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 사라진 생명에게 신의 보살핌이 있기를…….”
마을 촌장이자 교회의 목사인 이스트의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죽어간 생명 앞에 조의를 표했다. 아이의 어미는 찢어질듯 한 소리와 함께 통곡했으며 그런 어미의 앞에서 이젠 온기를 잃은 시체아래의 짚 더미에 불이 놓여졌다.
짚더미는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타들어가며 그 위에 놓인 시체는 불쾌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어미는 반쯤 실성하여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무력하게 그저 익어버린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런 어미에게 차마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옆 마을에선 검은 죽음으로 마을 주민 전부가 몰살했다. 또 한달 전 아랫마을에선 검은 죽음이 발병하자마자 병사들이 몰려와 마을 주민 전부를 몰살시켜 화장해버렸다. 아직도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가 마을 전체에 깔려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서 타들어가는 시체는 결코 검은 죽음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그저 운이 좋지 않아 우연히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죽은 시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번 년도는 풍작이겠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미의 곁에 조용히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던 소녀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목사 이스트는 그런 소녀의 등을 두드리며 다른 손으로는 손을 붙잡아 주었다.
“그럼 안젤라. 분명 안드레아가 하늘에서 신님에게 부탁할 거란다.”
그러나 안젤라라고 불린 소녀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바닥에 놓인 흙을 한 움큼 쥐어들었다. 며칠 전 내렸던 비 덕분인지 흙은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계절에 맞추어 자란 새싹이 그 위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땅이 배부르잖아.”
***
“아들을 잃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미 자네들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치렁치렁한 사제복을 벗어던지고 가죽 튜닉으로 갈아입은 촌장이 불쏘시개로 화로의 나뭇가지를 뒤척이며 말했다.
“난 마을의 화장터가 조용하면 좋겠네. 불길에서 타들어가는건 나뭇가지면 충분하잖은가?”
촌장은 그렇게 말하며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돈 뭉치를 꺼내어 오늘 아이를 잃은 부모의 손에 건네주곤 방금 전 화장터에 던져 넣은 아직 살려낼 수도 있었던 생명을 기리며 따듯하게 데운 포도주를 들이켰다. 잔을 비운 이스트는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미와 아비에게 남아있는 포도주를 건네주었다.
부모는 잔을 받아들곤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눈앞의 늙어빠진 노인을 눕혀 저 화로에 넣어버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스트가 말한 대로 불길에서 타들어가는 것은 나뭇가지면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고, 자신의 아들이 불러왔을지도 모르는 재앙에 결국 떨리는 손으로 노인이 건네준 포도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다녀오셨어요!”
부모가 집에 돌아가자 아이들은 입을 모아 부모를 반겨 주었다. 그러나 하나의 목소리가 줄었다는 사실, 그리고 방금 전 마셨던 포도주의 의미와 한 손에 쥐여져있는 두둑한 돈 주머니에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그것을 가까스로 억누른 어미는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한명씩 볼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오늘 저녁은 고기를 듬뿍 넣은 스튜란다.”
어느새 완성된 스튜를 보자 아이들은 철없이 좋아했다. 아직 어린 그들에게 죽음이란 단어는 무거웠으며 스튜에 떠오른 고기와 기름기에 안드레아는 어느새 기억에서 잊혀졌다.
“안젤라는 먹지 않는거니?”
“…”
안젤라는 스푼조차 들지 않은 채 그저 말없이 스튜를 노려보았고 그 어린 눈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안드레아의 맛이나.”
그 말을 끝으로 안젤라는 스푼을 내려놓은 채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으며 어미와 아비는 애써 그 말을 듣지 못한 척을 했다.
***
“이 마을은 다행이군요.”
“이게 다 신의 덕분입니다.”
촌장 이스트는 검사를 위해 나온 마을의 제국군의 손을 붙잡으며 악수를 건넸고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던 제국군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뒷짐을 쥐며 마을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검은 죽음이 피해가는 마을이라. 이거 마술이라도 부린 것 같군요. 아 그리고 이 주머니는 저희의 약조한 선물입니다. 내용물을 확인하시고 주머니만 돌려주시면 됩니다.”
촌장은 미묘한 웃음과 함께 제국군이 건네준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듯 너무나 가벼운 주머니를 보던 촌장은 사제복 아래에 걸치고 있던 튜닉에서 반짝이는 금화를 꺼내어 주머니에 가득 넣어주었다.
“자, 주머니 돌려드렸습니다.”
