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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
작가 : 크라피아
작품등록일 : 2017.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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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정령의 세계 <完>
작성일 : 17-07-23     조회 : 357     추천 : 0     분량 : 5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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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치의 의심조차 존재하지 않는 눈동자, 깊고 깊은 의미와 그 의미에 담긴 소녀의 욕망을 읽어낸 정령왕은 소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냐? 넌 대체품이다. 그저 곁에 두고 쓰다듬어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한 장식품이지. 그런 삶이 좋다 말하느냐?”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전 그의 것입니다. 평생 씻어낼 수 없는 죄가 저의 목을 조르고 숨이 막히는 공포와 죄책감에 신음하더라도 그저 그의 곁에 안길 수 있다면 수억의 별도, 아득히 펼쳐진 황금도 필요치 않습니다.”

 베아트리체의 강렬한 눈동자에 정령왕은 절로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녹아버릴 듯 썩어가던 초목들은 어느새 형태를 되찾았으며 그녀의 발이 닿았던 곳은 어느새 꽃이 피어올라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죽어간 사람들은? 네 손으로 목을 조르고 땅에 뿌려진 자들은? 그들의 목숨을 그저 무시한 채 살아갈 생각인가? 지금도 신음하는 그들의 목을 다시금 쥐어 놓아주지 않겠다 말하는 게냐?”

 “그래서 살아가는 겁니다. 속죄하는 길은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 평생에 걸쳐도 찾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찾아낼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차피 질릴 정도로 남겨진 시간동안 찾아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언젠가 그들의 손이 제 목을 졸라온다면 그때야 말로 목을 내어 놓겠습니다.”

 베아트리체의 말에 오세르는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 베아트리체의 말을 재촉시켰다. 얼굴에는 흥미가 감돌았으며 소소한 흥분이 묻어나왔다.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래서 지금 돌려낼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그저 이 아름다운 공간에 박혀 양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린다 한들 그들은 만족하지 못하겠죠. 저의 목을 잘라 바쳐도 미소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증오를 받아내고 뻔뻔히 살아가겠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마녀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이런 저를 받아들여준 후스에게 은혜를 갚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

 “호오. 후스가 죄를 씻어주기라도 하는 건가?”

 다시 한차례 나뭇잎이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존재했던 공간은 아득한 나뭇잎에 뒤덮여 초목을 뿜어내고 베아트리체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생기가 넘치는 나뭇잎은 그의 손과 목을 쓰다듬어 죄악을 내뱉지만 그녀의 입은 가려내지 못한다.

 “그럴 리 없겠죠. 하지만 그래도 저는 그의 것입니다. 그가 저를 가지고 소중히 대하는 한 저는 그의 것입니다. 그가 목을 내밀라고 하면 기꺼이 내밀어 목숨조차 바칠 것입니다. 제 죄악을 가져가겠다는데 부정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끝끝내 오세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찾았군 후스. 얼굴과 성격까지 전부 빼닮은 점은 내 뭐라 하지 않겠네. 어리석은 것은 자네이지 이 소녀가 아니니 말일세.”

 정령왕은 다시 한차례 베아트리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열망을 품은 눈동자는 매혹적으로 아름다웠으며, 이미 자신의 매혹을 참아낸 소녀를 더 이상 몰아붙일 자신은 존재치 않았다.

 “이 상황에 저에게 할 사과는 존재치 않으신 겁니까!”

 후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향하여 달려갔다. 전신에서 흐르는 땀은 이미 옷을 적셨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애처롭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베아트리체는 후스를 향하여 웃어 보이며 눈을 마주했다.

 “후스 그녀를 이곳에 보낸 것은 자네라네. 여기에 적혀있는 마술사의 각인은 헛것이 아닐텐데.”

 마술사의 각인. 마술사의 증명이라도 불리는 그것은 타인이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령왕은 보라는 듯 후스의 각인을 보여주었다. 붉은 색으로 새겨진 각인은 두말 할 것 없는 후스의 것. 그러나 후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것이 아닙니다.”

