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숲의 레이디
작가 : 커피새
작품등록일 : 2017.7.24
  첫회보기
 
0. 악몽의 진화
작성일 : 17-07-25     조회 : 279     추천 : 1     분량 : 4556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역시 내 손녀다.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윌리엄이 피식 웃었다.

 

  “나는 네가 좋은 남자와 가정을 이루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행복하면 싶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너는 평범히 살고 싶지 않은 것 같구나.”

 

  “윌리엄!”

 

  헬렌의 목청이 올라갔다. 그녀는 하나뿐인 손녀가 가정적인 남자를 만나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하기 바랬다. 아들딸 구분 없이 여러 명 낳아 훌륭히 키우는 다복한 가정의 안주인 말이다.

 

  “우리에겐 이사벨라뿐이에욧! 이 아이를 어찌하려고!”

 

  “그렇지. 그래서 나는 이사벨라를 더 응원하는 거라오. 헬렌. 자기 꿈을 펼치지도 못하고 먼저 간 아이들을 생각해 보시오.”

 

  윌리엄과 헬렌은 자녀 넷을 낳았지만 셋은 어린 시절 죽었다. 유일하게 성인이 된 윌리엄 주니어는 이사벨라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 아이가 결혼 전에 많은 경험을 하기 바란다오. 당신 소원대로 좋은 아내가 되는 것도 좋지. 하지만 견문이 넓다면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기 더 쉽지 않겠소?"

  “이 사람이, 애를 노처녀로 만들 생각인가요? 숙녀야말로 좋은 신붓감이죠. 애가 숙녀 예절 수업을 잘 따라가서 내가 봐준 걸 몰랐나. 난 남자나 받을 교육을 벨에게 시킨 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요.”

 

  헬렌의 반박에 윌리엄이 혀를 끌끌 찼다.

 

  “우리 집안의 가훈인 (크게 생각하고 움직이라)를 생각해 보구려."

 

  헬렌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딸은 달라요. 자고로 한 집안을 이끌 숙녀란 안살림을 도맡을 수 있는 현명함과 남편을 내조할 품성, 바른 몸가짐을 가진 게 최고죠.”

 

  그녀는 반쯤 빈 찻잔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흥분했음에도 몸가짐은 우아했다. 찻잔 받침에 잔 부딪히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공작 영애를 가르쳤던 예법교사에게 사사받은 헬렌이다. 숙녀란 이런 거다.

  윌리엄은 몸으로 보이는 아내의 시위를 무시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소. 얼마 전 있었던 양조인조합에서 들은 소식이오. 해상국가 레스로마의 왕립대학이 한명이긴 해도 이번 가을 학기에 여성 입학 허가를 내줬다고 하오.”

 

 “설마.”

 

  헬렌의 입이 벌어졌다. 레스로마는 릴스난 산맥 너머 국가다. 척박한 땅 때문인지 레스로마는 억세고 예측불가의 행동을 많이 했다.

  이디카 대륙에서 가장 먼저 여성의 가문 승계를 허용한 파격을 보인 걸로도 모자라 십여년 전에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처음으로 주었다.

  여기에 남자와 동등한 교육까지 보장하다니.

 

  “그 한명이 벨인가요? 곧 성인이 되고, 약혼자를 만들어야 하는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기까지 하려다니!”

 

  “안타깝게도 입학생은 벨이 아니오. 그러나 애가 원한다면 유학도 생각해보지,”

  윌리엄의 말에 헬렌은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애를 처녀귀신으로 만들 생각인 게야.

  그런 부인을 무시하며 윌리엄은 부드럽게 이사벨라를 보았다.

 

  “벨. 이 할애비는 네가 결혼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밀어주고 싶구나. 다른 배움을 원한다면 새 교사나 유학을, 사업을 원한다면 종잣돈을, 여행을 원한다면 여비를 주겠다.”

 

  ‘할아버지가 내 꿈을 정확히 알고 계셨던가!’

 

  이사벨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레스로마가 여학생도 입학시킨다니! 어쩌면, 거길 가면 여성 최초로 탐사대 일원이 되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유학을 물심양면 지지해 달라고 말해도 될까.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주인마님, 뮈레 후작가에서 전보를 보냈습니다.”

