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하나 없이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오히려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아 충분히 쉬고 잘 먹은 덕분에 둘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떠나는 날의 첫 식사는 민물생선으로 쑨 어죽이었다. 특별한 부재료는 없었지만 자체의 깔끔한 고소함이 일품이라 맛도 있고 공복에도 잘 넘어가는 음식이었다.
“이건 정말 맛있는데요.”
완성도로만 따지면 둘이 여관에서 먹었던 식사 중 으뜸이었다. 르윈이 놀랄 정도였다. 물론 소년도 재깍 먹어버리며 동의했다.
정신이 맑은 김에 병사는 어제보다 더 유심히 소년이 식기를 쓰는 모습을 관찰해보았다. 의외로 식사법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 싶더라니 잡는 방법까지 틀리는 법 없이 준수했다. 상당히 능숙했다. 아침의 얼떨떨한 정신으로도 익숙하게 그릇의 가장자리부터 깨끗이 담아 먹는다. 그의 청결상태도 지금까지보다 훨씬 나았다. 덕분에 양쪽 다 개운하게 식사를 마쳤다.
배도 채웠으니 떠날 일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짐을 확인하고 르윈은 퇴실 준비를 했다. 청년은 의자에 앉아 발을 흔들며 노는 카모렐까지 챙겨 방을 나왔다.
몇 안 되는 문들이 늘어선 칠 벗겨진 복도를 지나 나무계단을 내려갔다. 한적한 1층 공간의 어제 그 위치엔 지난번 그 의자에서 본 적 있는 남자가 한결같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내려오는 둘을 보더니 일어나 경건하게 인사를 보냈다. 르윈도 더불어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둘은 값을 치르러 입구 앞의 카운터로 갔다. 놓인 종을 흔들자 안의 작은 문에서 아주머니가 나와 길다란 대(臺) 앞에 섰다. 그녀는 긴 탁상 위의 무언가를 잠시 바라보았다.
“어디 봅시다…… 의전관께서 묵으신 내용은 이렇게 되네요.”
그러고는 투명한 작은 판을 하나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숙박을 포함해 그들이 식사한 비용이 적혀있었다. 명세서에 서명하며 르윈이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주인은 판을 공손히 받아들었다.
“그렇다고 말해주시니 정말 다행이네요. 저희 남편이 의전관 손님이 왔다고 굉장히 난리였어요. 신경써드려야 한다며 들어가지도 않고 저렇게 나와 있는 것 좀 보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기분 좋게 손사래를 쳤다.
“다른 때 같으면 접객은 싫다며 잘 안 그러는데 이번에는 만든 거 꼬박꼬박 자기가 가져갔다니까요. 안 그런 척 하지만 지금 얘기도 다 듣고 있어요.”
한 발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카모렐은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른 방향을 기울여 응시한 채 탁자에 앉아 식탁보를 만지는 중이었는데 같은 동작을 연신 되풀이하고 있었다. 뒤돌아 그 모습을 본 아내는 피식 웃었다.
“조금 전 드신 어죽은 남편 솜씨예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인정해야겠더라고요. 보통 우리 둘은 주방에서 나올 일이 없는데 요새는 바다가 저러니 바깥손님도 없어서 음식 날라주는 아이도 쉬고……”
주책없이 수다가 길어지려 하자 주인은 끝을 대충 잘랐다. 지워지며 서서히 말이 끝나자 병사는 일부러 행동을 과장해가며 대답했다.
“아! 그랬군요. 이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평소보다 목소리를 높여 잘 들릴 수 있도록 발음했다. 저쪽에서도 선명히 들릴 정도의 크기로. 그러자 그녀 특유의 기운 좋은 너털웃음이 카운터 안을 울렸다.
“됐어요. 제가 잘 전해둘 테니 떠나는 모습이나 보여주시면 가장 기뻐할 거예요.”
그녀는 번듯한 미소로 화답했다. 격 없고 순박한 웃음이 그들을 배웅해주었다.
둘은 여관을 나와 소금기 없는 바닷바람 속을 걸었다. 마른 풍경을 서서히 지나치다가 르윈이 바위무리 앞에 섰다.