촌장은 다시 한차례 악수를 위하여 손을 건넸고 제국군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고는 위 아래로 흔들었다.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안젤라가 무릎을 꿇은 채 양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과연, 신의 축복이 함께하는 마을이군요.”
제국군은 촌장과 맞잡았던 손을 놓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바람에 촌장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물들었다.
“이번 년도는 풍작일거야.”
“그렇겠지. 신께서도 너희를 반겨 주실 거란다.”
제국군은 잠시 고민하는듯하더니 ---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고, 이내 좋은 일이 있을거라며 손을 흔들어 주곤 서둘러 다음 마을을 향하여 말을 이끌었다.
***
마을의 화장터에 한 소녀가 서있다. 이젠 불쾌한 냄새조차 남아있지 않은 곳에서 그저 화장터를 바라보며 눈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이제 촌장님이 화장터를 더 쓸 일은 없겠어.”
“… 그렇단다.”
어쩌면 대주교로부터 신도로 선택받을 지도 모르는 소녀를 보며 촌장은 조용히 이를 갈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부모의 동의를 받아 창고에 쌓아둔 수많은 짚더미와 그녀를 더 이상 태울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듯 했다.
“제국의 빵은 맛있다고 들었는데 맞지?”
“그렇…다고 하더구나.”
안젤라는 그렇게 말하곤 휙 하고 몸을 돌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촌장 이스트는 풍겨오는 비릿한 흙냄새에 더럽다는 듯 침을 퉤 뱉곤 다음 날 있을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서둘렀다.
***
이번년도는 유례없을 정도로 풍작이었다. 곡물을 넣어두는 창고는 터질 지경이었으며 덕분에 마을의 소와 돼지도 살이 그득하게 들어 차 있었다. 연이은 검은 죽음으로 인하여 곡물과 고기의 가격은 폭등했고 그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돈방석에 올라앉게 되었다.
“마을의 풍작을 안겨주신 신께 감사를!”
“감사를!”
촌장 이스트의 일장 연설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술잔이 하늘을 향하여 들어 올려졌다. 촌장 이스트는 이날을 위하여 고급 포도주를 구비했고 이를 전부 베풀었다. 몇몇 비어있는 자리를 제외하곤 마을 사람들의 손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부 포도주가 들려있었다.
그러나 누구 한명도 마음껏 웃을 수는 없었다. 풍작의 이유는 명확했고, 지금도 바닥 아래 깔린 흙은 차고 넘치는 기름기를 줄줄 흘려대고 있는 듯 했다. 마치 누가 고깃덩이라도 땅에 뿌린 것처럼 말이다.
“건배!”
촌장의 마지막 외침과 함께 사람들은 일제히 잔을 부딪쳤고 양조장의 스카니어가 맥주가 가득 들어있는 오크통을 터뜨리며 축제는 열기를 더해갔다. 촌장인 이스트는 맥주를 보며 입맛을 다시긴 했지만 사제이기에 따듯하게 덥힌 포도주를 마시며 안타까움을 표할 뿐이었다.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이어진 축제는 결국 오크통에 담긴 맥주를 전부 해치우고 포도주를 절반쯤 비우고서야 끝이 났다. 테이블은 엎질러진 술과 떨어진 고기 그리고 빵조각으로 어지러웠다.
더하여 안젤라의 자리아래에는 젖어든 흙이 달콤한 포도주의 향기를 그윽하게 풍기고 있었다.
***
“어찌 된 일인지…….”
마을에 도착한 대주교는 눈앞의 참상에 손을 떨어대며 마차에서 내렸다. 사방에는 오물이 즐비했고 그에 섞인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마차에서 내린 대주교는 결국 토사물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대주교님 들어가시죠. 검은 죽음입니다.”
제국군은 시체의 사지에 퍼진 괴사를 보며 말했다. 대주교는 아찔한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마차에 올라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어떻게든 참아냈다.
“서둘러 제국에 보고를…….”
“잠시만 기다려주겠나?”
“고…공작님!?”
마차의 한편에 타고 있던 남성이 움직이자 대주교를 포함한 제국군의 병사들이 일제히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공작님! 검은 죽음입니다! 육체를 보존하심이…….”
“언제부터 내 뜻에 반발하게 되었지?”
공작의 말에 제국군은 일제히 얼어붙어 그저 ‘가…감히 실언을’이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대주교조차 입을 다물었고 모두의 침묵과 함께 공작은 마차에서 나와 땅을 밟았다.