 “내가 위조된 각인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라 말하는 겐…”

 그러나 말하는 동시에 오세르는 진실을 깨달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설마, 각인까지 넘겨줬던 것이냐!”

 “…제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명예와 지식과 감정을 전부 담은 그녀에게 내주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멍청한 놈…”

 정령왕은 그리 말하며 새겨진 각인을 불태웠고 동시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오세르의 피부를 더렵혔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흑마술은 강렬한 악취를 내뿜었고 정령왕은 더럽다는 듯 양 손을 털어내고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 실수는 인정하지. 하지만 차마 너에게 사과할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멍청하고 또 멍청한 꼬마야.”

 “… 최소한 제가 아닌 베아트리체에겐 사과 해주시죠. 전 멍청하지만 그녀는 아닙니다.”

 정령왕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이 남자를 이토록 멍청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지성이 빛나던 눈동자를 타락시키고 판단을 흐리게 한 모든 것, 그리고 그녀에게 귀여움을 느꼇던 과거의 자신까지 한심했기에.

 “딱 한번일세. 그녀에게 빚을 졌다고 시인하지. 하지만 후스… 돌릴 수 없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자네가 사랑하던 태양이 시샘하는 아이는 이제 누구보다도 추악하고 정신나간 마녀일세.”

 후스는 정령왕이 빚을 가진다는 의미를 잘 알고 있기에 결국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세르의 앞에서 자신은 어디까지나 죄인이며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장소에 존재하는 후스는 누구에게도 가슴을 펼 수 없는 한심한 사내였다.

 그런 후스를 보며 정령왕은 손을 뻗어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의 잘못이 만들어낸 결과는 최악일지 모르나 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자주 찾아오게나. 이곳은 무료해. 더럽게 지루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모르겠으니 말일세.”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자네를 보고 싶은 게 아니네. 곁에 붙어있는 그 귀여운 아이의 미소가 그리운 걸세.”

 그 말과 함께 정령왕은 서둘러 초목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어둠 썩어가던 나무들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으나 그럴수록 정령왕의 신체는 조금씩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금방 회복될 것은 분명하나 한때 자신에게 길을 주었고 누구보다 친밀했으며 함께 대화를 나눌 때마다 즐거웠던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리는 모습은 후스에게도 절망을 가져왔다.

 그러나 손에 안겨든 아이를 위하여 이곳에 더 이상 머무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따듯한 솜이불에 몸을 뉘이고 이젠 식었겠지만 그래도 아직 달콤할 스콘을 입에 물려주고 싶었기에 후스는 정령왕을 향해 고개를 숙이곤 곧바로 정령의 세계를 벗어났다.

 

 ***

 

 베아트리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직 채 성장하지 못한 마술의 그릇은 차고 넘치는 강대한 존재를 만나 깨지기 직전이었으며 지금도 전신이 불타는 듯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베아트리체의 손을 붙잡자 맺힌 땀이 느껴졌다. 죄책감과 함께 감사함이 피어올랐다. 어느새 눈물샘이 고장난 것인지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가녀린 소녀는 지금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령왕의 유혹에 먹히지 않고 자신을 택해준 베아트리체.

 후스는 문득 과거의 자신과 과거의 그녀가 떠올랐다. 총명했던, 그리고 귀여웠던 그녀. 언제까지고 곁에 두어 이따끔 귀를 깨물면 그녀가 내뱉을 귀여운 비명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후스. 작은 청을 말해도 될까요?”

  후스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숙인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원한다면 교황청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뽑아올 것이며 황제의 콧수염을 잘라 내바칠 수 있었다.

 “잠시만 방을 비워주시겠어요?”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들려왔다. 수많은 보화와 명예는 전혀 필요치 않은 간단한 부탁. 하지만 과연 그 청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결국 후스의 눈에 맺힌 눈물은 탐스러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라리 모진 말로 자신을 채찍질 한다면 좋으련만, 눈에서 사라져 달라는 부탁은 심장을 도려내어 아픔을 만들어내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부족하여…….”