 

  하인이 전보를 가져왔다.

 

  “후작가에서?”

 

  윌리엄이 놀라 전보를 받았다. 머리를 짚었던 헬렌도 자세를 다시 잡았다.

 

  “어쩐 일이지?”

 

  뮈레가문은 프렌시아 왕국에서 손꼽히는 부와 명예를 가진 유서 깊은 집안이다.

  모든 진실을 꿰뚫어 본다는 이종족 [(외눈의 클리프)의 눈]을 가문 문장으로 가져서일까. 뮈레가는 프렌시아 왕국 최고의 눈이란 별명도 가졌다.

  가문의 적장자들만 물려받는다는 청색에 가까운 푸른 눈은 마주한 순간, 모든 거짓을 꿰뚫어본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뮈레가 사람은 사악한 존재도 한 눈에 알아본다 했다. 그래서 왕실도 뮈레가를 믿는다 했던가.

  인간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뮈레가!

  이런 대단한 집안과 봉건시대 소영주의 후예이자 상인인 칼파르가의 인연은 얕았다.

  “엥? 후작의 장남이 보냈네? 사업 건으로 우리 집에 방문하겠다는데?”

 

  일방적인 통보에 헬렌이 손을 내밀었다.

 

  “어디 좀 봐요.”

 

  뮈레 후작의 장남은 올해 24살이다. 후작위를 계승하기 전까진 자작 작위를 가진 청년이기도 하다.

  분홍빛 기대를 가지고 전보를 건네받은 헬렌의 눈자위가 살짝 떨렸다.

 

  “방문시간이 오늘 오후잖아!”

 

 * * *

 

  오후 3시 20분. 칼파르가에 검은색 자동차가 들어왔다.

 

  ‘헉! 마차가 아니네!’

 

  대기하고 있던 하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동차. 말이 없는 마차라고 했던가. 자동차는 작년 옆 나라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서 선보인 발명품으로 당시 가장 큰 화제를 몰았다.

  그래서일까. 시제품 몇 개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돌기는 했다.

 

  ‘그 중 한 대가 뮈레가에 있나 보구만. 역시 최상류층은 규모가 다르구나.’

 

 대륙의 17개국 중 자동차를 가진 나라가 얼마나 될까. 열 대도 만들지 않았다는 시제품을 가진 집안이라니.

  어쩌면 뮈레가는 왕실보다 먼저 신문물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

  헛바람을 삼키며 하인은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거야 원, 마부가 없으니 인사하기도 그렇고. 저건 어떻게 세우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차에 한 사람만 있으니 운전자가 후작 의 장남임이 분명했다. 어찌 인사를 올리나 고민하는 그 앞에 자동차가 부릉거리며 섰다.

 

  “프렌시아 동부의 수호자인 뮈레가의 장남, 칼 데 뮈레네.”

 

  실크 모자와 상아 단추가 달린 프록코트에 타이, 완벽한 광이 나는 가죽 신발, 적당히 손을 탄 가죽장갑, 신사의 상징인 지팡이를 챙긴 젊은 남자가 가죽 가방을 가지고 차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뮈레 자작님.”

 

  하인은 간신히 예를 갖춰 인사하고 뮈레가의 후계자를 안으로 모셨다.

 

 * * *

 똑똑. 하인이 살짝 열린 응접실의 문을 두드렸다.

 

  “주인마님, 칼 데 뮈레 자작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드시라 하게.”

 

  의자에 앉아있던 윌리엄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주름이 풍성한 셔츠에 은단추를 단 실크 조끼로 격식을 갖춘 차림이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뮈레 자작님.”

 

  윌리엄의 인사에 남자가 손을 내밀며 우아하게 답했다.

 

  “칼 데 뮈레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윌리엄 칼파르씨.”

 

  ‘같은 남자가 봐도 잘 생겼구만.’

 

  윌리엄은 악수하며 생각했다.

  칼 데 뮈레는 누구나 돌아볼 수밖에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사교계 신문의 미남 순위 상위권에 몇 년씩이나 이름이 머물만했다.

 

  “누추하지만 앉으시지요. 남부에는 봄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있다지만, 여기 문타시는 협곡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아직 쌀쌀합니다. 눈 녹은 진창도 그늘 여기저기 남아있어 시간 내 오시기 쉽지 않으셨겠습니다.”

