다. 벽 아니면 병사일 것이다. 소리에 소년의 귀가 움직이다 말았다. 이제는 고요해진 소란에 파문을 그리는 낯선 물방울.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니클러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니클러 베나임이라고 하네. 이 나라의 선험자이기도 하고.”
첫 마디가 건네어졌다.
“…….”
다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 공포 때문일까 혼란스러워서일까. 앞모습은 니클러의 예상보다 더 옛날 그 자체였다. 인간을 모방한 주사위를 감방에 들어앉혀 놓은 거라면 썩 유쾌한 장난이라며 그는 웃어넘길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 뻔했다. 자신이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선험자만 아니었다면 온갖 비명을 지르며 돌아다니고 싶었다.
뒷골이 얼얼하도록 빤히 바라보는 모래색 시선을 어떻게 처우해야 현명히 눈을 맞추는 것일까. 눈앞의 아이는 지금 자신이 보는 대로의 인물이 맞는 것인가. 확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흐름이 지나고 나서, 들여다보았던 가정이 껍질을 벗었을 때의 책임을, 지금 이 자리에서 지어야 했다. 결국 결과는 아무것도 기다려주지 않는 셈이다.
“아…… 저…… 그……”
상투적인 더듬거림이 들려왔다. 창백하게 질린 표정이 소리에 호소력을 더한다. 니클러가 보기에도 꽤나 그럴듯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어린 목소리에, 마지막으로 들었던 낡은 소리가 감색되는 괴리감이 귀를 누른다. 그는 냉정을 되찾았다. 이야기를 풀어낼 준비가 끝났다.
“…….”
첫 마디는 침묵이었다.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표정을 벽과 헷갈리는 통에, 소년은 인사를 건넬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연장자에게는 적절한 예의를 갖추어 인사해야 한다는 걸 배웠지만,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을 때의 행동은 아직 모른다. 소년은 사과하는 것과 다시 인사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적절한지 고민하다가, 혼란을 갈무리하는 걸 잊어버렸다.
적은 경험에나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예의를 위한 적절한 지침’과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있다는 걸! 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이야기를, 그는 가까스로 생각해낸다.
“청하……건대 이에 걸맞……는 예의로……서, 지울 수 있……는 두려움의 하나……로 당신에게 이야기하니……, 그대가 가진 나의 무례함을 더욱 큰 공포로 삼아…… 다시금 내게 돌리고자 합니다.”
간신히, 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핏기 사라진 낯빛을 하고 띄엄띄엄 단어를 떼는 소년의 입을 선험자는 닫힐 때까지 바라보았다. 어느 새 꿇어앉은 아이는 바른 자세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를 깨버려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니클러는 말했다.
“그거 대체 언제적 사과법인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어릴 적 즈음의 고리타분하다 못해 사장(死藏)된 예절이었다. 구 왕국 시절의 유물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사과에 묘한 감회(感懷)가 이는 게 괜하다. 물색없이 당황하는 소년의 표정을, 니클러는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정말 이걸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말 그대로 골치가 아프다.
선험자는 의미 없는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뻔한, 의례적인 작업이다. 테이무드가 현장에 다녀왔다는 걸 그는 조금 전에 들었다. 조율자는 현명하다. 이름을 물어봤을 터인 자명한 사실을 무리 없이 유추한다. 다만 성공적이진 못했던 모양이라고, 니클러는 앞서 가늠했다. 입을 열지 않는 건 앞에 앉은 어린것만이 아니었으니. 숨기며 말하지 않을 위인이 조율자였다면 진작 웃기지도 않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리 되새기며 니클러는 검증을 시도했다.
“자네의 이름은?”
“…….”
소년의 머뭇거리는 눈길이 앞과 뒤를 오간다. 말하려는 시선을 두고서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아까도 이랬을 것이라는 확신을 늙은 경험자는 보았다. 이름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리는 모양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낼 수 없으니 높으신 분들과 덜 높으신 분들의 조급증이 발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
그러나 이제부터 행하는 건 어디까지나 아집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본인의 아집. 스스로 괜한 조급함을 비웃는다. 나오는 말이라고 죄다 귀에 붙일 순 없지만, 그는 한 번이라도 꺼내어보고 싶었다. 소년 본인이 말하는 이름을.
“그래. 그렇다면 뭔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가 좋겠지. 죽은 침입자를 보여 달라고 했다던가? 흥미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군. 자네 이외의 침입자에 대해 알려주도록 하겠네.”
그는 조소했다. 확실히 나이를 먹을수록 대단해지는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짐승의 소리를 이렇게나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으니. 하지만 개소리인 건 제치고서도 소년은 헛소리에 꽤나 동한 모양이었다.