“그럼 이제 갈 곳을 다시 정해볼까요.”
그러면서 병사는 지도를 펼쳤다. 달에서 정보를 불러내 주위의 흐름에 비춰 나라의 평평한 전도(全圖)를 본다. 실존하는 형태에 있는 색깔을 달로 읽어 기술로 재현한, 반사된 초상(肖像)이 형체를 입고 청년의 눈에 보인다.
어슴푸레 빛나는 만물이 새에게 바라보이듯 까마득한 크기로 정교한 모형처럼 꼼꼼하게 놓였다. 실은 더 높은 곳에서 달의 시선으로 비치운 기록이다. 정보를 기술로 다시 내보인 것이라 본연의 사물이 가졌던 고유한 색은 아니어도 빛살로 덧칠되어 화사한 색채가 자못 고왔다.
“이 지도를 보시면 지금 저희는……”
말이 멈췄다. 소년은 지도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은 애매한 거리를 갈팡질팡하다가 돌연 청년에게 언뜻 기울인다. 의문부호를 자꾸만 내미듯이 희미한 이해였다. 이유를 모르고 되는대로 종용하려다가 르윈은 간과했던 사실을 머지않아 알아챘다. 그는 등록자가 아니었고, 지도가 보일 리 없었다. 인간더러 왜 파드하처럼 흐르는 것 안에서 살지 않냐고 꾸짖는 행위나 진배없었다. 병사는 바보짓을 급히 뉘우치며 폈던 지도를 즉각 접었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
카모렐은 상황을 전혀 해석하지 못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은 의아하다는 의미였다. 르윈은 소년을 데리고 다니는 데 조금 한계를 느꼈다. 앞으로 얼마나 불편할지 이로서 예습이 끝난 셈이다. 지도 정도는 사면 되지만 혹 기술이 필요해질 때마다 이해시킬 방법을 강구할 수는 없었다. 서로 불편할 것이고, 대화도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이래선 이야기가 제대로 통하지 못한다. 청년은 결단을 내렸다.
“뭔가 대책이 필요할 것 같군요. 최소한의 정보조차 전달되지 않아서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생길 겁니다.”
소년에게 기술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비등록자들이 사용하는 물품이 있어야 했다. 그것도 단지 구하는 게 관건이 아니라 적합한 딱 하나가 필요했다. 그들이 쓰는 부피 큰 생활용품들은 한 곳에 오래 있을 것이 아니면 그저 거추장스러운 짐이 된다. 필요한 건 아주 기본적이고 비교적 휴대하기 간편한 그런 것이었다.
르윈은 그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안경처럼 시력을 보정해주는 물체를 테 안에 넣은 것인데, 얼굴에 걸치는 것이 아니라 손에 들고 다니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유리나 수정을 깎아서 넣은 대신 흐름을 관찰할 수 있는 매체를 채워 최소한의 기술이해를 가능하게 한 일종의 확대경이다.
돋보기. 의전관은 겨우 떠올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그걸 제작해주는 덴 거의 없었다. 수도에도 없고, 구하려면 나라 끝 변두리 시골까지 가야 했다. 그건 그냥 여행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대체할 만한 것이 있을까 청년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근처에서 구할 수 있고, 기술을 보는 안경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 잠시간의 고민 후 의전관은 좋은 생각이 났다. 어디에나 하나씩 있고 어느 정도 원하는 모양으로 제작도 가능하며 비등록자도 문제없이 쓸 수 있는 그런 물체. 그거라면 소년도 지도를 볼 수 있었다.
“어쩔 수 없군요. 이번 행선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갈 곳은 하나밖에 없네요.”
갈 수 있는 이정(里程)은 세 군데. 후보였던 두 장소 중 하나는 수도로 되돌아가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바다를 따라가 수도를 거르고 쭉 아래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두 길은 차이가 없었다. 수도를 통하느냐 아니냐만 제외하면 사실상 같은 길이다. 르윈이 고른 행로는 나머지와 반대로 가는 경로였다.
“그럼 북쪽으로 가도록 할까요.”
