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드레 잠시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바쁜 와중에 꼭 지금 해야겠습니까!!?”
질드레는 검을 휘둘렀다. 마침 달려들던 병사 한명이 양단 되어 피가 흩뿌려졌다. 질드레는 칼을 허공에 휘둘러 피를 털어내었고 이 공포스런 광경에 잉글랜드의 군대는 얼어붙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고작 반년 만에 일으킨 군대치고는 꽤나 숫자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샤를의 악독함에 허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천의 병사가 습격했음에도 샤를은 어떠한 군대도 파견하지 않았다. 단지 군의 보고가 없었다. 라는 말로 일축했으며 이는 잔으로 하여금 다시 검을 잡게 만들었다.
고작 오백의 병사에 불과했으나 잔의 이름아래 싸운다는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으며 반대로 적군은 공성의 불리함, 사기의 저하 등을 이유로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이미 승리는 반 이상 확정되었고 질드레도 잠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부디 가정을 소중히 하세요. 떠나간 자를 쫓지 말고 남아있는 자를 위해 당신의 힘을 사용하시길 간청합니다.”
“제가 당신한테 고백이라도 했습니까? 집에 돌아가면 아리따운 부인이 저를 맞아 주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그 부인 납치해서 얻은거 아닌가요?”
질드레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야 물론 조금 성격이 괴팍했던 어렸을 당시 외조부의 꼬드김에 넘어가 마침 보쌈해서 사랑을 고백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긴 했었다. 지금도 가끔 싸울때면 그 당시의 일 때문에 부인에게 벌벌 기어 살고 있었다.
“후훗. 평생에 걸쳐 속죄하세요. 귀족만 아니었으면 분명 잘려나갔을 겁니다.”
“진짜 무슨 일 있습니까?”
질드레는 말의 경중을 떠나 느껴지는 싸늘한 감각에 그녀에게 되물었다. 분명 전신을 휘감은 감각은 자신의 아비가 멧돼지에게 밝혀 중태에 빠진 그날 모든 것을 털어낸 그날과 같은 분위기를 띄우고 잇었다.
“걱정마세요 질드레. 당신은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잘못은 없습니다. 저는 저물어가는 별이며 당신이 저와 함께 저물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잔은 말을 몰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언덕 너머로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 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흙먼지에 병사들은 굳어 버려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질드레기에. 그녀의 곁에 함께하며 성장을 바라보고 언제보다도 빛을 흩뿌렸던 그녀를 알기에 그 만은 내달렸다. 그의 애마는 질드레의 감정에 휩쓸려 더욱 가속을 시작했다.
수천의 병사일 것이다. 고작 오백의 병사로 상대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고삐를 잡은 손은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와 그녀의 손짓과 용맹하던 목소리와 저물지 않던 열망이 석양과 함께 저물기 시작한다. 너무도 뻔한 의도와 전장에 달려나가는 지휘관의 의미, 더하여 지금 가장 황제에게 두려운 존재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보내 줄 수 없었다.
마지막 인사라 인정 할 수 없었다. 그녀로 인해 자신은 명예를 얻었으며 그녀로 인하여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던 증오와 원망을 털어내었다. 곁에 두어 더더욱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한 사람의 소녀가 아닌 전우로써 잔을 나누고 싶었다.
잔은 고개를 돌려 질드레를 바라보았다. 오백의 병사중 오직 두개의 말 만이 전장을 가로지르고 있었으며 둘중 하나의 목소리만이 슬픔과 눈물을 간직한 채 감정을 토해내듯 미친 듯이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잔은 잠시 자신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이 반지를 받던 날 포기했던 기적과 사랑을 떠올렸다. 고개를 숙여 사죄를 표했다. 지금의 자신을 우직하게 따라와 준 한명의 전우를 위하여 단 한번.
눈을 감고 기적을 행했다. 퍼져 나온 빛이 질드레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감겨졌으며 그의 말은 무언가에 홀리듯 달려온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질드레의 말을 따라 모든 병사들은 성을 향하여 말의 고삐를 돌렸다.
***
“어지간히 미움 받았나 보군. 설마 성으로 향하는 다리마저 끊어버릴 줄이야…….
잉글랜드의 지휘관은 묶어두었던 잔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가슴 한곳에서 피어오르는 존경심은 그로 하여금 짧은 대화를 원했다.
“잔 다르크. 그 이름은 우리에게 공포였네.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그들을 이끄는 존재는 마치 승리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는 듯 수를 읽어내고 패주를 무시했지. 그래서 더더욱 자네와 이렇게 허심탄회 하게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네.”
