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궁! 밖이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어서, 어서 나가보게. 어서!”
횃불의 그림자가 창밖을 어지럽게 훑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우상에게서 연향 대군이 한양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에 휩싸여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전이었다. 언제든지 세자의 보위를 노리고 궐 안을 헤집어 놓을 수 있는 자였다. 세 명의 대군 중에 가장 두려운 자가 아니던가! 공포심에 충혈 된 눈이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정상궁의 소리가 들렸다.
“마……, 마!”
“어서, 어서 들라!”
문을 열고 천천히 발을 들여 놓는 정상궁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정상궁, 어찌 된 일이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마마……, 바……, 밖에……. 연향 대……군이…….”
말을 맺지 못한 정상궁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정상궁! 어찌 된 것이냐,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들어와 불을 켜라! 누구 없느냐!”
밖을 지키고 있어야 할 내관과 나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상궁의 가슴팍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중전의 비단 침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저……, 정상궁……! 이게 어찌…….”
쓰러진 정상궁을 더듬던 중전의 두 손에 뭔가 미끌한 것이 느껴졌다.
‘피……!’
중전은 온 몸이 떨렸다.
‘연향이…… 기어이 대궐에…….’
피 묻은 손을 허공에 들고 벌벌 떨던 중전은 불현 듯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아, 아니 된다. 세, 세……자. 세자!! 세자!!”
한 무리의 횃불이 지나간 뒤 어두워진 교태전에서 중전의 비명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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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앞서 간 연향 대군이 오히려 길을 열어준 셈인데요.”
검은 복면 아래 주위를 살피며 좌장군이 입을 열었다. 발아래 연향의 군사들이 베고 지나간 금군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쉿!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한성부가 있다. 곧 군사들이 몰려올 것이다.”
주군의 목소리엔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여긴 조선의 심장부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
“그렇습니다. 형님! 자칫 잘못하단 연향에게 신단수를 뺏기고 퇴로가 막힐 수도 있습니다. 빨리 그 여인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충식의 말이 맞다. 계속 연향의 뒤를 쫓을 순 없다. 군사를 둘로 나눌 것이다. 충식이 1부대를 데리고 서쪽 전각을 돌아 향화정으로 간다. 일각 후에 향화정에 다다라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형님.”
충식이 군사들을 데리고 어둠속으로 사라지자 뒤에선 정길을 향해 주군이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당장 장이에게 가 궁수들을 데리고 궐 동쪽 벽에서 기다려라.”
“예?”
“도망가는 곰을 잡을 준비를 해야지.”
“곰이라면? 연향을?”
놀란 정길이 주군을 향해 물었다.
“장이의 신점이 있었다. 어서 움직이거라. 궐을 나가면 장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일각도 늦어선 안 된다!”
“예, 형님!”
정길의 빠른 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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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소상궁의 손을 부여잡고 떨고 있었다. 떨고 있기는 소상궁도 마찬가지였다. 향화정 앞마당엔 이제 붉은 자와 검은 복면을 한 자, 그리고 내금위 군사들이 뒤 엉켜있었다. 연못엔 피가 튀었고, 핏물에 비친 달이 붉었다.
“소……, 소상궁……. 어, 어떻게…….”
수영은 이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도망가려해도 다리가 떨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간이 크다면 크다고 자부했던 수영이었다. 공포 영화쯤은 웃으면서 보고, 피가 낭자한 영화도 거리낌 없이 티켓을 끊던 그녀였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또 칼로 마구 베어도 죽지 않고 머리가 둘로 갈라져 나오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속이 메스껍고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미, 미치겠다……. 도망가야 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어……. 제발, 꿈이어라. 제발!’
눈을 질끈 감고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수영의 앞에 좌장군의 뒷모습이 보였다. 향화정에서 일이 벌어진 후 좌장군은 천신을 향해 사정없이 뚫고 들어오는 적의 칼들을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다. 그의 붉은 관복이 적의 피로 젖어 갔다.
“붉은 자들을 베지 마라! 머릿수가 늘어난다!”
주먹으로 가격하며 붉은 자들을 쓰러뜨린 좌장군이 외쳐댔다. 어떻게든 붉은 자들을 쓰러뜨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던 때였다. 검은 복면을 한 자들이 뒤섞이며 닥치는 대로 붉은 자들을 베고 있었다.
“자……, 장군! 검은 복면을 한 자들은 대체!”
홍안이 붉은 자 하나를 베고 좌장군에게 달려드는 검은 복면의 자를 등 뒤에서 베면서 외쳤다. 좌장군 역시 좌장군 벽과 지붕에서 뛰어 내려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자들을 베고, 또 붉은 자들을 검기로 쳐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향화정 안은 쌓이는 시체들과 몰려드는 괴한들로 점점 칼을 휘두르는 거리가 좁아졌다. 정체가 무엇인진 몰라도 두 무리들이 노리는 것은 하나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홍안!”
