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의 손을 잡고 로마로 향한지도 벌써 세 달이 지나갔다. 유럽 전역을 집어삼킬 듯 날뛰던 흑사병은 마술사들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빠르게 호전 되었고 아직 땅에 묻혀 썩어가는 시체는 역겨운 향기를 풍기지만 시간이 잊어주듯 점차 사람들은 다시금 일상에 휩쓸렸다.
“춥진 않으냐?”
“네. 오히려 입고 있는 코르셋이 간질거릴 지경이에요.”
로마에 도착해서 베아트리체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언어였다. 그녀는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랐고 더욱이 예절을 지키는 말투는 전혀 알지 못 했다. 그러나 우수함을 증명하듯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언어를 익혔고 나아가 예법을 익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미미한 찬 공기에 공작은 한손에 가져온 차를 내밀었다. 향기를 머금은 허브티는 코를 찔러와 절로 손이 내밀어졌고 머그잔의 표면을 만지자 깔끔하게 세공된 유리로 온기가 스며들어 베아트리체의 몸을 감싸는 듯 했다.
“너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구나.”
“사소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물어보겠지만 아직 마술에 대하여 묻기엔 삼일 밤낮을 물어도 부족할 테니 언젠가 날을 잡아서 전부 물어볼겁니다.”
후스공작은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테이블에 새겨진 그을음을 쓰다듬었다. 석 달의 시간은 짧지 않았고 후스공작의 기대에 맞추어 베아트리체는 빠른 속도로 마술이 향상되고 있었다.
아직까지 원리는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공작의 가르침대로 물체에 손을 뻗어 강하게 바라면 아주 조금씩이지만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쯤이면 슬슬 너에게도 지팡이가 필요할 듯한데.”
“지팡이… 말인가요?”
베아트리체의 물음에 후스는 미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
서서히 추위가 모습을 드러낸 10월의 로마거리는 아직도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가판대에 놓인 큰 솥에서는 콩이 삶아지고 있었고 콩 특유의 달콤한 향기와 과일의 상큼함이 어우러져 제법 괜찮은 공기가 흐르고 있다.
그 달콤한 공기를 만끽하며 거리를 걷고 있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은 아직 10살이라고 하기에 성숙한 분위기를 내뱉었고 곁에 있는 공작의 모습에 세상 신기할 것 없다 자부하는 장사꾼들도 잠시 장사에서 손을 때고 공작과 베아트리체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둘러보고 싶은 것이 있지는 않으냐?”
“사주시기라도 할 생각인가요?”
베아트리체는 대답도 듣지 않고 어느새 가판대로 달려가 아름다운 눈꽃 자수가 새겨져있는 브로치를 집어 들었다. 가게주인은 얼굴 잔뜩 미소를 품고 자수의 의미와 사용된 금속을 가르쳐 주었다. 공작은 가게의 주인에게 안주머니에서 금화를 던져주며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창고에 쌓여있는 금화를 전부 써도 아깝지 않겠지. 물론 그 금화를 전부 사용한다 한들 네 가슴에 잠들어있는 불길을 잠재울 순 없을 테지만.”
그러나 공작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베아트리체는 가게 주인에게 가슴을 내밀었다. 척 보아도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원단을 보며 가게주인은 잠시 망설였다.
눈동자는 공작을 향했고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게주인은 낮은 한숨과 함께 옷에 바늘을 찔러 브로치를 달아주었다. 그 것은 황궁을 들락거리는 공작이 보기엔 하찮은 물품이었으나 베아트리체의 미소를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선 어떤 고급품보다 값진 브로치였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거죠? 솔직히 지팡이가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야 멋이지.”
“…네?”
공작의 시원스런 대답에 베아트리체는 당황했다. 지팡이는 노인들이 짚고 다니는 물품이며 그것을 멋이라 칭하는 공작의 미적 관점에 살며시 의구심이 들었다.
“마술은 정신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분과 분위기를 함부로 여길 수는 없지. 그러니 지팡이를 휘두르며 한껏 기분을 내는 게다.”
그 말에 베아트리체는 공작을 둘러보았으나 어디에도 지팡이는 보이지 않았다. 몇 일전 책에서 보았던 기사처럼 등에 숨기고 다니는 모습이 연상되어 슬며시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성장하면 지팡이는 필요치 않아. 그런 사소한 매개 없이도 마술을 행하는 대는 지장이 없지. 하지만 넌 아직 자라는 병아리다.”