잔은 묶여있던 손을 여러 차례 움직였다. 자유를 찾은 손은 지금 당장이라도 검으로 눈 앞의 사내의 목을 잘라 낼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으나 잔은 도리어 답답하던 갑옷을 벗어던졌다.
“귀족의 뒤를 따라온 시녀가 한둘 있을 겁니다. 부디 그들의 옷을 하나만 내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랜 여정으로 축축해진 옷을 입는 것은 이제 질색입니다.”
“…훗.”
지휘관은 곧바로 명령을 행했고 잔은 스스럼없이 사내들 속에서 환복 했다. 이미 그녀에게 무력은 존재치 않았고 그저 순수해 보이는 한명의 소녀만이 끝을 알 수 없는 총명을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자네를 포로로 잡아 빌어먹을 샤를과 협상을 할 예정이야. 하지만 분명 대답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자네를 어떻게 할 것이라 생각하나?”
“차마 소녀의 입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저로 인하여 가족을 잃은 자들이 품은 분노가 지금도 목을 죄여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휘관은 지금 당장에라도 이 소녀에게 손을 내밀어 자신의 편으로 들이고 싶었다. 그녀의 무력이라면 위기에 처한 고국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은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차마 손을 내밀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향수는 강했고 그것을 베어낼 정도로 사내는 잔인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네.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지금쯤 여기서 탈출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 한 사람의 소녀가 이토록 정신 나간 진출과 승리를 거머쥔 것인가?”
백년가량 지속된 전쟁을 고작 일 년 만에 종식으로 끌어낸 것은 이 소녀이다. 그렇기에 성녀이며 마녀라는 이명을 가진 자이기도 했다.
“단지 흐름을 읽었을 뿐입니다. 바람을 읽고 구름을 읽어내며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소망을 바라는 손을 붙잡아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 정신 나간 연금술사들도 하지 못한다는 흐름을 읽어낸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날 비가 올지, 태양이 비출지, 바람이 강할지 그리고 병사들이 숙면을 취했을지 전부 알 수 없다네. 지금 자네는 그것을 읽어냈다 말하고 있는 거라네.”
안타깝게도 그것이 잔에게는 가능했다. 이미 마술사의 재능은 한 두 개의 세기쯤은 가벼이 뛰어넘고 있었다.
그들은 바람을 읽어낼 수 있었고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이나 읽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들이 진보시킨 지식과 경험은 전부 제자에게 쏟아 부어지며 점차 세대를 거쳐 하나의 학문으로써 잔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좋은 스승님이 있었습니다.”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것 같군.”
사내는 잔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녀의 말에 담긴 진심을 읽어내었고 자신이 닿지 못한 영역의 그녀에게 남길 것은 오로지 존경뿐이었기에.
잔의 처지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포로로 잡혀간 첫날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감옥에 던져 넣어졌다. 돌에 맞은 상처는 찢어져 곯기 시작했으나 그 누구도 그녀에게 치료를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러운 감옥 에는 쥐의 시체와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포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잔의 상처에서 베어 나온 핏자국이 새겨지기 시작했으며 그녀를 죽이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대처만 행해졌다.
잔이 포로로 잡혔다는 급보는 프랑스에 전해졌다. 시민들은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고 그를 싫어하던 몇몇 귀족 역시 통탄함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샤를은 그녀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번번이 들고 오는 교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마녀라 매도하여 시민들을 현혹시켰다.
잔의 가치는 더더욱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의 이름은 잊혀 졌으며 전쟁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잉글랜드는 어떻게든 그녀를 처분해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싼 값에 잔을 팔기로 하였고 프랑스와 적대하는 귀족이 그녀를 사들였다.
연이은 폭행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잔의 몰골은 피폐했다. 제대로 먹지 못한 신체는 말라 비틀어졌으며 몸을 뒤덮기 시작한 알 수 없는 검은 반점은 서서히 그녀에게 죽음의 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꼴불견이군.”
고통에 신음하는 잔에게 검은 사내가 나타났다. 칠흑을 휘감은 채 교양을 뿜어내는 그 모습에 잔은 그 남성의 정체가 마술사임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약해져버린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했고 이에 마술사는 품위 따위는 내 버린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잔과 시선을 마주했다.
“소개가 먼저겠지. 황혼의 마술사 후스라네.”
“아… 당신이 후스군요.”
스승인 포리엔트가 그렇게나 부르짖었던 후스가 눈앞에 있었다. 정신은 몽롱하지만 찬찬히 그의 용모를 살펴보았다. 과연 포리엔트가 호언장담한 대로 품격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시선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여자로써 탄성이 흘러나왔고 수려한 얼굴을 보았을 땐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또한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몸을 휘감은 그림자가 몸을 쓰다듬었고 인지하기도 전에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상처도 치료해주고 싶다만, 그랬다간 또 마녀라 몰릴 테니 이정도가 좋겠지.”