공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체는 하나같이 검은 괴사반응이 일어나고 있었고 하나같이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죽어간 듯 했다.
“이상하군.”
본디 검은 죽음은 전염병으로 서서히 전이되는 것이 일반적.
폭발적인 전염성으로 인하여 단 한명이라도 검은 죽음이 발현되면 제국이 나서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켜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땅에 묻혔다.
그 때문에 시민들은 검은 죽음의 기미가 보이면 살릴 가능성이 있음에도 강제로 화장하는 방법을 취하는 식으로 검문을 피하곤 했다.
하지만 이 마을은 어떤 보고도 없었으며,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가족들의 단위로 죽어있었다. 밭은 경작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고 곡물창고에는 밀가루가 바깥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가득 들어차있었다.
공작은 계속해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집의 열쇠는 걸려있지 않았고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수많은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대부분의 집을 둘러보는데 반나절도 체 걸리지 않았다.
“이곳은 촌장의 집인가.”
문을 열자마자 들어온 수많은 열쇠, 마을의 유일한 사제는 촌장인 경우가 많았고 이곳 역시 별반 다르지 않게 벽에 걸린 사제복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촌장역시 검은 죽음에 휩쓸렸는지 침대에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죽어있었다. 시체를 건드리기엔 귀찮았기에 집을 둘러보자 많은 금화가 튀어나왔다. 성경위에 쌓아둔 금화를 보면 제대로 된 사제가 아님을 유추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공작은 열쇠를 챙겨들고 마을의 열리지 않았던 창고들을 둘러보았다. 창고에는 역시나 많은 금화가 쌓여있었다. 꽤나 부유한 마을이었는지 사들인 곡식이나 고기의 목록만 보아도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아직 일주일도 채 안 지났나 보군.”
마을에 들를 행상인이나 한 달에 한번 들르는 상인들의 보고가 없는 걸로 봐서는 분명 검은 죽음이 쓸고 지나간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아보였다. 그렇기에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일주일 만에 마을 주민 전부가 동시다발적으로 죽어버린 경우는 지금까지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계속해서 남은 창고를 둘러보던 중 공작은 큰 오크통을 하나 발견했다. 밀봉이 개방 된 상태로 보아하건데 빈 통이라 생각했지만 척 보기에도 꽤나 무게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오크통의 뚜껑을 열어젖히자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포도주의 빛을 띄고 있었으나 검게 변해있었고 표면에 기름이 굳어있었다.
“… 이거구만.”
공작은 반 정도 남아있는 오크통을 뒤집음과 동시에 대강의 사태를 그려낼 수 있었다. 내용물을 뱉어낸 오크통의 아래에는 수많은 쥐의 시체가 있었고 하나같이 검게 괴사되어 있었다.
자신의 지식으로 흑사병의 종주가 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제국조차 검은 죽음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유는 그저 조금 특이한 학문을 공부하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원래대로 라면 기다리는 제국군들을 위해 창고를 수색하고 돌아갈 작정이었으나 쥐의 시체와 함께 전부 뒤로 미루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 아니길 바라며 나머지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거의 마지막 집에 들어오자 테이블에 놓인 식기가 눈에 들어왔다. 음식물이 붙어있는 식기는 분명 5개였으나 다정하게 죽어있는 시체의 숫자는 고작 넷 밖에는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작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잠겨있는 문이었다. 아무리 바람이 분다고 한들 문의 쇠막대를 움직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에 그 문은 필시 누군가가 잠군 것이 분명 했다.
공포감보다 앞서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공작의 구두소리가 나무마루의 끼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리기 시작했다. 정적이 감도는 공간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거대했고 일말의 긴장감과 함께 공작은 닫힌 문을 걷어찰 준비를 끝마쳤다.
다리를 들어 내지르려는 그때. 귀를 의심할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어…….”
공작의 얼굴에 미소가 차올랐다. 자신의 상식을 벗어난 무언가가 이 문 앞에 있다는 긴장감은 공작에게는 지금까지의 피로를 말끔하게 지워주는 최고의 포상과 다를 바 없었다.
“문을 열어주겠나?”
대답이 들리기도 전, 기다렸다는 듯 쇠막대가 밀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막대의 끝이 철판에 닿는 소리와 함께 공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덜미를 넘어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고 썩은 나무가 내뱉는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것 참…….”
공작은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결말은 아니었다. 내심 스스로 최악의 결과를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절로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신의 축복이 있었군. 악몽은 지나갔다 나를 따라…….”