 

  급한 사업 건이라지만, 통보 당일 방문에 대한 힐난이었다. 칼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문타시의 아름다움은 계절별로 다르다고 하더군요. 급히 오느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은 훗날 방문하며 풀려 합니다. 오늘은 워낙 긴급한 일로 실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잠시 말을 끊은 뒤 한 박자 쉬었다. 일회성 거래가 아님을 눈치 챈 윌리엄의 귀가 크게 열렸다.

  칼이 매력적인 목소리로 본론을 이었다.

 

  “대관식때나 쓰일 법한 최고급 위스키를 닷새 안에 레스로마로 보내야 합니다. 칼파르가는 맥주와 함께 위스키도 소량 생산하고 있지요.”

 

  윌리엄의 고개가 아래위로 거칠게 오르내렸다.

  시중에 도는 8년산, 15년산짜리 칼파르 위스키 가격은 각각 금화 1닢과 금화 1.4닢이다. 같은 양의 칼파르 맥주는 동화 2개.

  칼파르 위스키 몸값은 칼파르 맥주의 500배와 700배다. 경쟁 위스키와 비교해 크게 비싸거나 떨어지지 않는 보통의 제품이다.

  그러나 이것과 달리 특별한 술이 있으니. 칼파르 생일 위스키가 그것이다.

  가문의 직계 핏줄이 태어나면 담는 생일 위스키는 왕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위스키 주인이 개봉을 허락해야 오크통을 열기 때문이다.

  이 술은, 개봉한 날 칼파르 가문에 모인 사람들이 마시고 남은 것만 판매용으로 만든다. 그래서 시중에 나오는 칼파르 생일 위스키는 숙성 년도와 판매량이 천차만별이었다.

 

 “칼파르의 한정 위스키는 없어서 못 구한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47년 숙성된 위스키 몇 병이 가문 내에 아직 있다더군요. 그래서 그걸 구매하고자 우체국이 열리자마자 급히 전보를 보냈지요.”

 

  칼 데 뮈레의 방문 목적은 한정판 위스키였다.

 

  “허어.”

 

  윌리엄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해외, 그것도 릴스난 산맥 너머 레스로마로 보내려면 닷새도 빠듯했다.

 

  ‘아니, 영광이지. 우리 가문의 자랑인 한정판 위스키 때문이라 해도 10개가 넘는 프렌시아의 위스키 브랜드 중 우리 걸 골랐으니.’

 

  급한 전보에 숨겨진 내막을 들으니 뮈레가에 대한 섭섭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맞습니다. 말씀하신 위스키는 빌리 칼파르 위스키고 제 동생이 47세 때 첫 손주를 얻은 날 개봉한 것입니다. 현재 4병이 남아있답니다.”

 

  윌리엄은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가문이 보관 중인, 판매 가능한 한정판 위스키를 소개했다.

 

  “모두 구매하고 싶습니다.”

 

  칼이 말한 순간이었다.

  똑똑. 닫은 응접실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20 4. 두 번째 단서 (4) (1) 7/31 316 1
19 4. 두 번째 단서 (3) 7/31 274 0
18 4. 두 번째 단서 (2) 7/31 249 0
17 4. 두 번째 단서 (1) 7/30 260 0
16 겉가지 1 7/30 262 0
15 3. 과거의 잔영 (4) 7/30 274 0
14 3. 과거의 잔영 (3) 7/30 271 0
13 3. 과거의 잔영 (2) 7/29 261 0
12 3. 과거의 잔영 (1) 7/29 265 0
11 2. 첫 번째 단서 7/29 249 0
10 1. 검은 매 의뢰 (5) 7/29 270 0
9 1. 검은 매 의뢰 (4) 7/29 259 0
8 1. 검은 매 의뢰 (3) 7/28 269 0
7 1. 검은 매 의뢰 (2) 7/27 258 0
6 1. 검은 매 의뢰 (1) 7/27 276 0
5 0. 악몽의 진화 (4) 7/26 262 0
4 0. 악몽의 진화 (3) 7/26 297 0
3 0. 악몽의 진화 (2) 7/25 246 1
2 0. 악몽의 진화 7/25 280 1
1 프롤로그 7/24 45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