후스는 살짝 웃으며 어느새 주변의 모든 경비병들을 잠재워 버렸다. 마술사가 도달해야 할 이상이 눈앞에 있다는 느낌에 다시 한차례 고개가 숙여졌다. 후스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왔는지는 알겠느냐?”
“마술을 사용한 마술사의 단죄… 정도려나요?”
질드레를 돌려보낼 때 아주 잠시지만 마술을 사용했다. 분명 질드레는 자신을 향해 달려왔을 것이고 지휘관을 잡은 이상 그들에게 부관의 필요성은 적었다. 목이 잘려질 것이고 그런 안타까운 결말은 원치 않았기에 결국 욕심을 부려 마술을 행했다.
이미 유렵 전역에 마술사는 이 전장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규악이 결렸다고 들었다. 그들끼리의 규약을 어긴다면 분명 그 정도의 단죄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조용히 목을 내밀었다.
후스는 낮은 웃음과 함께 그림자의 창을 뿜어 올렸다. 단숨에 모든 빛이 사라졌으며 날카로운 감각이 잔의 머리를 간질였다.
좋은 결말은 나오지 않았더라도 더 이상 바랄 것은 없기에. 패배자의 변명이라 하기에 자신은 어디까지나 욕심을 부렸던 아이에 불과했다.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부모님의 얼굴과 질드레의 고함과 휘날리던 조국의 깃발.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소중히 지킬 것은 지켜내었다. 잠시 동안 슬프더라도 살아남아 언젠가 미소를 띠울 그들을 떠올렸다.
‘자네트.’
순간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쏟아져나간 빛은 그림자를 집어 삼켰고 힘을 겨루듯 서로 맞부딪힌다.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더 이상 살 의미는 없다 생각했지만 절로 손이 움직였고 죽기 싫다는 열망만이 남아 그림자를 떨쳐내고 있었다. 그 방대한 빛을 보며 후스역시 입을 벌려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역시 대단하군.”
물론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창을 순수한 열망의 힘으로 밀어낼 수 있는 자는 마술사 중에도 극소수.
다들 밀어내지 못하고 그림자에 잠식되어 버렸으며 이내 켁켁거리며 봐달라는 듯 손을 흔들어대기 일수이건만 고작 17살의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 그림자를 밀어내고 빛을 띄우고 있었다.
“삶에 미련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없…을 겁니다.”
“정말인가?”
후스는 다시 한차례 그림자의 창을 피어 올렸다. 방금 전과는 느껴지는 위용이 틀렸으며 과연 최고의 마술사라 불리는 이명이 아깝지 않도록 모든 공기를 침식시켰고 휘날리던 먼지조차 그에게 경의를 표하듯 가라앉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도저히 받아 낼 수 없었다. 분명 달려들어 자신의 몸을 찢어 버리고 그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처참하게 유린시킬 것은 분명했다. 어느새 고개가 흔들어지고 있었다.
앞의 존재에게 존경의 의미가 아닌 용서를 구하고 있었으며 숙인 고개에선 작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쓸데없는 고집은 그만 접게나. 왜 제자란 것들은 하나같이 전부 원하는 대로 되질 않는지 모르겠어.”
단숨에 쏟아지던 그림자는 후스의 손에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후스가 손을 움켜쥐자 방금전의 위용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그곳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포리엔트가 나에게 고개를 숙이더군. 마술사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토해내듯 울부짖어 너를 구해 달라 사정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야. 너 하나를 구하는 건 은혜가 되지도 않을 것이고 극히 간단한 일이지.”
현재 로마는 패권을 지니고 있다. 황제가 등용한 마술사들이 조금만 힘을 사용한다면 하나의 역사를 멸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그런 마술사의 정점에 서있는 후스이기에 이 감옥의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것, 고통에 신음하는 잔을 빼돌리는 모든 행위는 그가 행할 수 있는 기적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제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잔의 물음에 후스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전 마술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 자신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불타고 있는 저의 조국은 신음을 내뱉고 있었고 죽어가는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검을 들었고 조국을 지켜내는 길을 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국은 빛을 찾게 되었다. 아직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진 않았더라도 그들의 후세가 조국의 이름을 부르짖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너의 목적은 끝이 났을 텐데.”
사실이었다. 샤를이 이토록 단호하게 잔을 내친 이유는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길어도 이번 샤를의 대가 바뀌기 전에는 분명 잉글랜드를 몰아낼 것이다.