그 말과 함께 공작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베아트리체역시 발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자 반쯤 허물어진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저택의 지붕과 벽 사이에는 거미줄이 퍼져 있었고 쌓인 먼지는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낡아빠진 나무문을 열자 이음쇠가 잘못되었는지 불쾌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그 앞에는 기름기와 더러움을 전부 품고 있는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거 설마 후스공작님이 이곳에 오실 줄은 전혀 몰랐지 뭡니까?”
“유럽 어디를 찾아보아도 너 만한 녀석은 찾기 힘들지.”
공작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손에 물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남성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 손을 맞잡았다. 베아트리체는 차마 남성의 손을 붙잡기는 부끄러운지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를 표했고 남성은 한손을 가슴에 붙여 꽤나 멋들어진 인사로 답했다.
남성의 안내를 받고 집으로 들어가자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계란이 썩어가는 향기가 섞인 그 불쾌한 냄새만은 후스공작도 참기 힘들었는지 코를 막았다.
“이거 죄송합니다. 한창 작업도중이여서 청소를 하지 않았거든요.”
“걱정 말게나. 어차피 정상적인 환경은 기대도 안했다네.”
베아트리체는 남자끼리의 대화가 질렸는지 어느새 후스공작의 곁을 벗어나 이리저리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역겨운 집의 환경과는 달리 벽에 붙어있는 그림들은 하나같이 입이 벌어질 지경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베아트리체는 그림의 아래에 새겨진 ‘다빈치’ 라는 싸인을 보며 남성의 이름이 다빈치임을 짐작했다.
“다빈치씨? 실례가 되지 않으면 지금 작업 중인 그림도 볼 수 있을까요? 색이 흐드러진 그림을 보니 절로 궁금해지네요.”
“칭찬은 감사하지만 아직 작업 중인 그림을 보여주기엔 부끄러운데요.”
“그러지 말고 조금만…….”
베아트리체는 어깨를 흔들며 교태를 부렸고, 그 바람에 후스공작은 베아트리체의 머리에 힘을 주어 주먹을 박았다. 처음 보는 삐진 얼굴에 베아트리체는 더 장난을 칠까 했지만 다빈치의 얼굴이 꽤나 곤란해 보였기에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다면 일단 오늘은 작업도 마무리 할 겸 그쪽 아가씨의 분위기를 봐야하니 하루정도 묵고 가심이?”
“그러고 싶네만 오늘 참석해야 할 연회가 있다네. 가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황제 녀석이 삐져서 골골 거리는 걸 보느니 참석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장난삼아 황제의 이름만 내밀어도 엄벌을 받을 지경인데 황제를 녀석이라 부르는 바람에 다빈치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위치에 있는 공작이 자신에게 부탁을 한다는 사실에 표현키 힘든 기쁨을 느끼며 주머니에 넣어둔 열쇠를 후스 공작에게 던져 주었다.
“그렇다면 남는 방이 있으니 그곳에 저 아가씨를 모시죠. 여기와는 다르게 냄새는 나지 않을 겁니다.”
손에 놓여 진 열쇠를 보며 후스공작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남는 날 다시 들러도 되겠나?”
“애석하게도 저는 인기인이라서 말입니다. 공작님의 청이라 전부 제쳐두고 맞이하긴 했습니다만 만일 한차례 더 다른 마술사와 마녀들을 무시한다면 곤란할 예정이겠죠. 정 바쁘시다면 저번과 같은 지팡이를 드리겠습니다만….”
저번과 같은 지팡이라는 소리에 후스공작은 어깨를 움찔 하더니 얼굴 가득 어둠을 드리웠다. 그 바람에 곁에 있던 베아트리체는 공작의 옷소매를 부여잡았다. 이내 진정된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겠느냐?”
베아트리체는 지금 당장에라도 후스공작의 등에 매달려 회의라는 곳에 따라갈 작정이었지만 공작이라는 지위의 의미와 진정으로 좋은 지팡이를 만들어 주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일부로 시무룩한 얼굴을 짓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럼 잘 부탁한다네. 혹여 베아트리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놈의 뼈를 깎아 지팡이를 만들 테니.”
그 말에 다빈치는 걱정 말라는 듯 웃어보였고, 후스공작은 한숨을 내쉬곤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서둘러 황궁으로 향했다.
