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한 순간에 눈이 멎는 광경이 있다고들 하며 그 광경에 존경을 담아 절경이라는 표현을 한다. 그렇다면 필시 지금 이 광경이 바로 그 절경이다.
그저 빛을 따라 걸어왔을 뿐인데 들려오는 새소리는 아름다웠고 펼쳐진 초목은 마음을 휘어잡았다. 감겨진 나무 넝쿨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 나무를 따사로이 품고 있었고 나무는 기분이 좋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마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한 풍경을 아득히 능가하는 소소함의 멋에 베아트리체는 어느새 신이 나서 마음껏 숲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마술사의 아이야!”
“마술사의 아이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베아트리체는 다시 한 번 감탄을 내질렀다. 높이를 알 수 없도록 높이 솟아오른 나무의 둘레는 능히 건물 한 채의 넓이를 능가하고 있었다.
홀로 고고한 미를 품는 나무도 있는 반면 서로 휘감으며 끝없이 솟아나가는 사랑스러운 나무도 있었다. 아니, 평가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로 이곳은 이형의 미를 뿜어대고 있었다.
“아름답죠? 그런데 이걸 보고 후스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니까요. 정말!”
“아쉽네요. 두 팔을 벌리고 아이처럼 뛰노는 모습을 조금은 기대했는데 말이죠.”
정령은 베아트리체의 말에 상상이 그려졌는지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즐거이 웃고 있자 저 멀리서 녹색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방금 전 정령과 큰 크기차이는 없지만 조금 더 거대한 날개와 발을 휘감는 나무의 덩굴,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하는 작은 정령을 보며 대강 더 높은 계급의 정령임을 유추한 베아트리체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예를 표했다.
“그만 두시죠. 저희는 그저 전하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인사를 받을 이유는 없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조금 커진 정령들은 또 다시 따라오라는 듯 날개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점차 이런 귀여운 정령들을 다스리는 정령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진 베아트리체는 서둘러 그들의 뒤를 따랐다.
베아트리체가 그들의 뒤를 따르는 동안에도 수많은 정령들은 베아트리체를 보며 날개를 파닥이며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친위병 들이 그들을 막아섰고 정령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하나 둘 돌아가곤 했다.
“죄송합니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다보니 결례를 범하네요.”
친위병 들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청해왔다. 당연시 마음 같아선 양손을 휘저으며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보이는 성의를 무시하는 것 역시 좋지 않기에 대답을 아끼고 그저 미소를 지었다.
***
“제길, 그렇게 말했건만 또…….”
회의를 끝마치고 돌아온 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스의 한 손에는 왕궁에 특별히 부탁을 해둔 스콘이 들려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고르라면 항상 먹을 것을 골라왔고 입에 가루를 듬뿍 묻히며 혓바닥으로 날름 빵가루를 핥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왕실에 특제로 납품되는 우유와 밀가루, 거기에 최고급의 꿀을 섞었고 표면에 바른 올리브유는 제철이었던 시기에 짜내어 아직도 향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분명 이 스콘을 베어 물면 특유의 장난기 섞인 웃음을 섞어 쉴 새 없이 오물 댈 것이 분명했다.
후스공작은 이 말썽쟁이인 소녀에게 무슨 벌을 줄까 생각하며 스콘을 베어 물었다. 고급 밀가루에서 풍기는 달콤함이 입에 감돌았고 이는 곧바로 차를 떠올리게 했다. 차에 해박한 지식이 있지는 않지만 황제가 건네준 고급품을 끓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스의 주변에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그림자는 찻잔을 감싸기 시작했고 찻잎은 잘게 부수어지며 더욱 향기를 뿜어내었다. 이내 향긋한 차가 찻잔에 담겨졌으나, 후스공작은 들고 있던 찻잔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정…령?”
보통 사람의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지만 이형을 탐하는 존재인 마술사, 그리고 그 마술사의 최정상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는 후스공작은 희미하게 빛나는 정령의 가루를 느낄 수 있었다.
“설마…!”
후스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정령의 가루를 쫓았다. 정령은 평온과 고요를 상징하고 그 가루는 생명이 없는 사물조차도 취하게 만든다. 카페트에 새겨진 말끔한 흔적이 더욱 눈에 들어왔고 이내 시선은 문을 향하고 있었다.