그때 공작은 보았다. 소녀의 뒤에 놓인 수많은 식량과 물, 나아가 짚더미로 막아놓은 문의 틈새와 쌓여있는 수많은 천 조각들. 그리고 소녀의 얼굴에 피어오른 소름끼칠 정도의 정적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잠시 침대 아래에 놓인 쥐덫을 보며 결국엔 공작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큰 헛웃음을 내뱉었다. 소녀의 입가에 묻어있는 빵가루와 아직도 남아있는 물, 그리고 쌓여있는 책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있는 것은 그에게도 무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신의 축복이 있었어.”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보란 듯 테이블에 고이 모셔놓은 성경을 가리켰다. 성경에는 먼지가 쌓여있었고 표지는 사람의 손을 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공작을 바라보곤 치맛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소개를 먼저 하지. 난 후스 공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간에서는 날 황혼의 마술사라 부른다네.”
마술사라는 단어에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소녀의 어깨가 흠칫 튀어올랐다. 그 모습에 공작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곤 아직도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소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넌 나를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 황혼의 마술사”
소녀의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
“이런 곳엔 한 순간도 있기 싫어. 숨쉬기도 역겹단 말이지.”
어둑해져 가는 날씨에 제국군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차주변에 쪼그려 앉았다.
“공작님은 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하시려는 건지…….”
“후스 공작이면 이상하지도 않지.”
제국군은 입고 있던 옷의 소매를 걷더니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또 다른 제국군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멍청한 친구가 답답한지 제국군은 다른 손으로 들어 올린 손을 툭툭 두드려 보였다.
“왼손과 다르게 오른손은 신성시 여겨지잖아? 그래서 범죄자가 찍는 죄의 낙인도 오른손이고. 하지만 낙인은 범죄의 낙인만 있는 게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며 제국군은 주변의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바닥을 긁어냈다. 몇 차례 소리가 들린 후 바닥에 삼각형이 그려졌다. 마차에서 대주교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제국군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려진 삼각형을 반으로 갈라 보였다.
“너 그거…….”
“맞아, 이단의 증표지.”
교회의 중요한 교리인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증표를 그린 제국군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차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소문이지만 후스백작의 오른손은 이거다. 라는 소리가 있거든.”
제국군들이 떠들자 대주교의 헛기침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들리지 않게 ‘예이 알겠습니다. 저희가 감히 신성모독을!’ 이라며 다시금 자세를 취하려 했고 동시에 눈앞에 자리한 검은 양복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오…오셨습니까.”
“슬슬 돌아가지. 황제 놈이 침실에 눕기 전에 도착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황제를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지만, 그보다도 공작의 뒤에 보이는 한 소녀를 보며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생존자… 인가요?”
“신의 축복이 닿았다네.”
“신의 축복… 그렇구나! 그때 그 아이구나! 다행이야!”
제국군은 낯익은 얼굴에 양손을 벌려 소녀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물러서게.”
공작은 벌려진 양팔이 무색해지게 소녀를 안으려던 제국군을 밀어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공작의 분노 섞인 눈동자에 제국군은 물에 젖은 강아지마냥 쉴 새 없이 전신을 떨어댔다.
“나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대지 말거라.”
“나의 것 이라니! 그 아이는 신의 선택에 따라 교회로…!”
“신이 있다면 오늘 밤 그 아이를 데려간 교황이 갑자기 바뀔 일은 어디에도 없겠지. 그렇지 않은가 대주교?”
대주교는 손을 떨어가며 신성 모독이라는 단어를 입 바깥으로 꺼내려 했다. 그러나 황혼의 마술사의 눈동자는 불을 기르고 있었다. 모든 것을 태워 재로 만들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주교는 차마 신의 이름을 꺼낼 수 없었다.
떨고 있는 대주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공작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소녀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옆 자리에 앉혔다. 소녀는 생에 처음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이젠 시체밖에 남아있지 않은 마을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눈동자의 불길은 서서히 잦아들며 마을의 풍경에서 점차 공작에게 이동했고 소녀는 공작의 눈을 마주했다.
“이름을 하나만 지어줘.”
“그렇지 않아도 그럴 작정이었다. 베아트리체.”
그날 보고를 받은 황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경기를 일으켰다. 교황은 양 손을 맞잡고 신을 부르짖었다. 로마의 마술사들은 감탄했으며, 마녀들은 무릎을 꿇어 축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날, 새로이 탄생한 마술사의 제자를 보며 황혼의 마술사의 미소는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