***
“냄새가 안 난다는 소리는 누가 한 소리인지… 마음 같아선 입을 확 꿰매버리고 싶네요.”
물론 숨도 쉬기 힘들었던 거실과 비교한다면 훨씬 나았지만 문 틈새로 들어오는 역겨운 냄새는 불쾌했다.
바깥은 아직 어두울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공작이 자신이 없을 때는 마술을 사용하지 말라 말했고 또한 크게 할 것도 없었다. 결국 베아트리체는 침대에 몸을 뉘이고 이불을 끌어올려 코를 막은 뒤 눈을 감았다.
보기와는 달리 침대는 푹신했고 솜이 들어가 있어 따듯함이 풍겨왔다. 물론 공작의 집에 비한다면 값싼 잠자리지만 거리를 걸었던 피로와 마술로 인한 피로가 겹친 탓인지 베아트리체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 밖은 어두웠다. 아직 술집은 문을 닫지 않았는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고 베아트리체는 역시 너무 빠르게 잠자리에 들었다며 난색을 표했다. 이불을 걷자 사박거리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오히려 당황했지만 그보다 타들어 가는 목이 더욱 황급했다.
참고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지만 피로가 풀린 몸은 잠 들 생각을 전혀 잊어버린 듯 말끔한 정신을 유지했고 덕분에 더욱 갈증이 심했기에 결국 베아트리체는 문을 열고 거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역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책에서 보았던 물감을 만드는 방법에 계란과 기름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베아트리체는 예술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낡은 나무 계단은 끼익 거리는 소리를 마음껏 내뱉었고 그 소리를 듣고 다빈치가 자신을 찾아주길 바랬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 없이 거실에 도착한 베아트리체는 비어있는 식탁을 보고 더욱 큰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 나가 술집 문을 두드리면 물 한잔쯤은 얻을 수 있겠지만 길거리에는 술에 취한 남성들이 가득할 게 뻔 했다.
그렇다고 다빈치를 찾기엔 너무 실례가 되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 살며시 열려있는 문이 눈을 이끌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곳이 다빈치의 작업실 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곤란해 하는 다빈치의 표정이 떠올랐지만 이상 할 정도로 그 문 뒤의 풍경이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연신 머리를 흔들었지만 끝내 유혹을 이기긴 힘들었다.
베아트리체는 아까와는 다르게 발뒤꿈치를 세우고 조용히 열려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안을 바라보았지만 양초하나 켜지지 않은 탓에 오로지 어둠만이 자리했다. 다만 단 하나, 천이 덮여져 있는 이젤만큼은 너무나도 시선을 잡아끌었다.
마치 이끌리듯 손을 뻗었다. 천 자락을 붙잡자 작은 소리가 나서 퍼뜩 놀랐지만 이미 손을 뻗은 이상 물러서기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아쉬웠다. 베아트리체는 침을 삼켰다. 긴장감이 감돌았고 떨리는 손으로 천을 들어올렸다.
“이건…….”
순간 베아트리체는 탄성을 참을 수 없었다. 아름답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투박하게 찍어 내린 물감은 두께와 무게감을 가지며 멋스럽게 조화를 이루었고 아련히 풍기는 기름 냄새는 오히려 향기롭게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 자리한 얼굴은 아름답다고 표현하긴 힘들었다. 평범한 여성의 얼굴. 그럼에도 알 수 없는 매력이 뿜어지고 있었다.
베아트리체의 손이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을 향하여 손을 뻗었다. 보는 것만으로 황홀할 지경인 그림을 만진다면 더 할 나위 없는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상식은 지워진지 오래였고 결국 뻗어진 손은 얇은 캔버스에 맞닿았다.
그때 그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그림에 맞닿은 손은 어느새 캔버스에 집어삼켜 졌으며 서서히 신체가 그림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었다. 몽환적인 감각이 베아트리체의 몸을 휘감았다.
밀랍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그 바람에 정신을 차린 베아트리체는 당황했지만 이미 몸이 그림에 빨려들고 있었다. 힘을 주어 빼려 노력했지만 그림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들이 베아트리체를 끌어당기기 시작했고 결국 베아트리체는 그대로 그림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어둠이 자리했던 작업실에 한 줄기의 빛이 비추었다. 밀랍은 녹아내려 초를 받친 촛대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지는 타올라 미세한 연기를 뿜어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한 한 남자의 일그러진 웃음만이 공간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