목적은 이루었다. 그날 랭스를 탈환하는 순간부터 결말은 어쩌면 확정지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잔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마술사의 길을 걷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기에 아주 작은 보답을 원했습니다. 아이들의 손을 붙잡길 바랬고 부모님의 자랑스러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런 결말은 원하지 않았어요. 배신당해 누구보다 더한 마녀로 역사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건 너무하지 않은가?”
조용히 듣고 있던 후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바보 같은 그녀의 얼굴을 밟아 비탄을 내지르게 하고 싶었다.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 것인가. 보답을 바란다는 그녀가 어째서 이토록 간단한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단 말인가. 지식과 현명을 지닌 그녀라면 알 수 있을 텐데도 어째서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방금 전의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저 역시 사람입니다. 마술사를 넘어 한명의 사람입니다! 아주 작은 보답을 바라는 것이 어찌하여 잘못이라 말하시는……!”
“네 스승도 그 보답을 바랬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결국 후스는 참아내지 못했다. 주먹으로 땅을 내리찍었고 손에서 흘러내린 피가 감옥을 적시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녀석아! 네 스승도 그 목적이 있었단 말이다! 비를 내려 배를 곯는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을 지어주게 한다는 목적이 있었단 말이다!”
포리엔트는 비를 내리기를 원했다. 거듭된 흉작으로 그의 부모는 배를 곯았고 끝끝내 사람이길 포기하여 포리엔트를 한 줌의 고기로 생각했다.
날을 번뜩이며 영문을 알지 못하는 아이에게 식욕을 품었고 무서움에 떠는 아이를 달콤한 말로 유혹시켰다. 아직 어린 포리엔트는 내달렸다. 사람이기에 남아있는 생존에 대한 열망이 마술사와의 인연을 만들었고 그의 부모는 마술의 기적에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나 원망은 하지 않았다. 필사적이었던 그들의 눈과 흘러나오던 눈물을 기억하기에 그저 비를 갈구했다. 그렇기에 마술사가 되었다. 노력하고 노력하여 아주 적은 영역이지만 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널 선택한 거다! 그날 겪었던 비참함과 고통을 떨쳐내고 너 하나를 위해 모든 소망을 버렸단 말이다! 마술사의 제자가 그저 자기 위로에 빠진 병신들의 자애로 보였단 말이냐! 그 눈에 담긴 소망과 희망을 읽어내지 못했단 말이냐!”
후스의 격노가 잔의 심장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포리엔트의 미소와 다정한 말투와 안아주던 온기가 느껴져 도저히 눈물을 참아낼 수 없었다. 몸을 떨고 죄책감에 신음하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너희들은 알지 못한단 말이다… 우리가 어떤 것들을 버리고 너희를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의 의미와 비통함을 알지 못한단 말이다! 어쨰서 항상 그렇게 너희 생각밖엔 하지 못하는 것이냐…….”
후스는 울부짖었다. 귀엽고 눈동자를 빛내던 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손짓과 소소하던 웃음이 아직도 그를 붙잡아 놓아주지 않았다. 토해내듯 잊었으며 잊기 위해 또 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 택했음에도 버려내지 못한 심장과 감정과 추억이 남았다.
포리엔트가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도저히 고개를 돌려 내칠 수 없었다. 3년 전 자신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사정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애통하고 비참하여 차마 손을 붙잡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 역시 그러했기에. 떠나간 제자를 잊지 못하고 아직도 떠올리며 버려내지 못했기에…
“전 그저 목적을 쫓아…….”
“그랬다면 버리진 말았어야지. 적어도 버리진 말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잔의 머릿속에 달빛이 빛나던 날 이별을 말했던 자신의 모습과 이에 절망하는 포리엔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말에는 원망이 담겼고 슬픔이 담겼으며 차오른 눈물이 자신을 적셨음에도 단호하게 또한 냉철하게 그를 밀어냈다.
그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으며 말조차 남기지 않았다. 버려야 할 것이라며 자신을 채찍질 하여 그를 잊었다. 잊으려 노력했다. 손에서 빛나는 반지를 움켜쥐고 있음에도 애써 잊었다 생각했다.
잊을 수 있겠는가! 그의 미소와 그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어찌 잊는단 말인가. 손을 뻗어 움켜쥐고 싶었고 그에게 안겨들어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보다 냉혹하게 그를 밀어낸 것은 자신이기에. 알아주지 못하고 아이마냥 어리광을 피운 자신이기에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모두 네가 정한 선택이다.”
후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이 흔들려 그녀를 구해 낸다면 자신과 같이 미쳐버릴 포리엔트의 모습이 떠오르기에 누구보다 냉혹하게 등을 돌렸다. 그 선택이야 말로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