“예! 장……군!”
홍안이 붉은 자의 검을 막아내며 뒤에 선 좌장군을 향해 힘겹게 대답했다.
“내가 길을 열테니, 천신님과 소상궁을 모시고 저 문으로 나가거라! 할 수 있겠느냐?”
“예! 맡겨주십시오!”
달려오는 검은 복면의 사내를 사정을 두지 않고 베어버린 좌장군의 몸에서 바람이 일었다.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싸우고 있던 내금위 군사들이 적들에게서 몸을 날려 먼 곳으로 피했다. 검풍(劍風)이었다.
“이 바람!”
수영은 앞에 서 있는 좌장군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소상궁을 데리고 나무 뒤편으로 기었다. 나무 뒤편에서 바라본 장면은 눈을 뜨고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좌장군의 몸에서 흩어진 바람이 사방을 쓸 듯이 지나갔을 뿐인데 주변에 있던 적들이 마치 바로 앞에서 뭔가에 맞은 것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좌장군의 검풍으로 문 앞에 있던 적들이 쓰러지자 홍안이 수영에게 달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소신을 따라오십시오! 어서!”
수영은 홍안의 팔을 붙잡고 뒤따르는 소상궁의 팔을 감아쥔 채 문을 향해 달렸다.
‘사방으로 통하는 문!’
수영은 이틀 전 이 문을 통해 좌장군의 수하들을 따돌리고 궁궐 안을 떠돌던 기억을 떠올렸다.
“오른쪽으로 가야해요! 침방 쪽에 숨을 곳이 있어요!”
앞서 가던 홍안을 돌려 세워 침방으로 향하는 문을 먼저 빠져 나오던 수영이 갑자기 멈춰 섰다. 검은 복면을 한 자가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어깨가 담장보다 높았다.
‘이 느낌은……?’
수영은 어둠 속에서 마주한 키 큰 남자의 복면 뒤로 뭔가 오싹한 그림자를 느꼈다.
“어디를 가십니까? 신단수(神檀樹).”
수영은 등골이 오싹하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온몸에 땀이 베어 올랐다.
“여……, 연향 대군?”
“저런, 붉은 자들을 피해 호랑이굴로 들어오셨군요. 허나, 걱정하지 마시오. 내 잡아먹진 않을 테니.”
달빛을 등지고 있는 연향의 얼굴이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소상궁의 뒤에 서 있던 홍안이 급히 연향 대군의 앞을 검을 세우고 막아섰다. 수영은 홍안이 걱정되었다. 좌장군이 아니면 연향 대군을 대적하긴 누구라도 어려울 것이었다.
‘향화정에서 이미 많은 수의 부하들이 죽었어. 홍안마저 그리 된다면 난 좌장군을 볼 수가 없을 거다.’
수영은 홍안의 옆으로 걸어갔다. 놀란 소상궁과 홍안이 수영을 불러 세웠지만 수영은 멈추지 않았다.
“연향 대군 마마. 저를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너를 데려갈 것이다.”
“날 죽일 건가요?”
“설마, 그리하겠느냐?”
“그럼 따라갈게요. 대신, 이 사람들을 살려줘요.”
수영은 연향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진짜 보기 싫은데, 어쩔 수 없다 싶었다. 두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이 연향을 따라가는 것이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연향의 뒤에서 다른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리는 안 됩니다. 신단수(神檀樹).”
-스릉.
굵고도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긴 검을 빼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달빛 아래 연향의 큰 몸집이 천천히 돌아섰다. 마주 선 자의 검은 복면이 천천히 아래로 벗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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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
어둠 속에서 복면을 벗은 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연향이 머리를 틀었다. 복면을 벗은 자의 한쪽 얼굴이 달빛에 비쳤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 반 이상이 털로 덮여 쉽게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낯선 자였으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예삿놈은 아니라 생각되었다. 연향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누구지? 이자는 본적이 없다. 허나 이 기운은?’
요동을 건너온 남자는 연향을 향해 시선을 두면서도 뒤에 서 있는 신단수의 움직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따라가고 있었다.
“그대가 연향 대군인가?”
침착하고도 묵직한 목소리였다. 자신을 알아보는 이 범상치 않은 남자를 바라보는 연향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정체를 밝힐 만 한 놈이 아니라면 앞을 막아서는 짓 따윈 하지 말았어야지?”
고개를 치켜든 연향이 검을 들어 앞에 선 자의 정면을 내리 그었다. 앞에 선 남자는 마치 연향의 행동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뒤로 한 걸음을 물리며 칼끝을 피했다. 그리곤 마주서있는 연향의 복부를 향해 검을 내 질렀다.