후스의 가슴속에 아주 작은 의심이 피어났다. 그러나 그 의심은 결과도 맺지 못하고 곧바로 녹아내렸다. 베아트리체는 말괄량이이며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일지는 몰라도 총명한 아이이다. 그리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때 선반에 놓여진 양피지가 후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입에 물고 있던 스콘은 퍽퍽한 감촉밖엔 느껴지지 않았다. 코를 휘감던 홍차의 향기는 무엇보다도 불쾌한 악취로 변했다. 마음의 동요가 만들어낸 현상에 후스는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쥐어들었다.
분명하게 적혀진 사인, 그리고 완벽한 자신의 필체. 마치 그가 말하는 듯 적혀진 내용과 어렴풋이 풍기는 그의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나 자신은 이런 편지를 적은 기억이 없었다.
불안한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머릿속에 잿빛이 떠올랐다. 양손을 펼쳐 얼굴을 묻고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혼자 두지 말았어야 한다. 언제나 곁에서 지켜주었어야 한다. 잃지 않으려 소중히 품어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곁에 그녀는 존재치 않았다.
후스는 옷의 매무새를 다듬었다. 들려오는 비명과 몸을 통해 흐르는 불안감은 강철이 되어 그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정령의 세계가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
베아트리체는 어느새 이끌려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무로 만들었다기 보단 형성되었단 쪽이 더욱 맞는 표현이겠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쿠션이 없더라도 아늑했으며 너무 편한 나머지 하마터면 잠에 빠져들 지경이었다.
“그대가 바로 후스가 찾아낸 제자인가.”
기다리기도 잠시 어느새 앞의 의자에 나뭇잎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박거리는 소리는 먼저 베아트리체의 귀를 멀게 했으며 내뿜어진 빛은 눈을 멀게 만들었다. 그 정도의 아름다움, 절로 탄식이 내뱉어지는 미형의 얼굴.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그대로 다리가 풀려버릴 것만 같았다. 눈동자는 투명하게 궤적을 그리고 있었고 입술은 매혹적으로 고혹적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차마 숨을 쉴 수 없었다. 유려한 턱선이 움직여 만일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인다면 과연 자신이 그것을 거부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서 오거라 마술사의 아이.”
그 목소리는 중후했다. 또한 미려했다. 지극히 남성스러웠으며 지극히 여성스러웠다. 황제라면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었을 테고, 여왕이라면 어깨를 흔들어 애정을 표할 것이다. 모든 감각을 유린하듯 울리는 목소리에 베아트리체는 정신을 붙잡는데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호오~ 역시 후스가 선택한 인간은 다르구나.”
베아트리체는 스스로의 손으로 허벅지를 잡아 비틀었다. 전신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방금 물을 적셨다고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서는 열기가 들끓었다.
남자라면 후스의 핑계를 대며 마음을 외면했을 것이다, 여자라면 여자라는 핑계를 대며 외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후훗. 떨고 있는 모습이 귀엽구나. 잡아먹고 싶을 정도다.”
“베… 베아트리체 이…이 인사를 드립니다.”
한마디의 인사를 건네는데 전신의 기운이 빨려나간 느낌이었다. 마음에선 감정이 들끓었다. 사랑하지 않고선 심장이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눈동자는 빛을 잃었고 어느새 그를 향하여 몸이 기울고 있었다.
“얼굴을 들어 눈을 마주치지 않겠느냐? 내 너의 귀여운 얼굴을 부디 기억에 새겨 넣고 싶구나.”
베아트리체는 양 손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내 모든 힘을 주어 조금씩 고개를 끌어올렸다. 가지고 싶었다, 품에 안고 밤새도록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젖어드는 미혹은 점차 베아트리체의 이성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이쯤 할까.”
정령왕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머리에 쓰여진 월계관에 달린 나뭇잎을 단숨에 성장시켜 얼굴을 가려보였다. 베아트리체는 곧바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정신을 차리자 테이블과 의자는 땀에 젖어 미끈거릴 지경이었다.
“칭찬하마. 너의 스승인 후스처럼 과연 강한 의지를 가졌구나.”
“결례를 보였습니다.”
“사과하지 말거라. 무릇 생명이라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고집은 스승을 꼭 닮았구나. 과연 후스가 보는 눈은 살아있다는 걸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령왕은 익살스런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어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나뭇잎에 가려진 표정은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야.”
정령왕은 어느새 다시 한차례 나뭇잎으로 변화하여 베아트리체의 눈앞에 자리했다. 얼굴을 처다 보면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베아트리체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의식을 붙잡았다. 정령왕은 그런 베아트리체의 볼을 쓰다듬곤 베아트리체의 손을 맞잡았다.
“썩어버린 손이 비명을 내지르는데 어찌 감히 꿈을 바라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