“정말인가요?”
노인은 내심 황당했다. 본 중에 가장 열의 있는 표정이다. 이렇게 되면 본인의 입이 정말 그 수준이든지, 소년의 귀가 그 수준인 것이다. 양 쪽 다라는 것도 꽤나 유력한 가설이다. 지금까지 상대해 온 것들이 죄다 그 모양이니 이러쿵 해도 자신은 그런 것들을 꾀어내는 대왕 머저리인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는 분명한 본심이었다. 말의 모서리를 갈아내는 일이 있어도 그는 어지간해선 허언을 하기 싫은 것이다. 묘하게 테이무드 흉내를 내는 느낌이라 낯설었지만, 혀가 평소보다 조근거리는 언어를 낸다.
“확실히 말하도록 하지. 그는 자네가 맞네. 앞으로 내려질 처사를 감안한다면 큰 차이는 없을 걸세.”
덜 된 결과물. 무디게 만들었다는 건 그만의 착각이었다. 천에 싸인 날을 말로 들이대는 꼴이다. 이 정도가 한계였다고 노인이 되뇌는 동안 소년의 얼굴은 점점 색을 잃는다. 자신에게 내밀어진 사실이 목을 벨 가능성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거짓말……이군요?”
확신이 부족해 흔들리는 눈동자가 창살 안에서 빛나고 있다. 사람 하나는 둘이 아니라는 건 소년도 안다. 부정하고 싶었다. 지금 처한 사실의 집합이, 그가 보았던 것이 상식으로 형용할 수 없는 범주만 아니었다면 소년은 물음표를 붙이지 않았다.
마주한 작은 망설임에 니클러는 난감해졌다. 의심을 곁들여 보았으나 판단은 속임수를 짚어내지 못했다. 공정하게 가야 할 시비(是非)의 무게가 자꾸 진짜 쪽으로 기울어져, 듣는 그대로를 믿고 싶게 만든다.
“거짓말이라 생각하나?”
반문(反問)이 되돌아왔다. 소년은 에둘린 긍정에 고개를 숙였고, 노인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내뱉고서야 깨달았다. 소년이 진짜라 외치는 본인의 기시감 탓이다. 다만 누군가의 꼭두각시일 것만 같은 불안감. 사실이 될 것만 같은 기우. 늙은 머릿속에서 자꾸만 최악의 가정이 떠돌아다닌다.
각본이다. 자신은 지금 각본의 한 줄에 쓰여 있는 등장인물이고, 소년은 본인 역할을 맡은 본인이다. 자신조차 모르는 이야기에 섞인 채 활자가 가는 대로 가다 보면, 각본가가 모든 것이 끝난 무대 앞에서 박수를 쳐 주는 것이다. 미소를 어리둥절한 마지막 앞에 던져주면서.
……그 꼬락서니는 죽어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 누군가보다 선험하고 있다고 신뢰하는 게 방종(放縱)같았다. 사실마저 통찰을 어지럽히고, 누군가가 아이를 찾아내어 미끼로 삼았다는 명제가 신앙처럼 다가온다.
“그렇다면 직접 밝혀보게. 자네가, 누구인지.”
거울상(像)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 들어 노인은 멋쩍었다. 자신에게 하는 독백이 대화를 겸한 채 멀쩡히 잘도 돌아간다.
“…….”
어쨌든 이로서 결과는 나왔다. 소년은 이름도, 목적도 말해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선험자에게는 어설프다 못해 기막힌 짓이었다. 다른 곳에는 입을 열어주면서 몇몇 곳에만 입을 다물어버리면 거기에 정답이 있다고 밝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니클러는 헛웃음을 갈무리했다. 방심해도 되는 귀여운 상황이 아니다. 이 판은 속임수와 바보짓의 양자택일. 자신이 속고 있는 거라면 바보짓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민낯인지 가면인지 감별하기 위해선 과감한 접근이 필요했다.
“……뭐 거짓말일 수 있어. 둘 중 하나라도 오딤의 손자가 아니라면 거짓이 되겠지.”
말이 놓였다. 그리고 얼굴을 든 소년의 표정은, 노인이 여태껏 본 중 가장 강하면서도 절박한 기색을 띄고 있었다. 온 몸에 들어간 힘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손끝. 이런 허술함이 연신 니클러를 미혹(迷惑)케 했다
“흐음…….”