“빠르다!”
“둘 다! 엄청!”
홍안은 눈앞에서 펼쳐진 두 사람의 빠른 검술에 기가 질려가고 있었다. 수영 역시 이런 움직임을 본 적이 없었다. 홍안은 지금 이 둘 중 어느 검에도 자신의 검이 미치지 못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좌장군!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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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송구하옵니다. 윽-”
좌장군의 옆에서 수영이 빠져나간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군사 하나가 또 쓰러졌다. 향화정은 검은 복면을 쓴 정체 모를 자들까지 뒤섞이면서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좌장군 역시 검은 복면의 자를 칼로 긋고, 줄어들지 않는 붉은 자들을 향해 다신 일어나지 못할 정도의 일격을 퍼붓고 있었지만 점차 숨이 차올랐다.
“하아, 하아…….”
“장군! 어찌 군사들이 더 오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들로선 역부족입니다!”
남아 있는 내금위의 군사들은 점점 좌장군의 근방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적들에 비해 머릿수가 적었다. 아무리 훈련을 받은 군사들이라 해도 줄어들지 않는 적들 앞에선 목숨을 담보할 수 없었다.
“젠장! 병조에서는 이런 비상시국에 어찌 군사를 내지 않는단 말입니까!”
얼굴의 반이 피로 뒤덮인 현태가 다친 팔을 붙들고 소리쳤다. 좌장군이 아니었다면 벌써 전멸했을 것이었다. 그때 좌장군은 불현듯 내금위장에게만 맡긴 주상 전하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이자들이 노리는 것이 천신님이긴 하나 주상 전하의 안위 또한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 시진이 지났다. 병판이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인가?’
좌장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눈앞의 급박한 전투 상황보다도 아직 자신의 등 뒤에서 멀어지지 않고 있는 여인의 상황이 불안했고, 주상 전하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커다란 불충으로 느껴져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병조에서 군사를 내지 않고 있는 것이 연향과의 연합 때문이라면 반역을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문 뒤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두 개의 서로 다른 기운이 엄청난 파동을 일으키며 충돌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미세하게 느껴지는 여인의 기운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위태했다.
‘홍안!’
홍안만으론 막아내기 쉽지 않은 상대들이었다. 좌장군은 옆의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 역시 문 뒤의 상황이 급변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이미 피를 많이 흘렸음에도 한쪽 손에 칼을 말아 쥔 채 좌장군을 향해 말했다.
“어서 가십시오! 좌장군. 이곳은 저희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현태를 바라보는 좌장군의 시선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던 좌장군은 열린 문을 닫아걸고는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푸른 검기로 마치 결계를 치듯 막아서던 좌장군이 담 너머로 사라지자 적들은 일제히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며 서로 먼저 담을 넘으려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금군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목숨을 버릴 때가 온 것 같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현태의 고함소리에 적들의 전력질주에 겁을 먹고 뒤로 주춤주춤 걸음을 물리던 군사들이 멈춰 섰다. 누구랄 것도 없이 얼굴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피와 섞여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자들의 불안한 눈빛이었으나 한 자루 칼만은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현태의 명령으로 그들의 눈엔 이제 적들의 숫자가 아닌, 자신들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동료들의 시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몰려드는 적들을 좌에서 우로 천천히 훑는 그들의 눈빛엔 두려움 대신 의기가 가득했다. 하나라도 더 베어, 먼저 간 동료들과 좌장군께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칼을 말아 쥔 손에 더욱 힘을 줄 때였다.
향화정 남쪽에서 함성과 함께 금군들이 뛰어들었다. 문을 향해 달려오던 적들이 그 함성에 놀라 주춤거리고 있을 때 담을 넘은 금군들이 향화정과 궁을 잇는 문을 열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군사들 속에 파란 관복 위에 갑옷을 바쳐 입은 병조판서 조갑용이 보였다. 헌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현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들과 함께 쏜살같이 달려들어 온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몸집이 커다란 늑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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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기! 연향 대군하고 싸우고 있는 사람, 누구예요?”
수영은 앞에서 칼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홍안을 향해 물었다.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마.”
홍안 역시 앞으로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 둘 사이를 지나가고 싶지 않았다. 홍안은 지나온 문이 사방으로 열려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소상궁, 다른 문으로 갑시다! 어서!”
수영의 몸을 돌려 세워 문을 빠져나가려던 홍안은 이내 퇴로가 막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엔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어둠을 메우고 있었다.
“이런!”