병사의 말을 따라 갈 장소가 정해졌다. 이렇게 일방적인 타협은 르윈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이번 결정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소년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미비했고, 여행식도 슬슬 떨어지는 차라 육로무역의 중간점인 그곳에 가고 싶었다. 수도로 다시 가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고, 사실 북쪽으로 가는 것도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아주 가까웠다. 걸어도 하루 이틀이면 도착할 거리다.
“좋은 거 사드릴게요.”
어린아이를 구슬리듯, 미소 지으며 르윈이 차분히 말했다.
“진짜요? 좋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모렐은 간단하게 넘어가주었다.
병사는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일일이 설명해주는 유형은 아니었기에 카모렐은 자주 궁금함에 흔들렸다. 뭐든 아는 게 너무 적은 그에겐 걷는 곳마다 생소해서, 서투른 의문으로나마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도중에 카모렐이 질문했다. 걸음에 지친 건 아니었지만 그저 알고 싶었다. 질문을 내면 병사가 설명만은 착실히 해 준다. 의무적인 반사처럼 무미건조한 느낌도 들었지만 소년에게 크게 닿아오지는 않았다. 변함없는 태도로 르윈은 평이하게 소리를 내었다.
“저희는 지금 모라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세세히 지명(地名)을 대봤자 소년은 이해하지 못한다. 일단 나라부터 가르쳐 둔 다음 나머지를 알리기로 하고, 르윈은 대충 말했다. 그러자 카모렐은 재차 물었다.
“□△▼*(역자 주 : 왕로. 往路.)의 이름인가요?”
생소한 단어가 제시되었다. 병사는 발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소년은 잘 쓰지 않는 말을 하곤 했다. 중립어인지 무엇인지, 철저한 현대인인 르윈으로서는 헷갈리는 어휘들이 던져질 때마다 적당히 짐작해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비교적 쉬웠다. 방금 대화에 고유명사는 하나뿐이다.
“모라는 나라 이름입니다. 근처로 갈 뿐이지 국경을 넘진 않을 거예요. 시장에 가는 겁니다.”
이렇게 정답을 맞춘다. 답을 돌려받은 소년의 반응은 괜찮았다. 납득한 모양이었다. 나란히 걷는 동행자를 재차 보다가 청년은 순간 ‘국경이 뭔가요?’라는 질문을 예상했으나 소년은 더 묻지 않았다. 카모렐은 다르게 말했다.
“시장이 뭔지 잘 몰라요.”
르윈은 생각했다. 뭐라고 설명하는 게 의미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일까. 이럴 때마다 항상 직관적이던 머릿속의 느낌을 풀어 그려주려니 자주 난감했다. 갈피를 잡고 이번에 나온 결론은 밝힐 필요 없다는 판별이었다. 어차피 실제로 이를 터였다.
“가 보면 알 거예요.”
그로서 훌륭히 정리되었다.
미소가 지나갔고, 여정엔 침묵만이 필요했다. 뜻 있는 유랑에 성긴 걸음을 떼어 다시 하루를 지난다. 별일 없이 또 하나, 날을 벗어났다.
둘은 짧은 여행 동안 이야기를 많이 나누진 않았다. 엉긴 어색함이 어딘지 껄끄러워, 모자라는 대화만을 간혹 주고받는다. 그건 시작할 때부터 같았다. 엄밀히 한 쪽은 병사고 다른 녀석은 죄수라는 객관적 입장에 구애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날것처럼 흐르는 서먹함이 일교차처럼 변화하는 나날들. 처음이 끝난 아직까지도 공존하는 생소한 느낌들은 어느 한쪽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게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소년이나 의전관의 체력에 무리가 없었으므로, 둘은 하루를 꼬박 걸어 금방 도시에 도착했다. 카모렐의 활동력이 왕성해 오히려 르윈이 먼저 힘이 빠질 뻔했다. 지친 기색을 티내지 않으며 의전관은 태도를 정제했다.
“이곳입니다. 산맥 근처의 도시 중에는 가장 큰 시장을 갖추고 있는 곳이에요.”
도착을 기뻐하며, 르윈이 짤막한 일정의 끝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