정직이 내뱉는 거짓말은 선험자라도 감별할 수 없다. 그러나 위장이 벗겨질 때까지 선험하는 건 머리 빠진 노인에게도 공평한 기회다. 자유가 되었다고 착각한 순간 함정에 걸리는 이들을 그는 숱하게 보아 온 것이다. 모든 것은 그를 내보내면서 시작될 것이다. 잡을만한 꼬리를 남겨두고서. 그때까지 자신의 위장이 남아날지는 알 수 없지만.
방침은 정해졌다. 그는 일단 상황을 한 번 환기하기로 했다.
“그래, 말하고 싶지 않으면 억지로 물어도 소용없겠지.”
이윽고 그는 벽에 부딪히는 목소리를 가늠하고서,
“하긴 너무 경직된 분위기인 건 아닌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자의 의욕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말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삼엄하게 둘러싼 병사들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부릅뜬 채 바라보고 있다면 절대 편안하지는 못할 것이다. 니클러 베나임은 까탈스럽게 벽면을 몇 번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불만스러웠다.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으니 잠시 자리들 비켜주겠나.”
니클러의 말에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섰다. 한쪽 어깨에 흘러내리는 옅은 푸른색 천과 섬세한 은박 장식으로 보건대 지휘관이다.
“선험자께서 재고해 주시길 진언하는 바입니다.”
유려하게 예를 갖추며 그녀는 선험자 앞에 나섰다. 예상했던 대로지만 애초에 심판청이 절차를 준비하는 동안 방문한 것이다. 기다리게 할 순 없기에 납득시킬 여유도 없었다.
“내게 부탁할 여유가 없는 걸 알아주게.”
그의 앞에 선 지휘관은 다시금 허리를 굽혔다. 정중하지만 명백한 거절이다.
“두 번 말할 상황이 아니야.”
여지가 없는 짧은 대답에 그녀는 조심스레 진언했다.
“지휘관들만이라도 홀이신 선험자의 안위를 살필 수 있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역시 선험자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저희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도대체가 마클 아래에 있는 것들은 융통성이란 걸 모른다. 니클러는 표정을 한 번 찌푸렸다가 강하게 일갈했다. 다시 집어든 지팡이가 센 소리를 내었다.
“책임소재는 나에게 있다고 하면 될 성 싶은데? 지금 내게 이러는 것도 상당한 무례라는 것을 모르진 않겠지?”
소임을 존중해 주고 싶어도 그럴 상황이 아니다. 어색함과 미안함은 고이 접어두고 그 위에 자신이 할 일을 새겨 적는다. 죽기 전에 다시 펼쳐 보일 기회가 있으리라 여기며.
“……알겠습니다.”
결국 온기가 죽은 표정이 되고 나서야 그녀는 물러났다. 우울한 기분으로 잠들기 전에 가족이나 친구, 있다면 애인에게 자신을 욕할 기회가 그녀에게 있기를. 숨은 위로 후에 선험자는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발소리들이 돌을 연주한다. 듣기에 그다지 유쾌한 음정은 아니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모든 소리가 떠나고 난 후에, 노인이 말했다. 니클러는 다시금 창살 안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소년의 입이 조용해지지 않으면 된다. 기대하는 대로 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아마 지금부터의 짧은 간격이 원하는 것을 들어낼 마지막 기회가 되리라.
니클러는 기댈 것을 불러냈다. 허공에 비스듬하게 누운 모습이 소년에게는 퍽이나 신기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기술의 길이 만들어낸 행복의 단편은 소년에겐 아직 이른 듯, 보이지 않는 형체를 눈동자가 좇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누운 푸른색의 안정감이나 아름다움을 설명할 때가 아니다. 이제껏 언어를 내어놓아 먹였으나, 무언가 뱉어낼 정도로 배가 차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무심코 조급해졌다. 심판청의 발소리가 머지않아 내려온다.
이번이 마지막 대접이 될 것이다.
“대화는 자신만으로는 성립되지 않아.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저 독백이야. 내가 자네에게 무얼 주는 만큼 자네도 나에게 무언가를 건네게. 그래야 나도 응하지 않겠나?”
그것은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심경이며, 호의였다. 니클러는 지금, 내려다보이는 자의 정체를 막론하고 최후의 잔을 침묵 사이에 올려놓았다.
“하나 묻겠네. 편하게 듣게. 대답하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도 좋아. 다만 그렇게 해서 내가 줄 수 있는 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
꾸미지 않은 종용을 내보이고서 따라진 것을 소년에게 권한다. 독주(毒酒)라 생각한다면 그뿐이다. 반만 취하거나, 마시지 않거나, 설령 쏟아버린다 하더라도 노인의 발에 물방울이 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게가 창살을 지워낼 열쇠인 것을 알고, 완전히 목에서 넘기는 건 소년의 몫이다.