 “그게 아니에요…….”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후스를 슬며시 밀어내곤 양 손을 모아 자신의 신체를 감쌌다. 그럼에도 그 눈동자는 아직도 후스를 바라보며 빛을 띄우고 있다.

 “땀 냄새가 너무 부끄러워요…….”

 그렇게 말하며 베아트리체는 얼굴을 붉혀보였다. 후스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채 굳어버렸으나 이내 의미를 깨닫고 서둘러 방을 뛰쳐나갔다. 얼굴에 드리워진 붉은 기운은 분명 체온 때문은 아니었고, 그 홍조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후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베아트리체는 샤워를 끝마쳤다. 머리는 촉촉하게 젖어있었지만 방금 전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와는 다르게 단정했다.

 마술을 사용한다면 머리를 말릴 수는 있지만 지금 마술을 행한다면 저택을 송두리째 불태울 가능성이 꽤나 높았기에 오랜만에 수건을 걸친 채 거실에서 홍차의 향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꽤나 설레는 광경 아닌가요 후스? 시골마을에서 비에 젖은 처녀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그 때문에 눈이 맞아 결혼하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거든요.”

 후스는 당황하여 헛기침을 내뱉었다. 정령왕의 기운을 받은 탓인지 베아의 피부는 오늘따라 윤기가 흘렀고 불의 기운을 받아 점차 붉어진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희미한 물기는 꽤나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매혹적인 모습이라도 자신의 아이에게 욕망을 품을 후스는 아니었기에 내뱉은 기침의 의미는 그저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다는 마음이 앞선 결과였다.

 만일 베아트리체에게 청혼을 하는 청년이 있다면 흠씬 두들겨 패고 포기하라 말하고 싶은 감정. 한마디로 부모의 감정이었다.

 베아트리체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조금 장난을 친 것뿐이었고 이내 미소를 띄우곤 후스에게 머리카락을 맡겼다. 후스는 빗질 하는 방법은 잘 알지 못하기에 어색한 손길로 베아트리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고 베아트리체는 눈을 감고 후스의 말을 기다렸다.

 “예전에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쓸어주던 때가 있었다. 머리카락은 너와 꼭 닮은 붉은색, 호박을 빼다 박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말이다.”

 베아트리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감고 후스의 손길에 머리를 내밀어 온기를 느꼈다.

 “미리 말하지 않아 미안하구나. 하지만 너는 그녀와 너무 닳았고 스스로도 어쩌면 네가 그녀를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지. 그 정도는 이해해주면 좋겠구나.”

 그래 꼭 닮았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나 의심이 들 정도로 베아트리체는 그녀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쾌활한 성격 그리고 가끔 치는 장난은 귀여움이 물씬 배어 있다.

 “그녀의 이름은…….”

 “후스, 조금은 샘이 나서 그런데 부디 그 이야기는 그만두지 않으실래요? 여기서 그 이야기를 더 듣는다면 울 것만 같은데 말이죠.”

 결국 후스는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살며시 피가 배어 나왔고 고통이 감돌았다. 너무도 같았다. 자신을 배려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미칠 듯이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파요 후스.”

 “아… 미안하구나.”

 어느새 손에 힘이 들어간 덕분에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쓰다듬던 빗에 힘이 실려 버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멋대로 쓸어내렸고 베아트리체의 낮은 신음에 후스는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술사에게 제자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란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손을 붙잡고 눈으로 쫓아 안도하지. 그렇기에 조금 과할 정도로 보호하려 하는 것이란다. 황제 놈이 불러내어 회의에 참여하는 동안에도 불안함에 미칠 정도로 말이다.”

 이미 베아트리체의 머리는 손질이 끝났지만 후스는 말없이 빗질을 계속했다. 그저 손에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이 순간은 너무도 따듯했다.

 조명은 빛나고 있었고 머리를 쓸어내리는 사락거리는 소리만이 방안을 휘감았다. 다소 지루한 광경에도 둘은 이 순간에 몸을 맡기고 그윽히 피어오르는 차의 향기를 만끽하며 침묵의 아름다움에 젖어들었다. 언젠가 베아트리체에게 털어놓을 그녀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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