홍안의 등 뒤에서 수영은 앞을 막고 있는 자들을 겨우 분간하고 있었다. 하늘이 조금씩 푸르스름해지는 듯했다. 검은 복면을 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방으로 통하는 문을 에워싸고 거리를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잡고 있던 소상궁의 손이 떨렸다. 수영은 자신 때문에 다른 이들이 죽는 것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어, 어떡해요? 이제, 어떡해요!”
칼을 빼든 홍안은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뒤로 돌아가 두 자를 막는 다면 천신님과 소상궁을 대피시킬 수 있을까? 아마 세 합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허면…….’
머뭇거리는 홍안의 앞으로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칼을 빼들기 시작했다. 은빛 검이 어둠 속에 빛나고 있었다. 족히 50명은 넘어 보였다.
‘이 많은 자들을 베고 지나가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뒤를 뚫자.’
결심한 홍안이 뒤를 돌아 설 때였다.
“목숨을 어디에서 거둘지 결정했나 보군.”
무리 중에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충식이었다.
“허나, 생각을 잘해야 할 것이다. 저 두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야.”
“허면, 그쪽이 길을 열어줄 텐가?”
홍안은 이자와 이야기를 튼 김에 시간을 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뒤가 막힌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이 사이에서 좌장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우리가? 당연하지. 신단수를 넘긴다면 길만 열어 줄 뿐이겠는가?”
충식은 어서 관복 입은 사내를 끝내고 신단수를 데리고 담을 넘을 생각이었다. 연향과 싸우고 있는 형님의 노고를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신단수를 데리고 빨리 궐을 벗어나야 했다.
“저 둘 중, 누구의 명인가?”
“…….”
호기롭게 대답하던 충식이 입을 다물었다. 혹여 일이 틀어진다면 이쪽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이 유리할 것이었다.
“연향 대군인가?”
“흠, 말이 많군. 신단수를 넘기든지, 아니면 여기서 죽어라!”
칼을 빼든 충식이 홍안에게 검을 날렸다. 홍안과 충식의 검이 공중에서 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칼을 부딪고 서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다시 벌어지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 때였다. 수영은 소상궁의 손을 잡고 뒷걸음질 쳐 내달렸다. 그곳엔 연향과 정체 모를 남자가 맹렬한 기세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잘 들어요, 소상궁.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갈게요. 나만 안 따라다니면 소상궁은 다칠 염려 없어요. 이 난리 통에 상전 잃어버렸다고 벌 줄 사람 없을 거예요. 그러니, 여기, 여기서 가만히 있어요. 나 따라오지 말아요. 알았죠?”
살면서 이렇게 많은 칼들 속에 에워싸여 본 적 없는 소상궁은 저절로 떨리는 몸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헌데 지금 천신이라 불리는 이 여인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혼자 가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소상궁은 간절한 눈빛으로 안 된다고 외쳤다. 수영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수영은 소상궁의 팔을 뿌리치고 연향이 있는 곳으로 뛰어 들었다.
“호? 신단수(神檀樹)?”
갑자기 뛰어든 수영 때문에 두 남자의 살벌한 대결이 멈췄다. 그리곤 서로 칼을 세우고 수영을 중심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맴돌았다. 연향의 입언저리가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실룩거렸다. 마주 선 남자 역시 갑자기 뛰어든 여인을 훑으면서도 연향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수영과 연향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무작정 뛰어든 수영은 이자들이 다시 마주 싸울 때를 틈타 도망칠 생각이었다. 헌데, 막상 이자들이 들고 있는 긴 칼을 보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허!, 후! 할 수 있어. 연향이 움직이는 순간 도망가자!’
침방 마당을 돌던 세 사람의 눈이 좌우를 훑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큰 함성이 들렸다. 한 순간 깨진 정적 사이로 연향이 먼저 신단수를 향해 달렸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붉은 도포자락이 펄럭이며 순식간에 연향의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좌장군의 날아차기에 맞고 그대로 담장 아래 구석으로 굴러버린 연향은 일어나질 못했다. 좌장군은 수영을 향해 달려드는 또 다른 남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세 합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두 사람은 칼을 세우고 마주 섰다. 수영은 다시 검을 쥔 사내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대가 그 유명한 이무로군.”
“누구냐?”
한마디를 짧게 내뱉은 좌장군은 중간에 선 여인의 안위를 빠른 눈으로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듯 했다.
“나는 대정수다. 그대의 이름은 먼 땅에까지 알려져 있지.”
“먼 땅?”
좌장군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검을 세우며 물었다. 칼날에 비친 좌장군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요동이다.”
“요동?”
수영은 좌장군과 마주 선 자의 입에서 요동이란 단어가 나오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남자의 뒤편 구석에서 검은 그림자가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여……, 연향 대군이?”
헌데, 뭔가 이상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몸집이 더 커보였다.
“좌……, 좌장군, 저 사람, 이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