“질문하지. 자네 외의 침입자를 보여 달라고 한 건 이유가 있겠지. 혹시 자네가 여기에 들어온 것과 관련이 있나?”
그리고 늙은 손가락이 수어 번을 허공 위에 세었다. 시작, 중간을 지나 마지막을 셀 때까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한숨과 함께 니클러는 최후의 기회를 거두기 위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사이에 어렴풋이, 움직임이 비꼈다. 앙상하게 나뉜 시야 너머에서나마, 소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흔들림이 멎은 창살 안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똑바로 노인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소년은 잔을 받은 것이다.
드디어. 노인의 뱃속이 점차 들끓었다. 마침표가 머지않았다.
“알겠네. 그것에 대해선 나도 아까 말한 게 전부야. 하지만 그 이외의 것이라면 내가 아는 선에서 자네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있겠지. 부디 내가 대답할 수 있도록……”
어느새 니클러는 다시 자리에 섰다. 여백을 지그시 누르듯이, 그는 말을 감았다 떼었다.
“물어봐 주게.”
“…….”
노인에게 갑자기 든 생각이다. 소년이 침묵을 고수하는 건 단순히 비어 있는 생각을 옮기는 건지도 몰랐다. 많이 풀어졌으나 아직도 굳어있는 경악의 단면이 표정을 따라 부스러져 내린다. 긴장이 미처 깨지지 않은 말. 대신 고개가 다시 움직였다. 긍정이다. 여전히 느리지만, 소년은 전보다 확실한 반응을 돌려준다.
그러나 아직이다. 답을 가린 먼지는 언제쯤 가라앉을 것인가. 노인에겐 분명하게 보였다. 소년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핵심 근처에 있어서 꺼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이름에 대한 억눌린 반응, 궁 안에 있는 소년 외의 관계자. 미완이나마 단서를 주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엿보이지만 모든 상황이 이미 어떤 그림자를 가리키고 있다. 오래 전의 망령, 멈추지 않은 사건의 주사위. 그렇기에 말하지 않으면 소년은 목의 위치를 장담할 수가 없다. 이건 그런 문제다.
잠깐만. 생각에 제동이 걸린다. 때가 늦은 탓인지 머리가 둔하게 돌아간다. 소년이 궁 안에 있던 것에 너무 집중한 탓인지 오기까지의 행적을 미처 가늠치 못했다. 성립하려면 어마어마한 우연을 속여 넘겨야 하는 모순인데도.
“천천히 해도 상관없어. 물어볼 것이 생각날 때까지 잡담이나 나눠보지. 자네 수도에 어떻게 왔나?”
소년의 존재를 달은 뒤늦게 눈치챘다. 포탑의 추적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건, 기술적인 영향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비 등록자이며, 혼자서 수도에 입성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다는 것. 내부에서 지금껏 살아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결단을 걱정하는 찰나, 소년의 입이 움직였다. 이토록 긴장하는 순간이 살면서 얼마나 있었던가. 니클러는 지팡이를 꽉 쥐었다.
“가장 먼 마을에서 이……”
“잠깐만.”
짧은 소리는 다급히 문장을 지워냈다. 먼저 읽어낸 입술의 다음인지라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군…… 그만하면 됐어. 이제 알았네.”
먼 곳을 헤아리는 시선을 노인은 이내 닫았다.
“말을 잘라서 미안하군. 하지만…… 이제 알았어.”
결론은 나왔다. 노인의 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소년도 상황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죽는다.
“황야를 통해서 왔군. 그 외엔 로임-벤으로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수도에 오게 되었을 거고, 도착한 후 우연히 누군가에게 형이 내려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거야. 자네가 들어온 건 그 때문이 아닌가?”
“!!!”
정직해도 너무 정직하다. 사람 속이는 법이라는 걸 모른다. 말하려는 모든 언어가 표정을 통해 나타난다.
“나는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 그들의 상황을 알려줄 수도 있어. 그러니 답하게. 혹시 자네의 혈육인가?”
친절한 함정이다. 이제 걸려들 수밖에 없다.
“…….”
망설임, 그리고 끝.
“……부모님…… 입니다.”
아직이다. 미소는 아직이다. 확실히 들어낼 때까지 참아야 한다.
“좋아. 이것이 마지막일세. 자네가 누구인지 알아야 부모님이 누구인지 알 것 아닌가.”
기다렸던 질문을 다시금 내민다. 이번에는 좀 다를 것이다.
“다시 한 번 묻겠네. 자네의 이름은?”
미로의 끝. 니클러의 말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카……모렐. 카모렐…… 헤드리아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