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섬 후작가에서 마차가? 오라버니를 찾아올 거라는 방문객이 또다른 후작가 사람이였어?”
저녁 준비를 지시하던 엘리사가 펄쩍 뛰었다.
펜섬 후작가는 개국공신집안이다. 여기에 현 후작은 30살의 미혼이라 왕국 모든 여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어, 응.”
미적지근하게 말한 윌리엄을 보지도 않고 엘리사가 하녀를 불렀다. 티 타임 직전에 귀가해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다. 부랴부랴 하녀가 가져온 가운을 입으며 엘리사가 감탄했다.
“어제는 뮈레가와 맺은 위스키 계약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지. 빌리 오라버니가 본가에 도착할 때 봤다던 자동차가 뮈레가였다며? 혹시, 이게 소문이 나 펜섬 후작가도 계약하려는 거야?”
그녀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칼파르 맥주와 위스키는 지역주다. 문타시에서는 알아줘도 수도에서는 인지도가 약했다.
“미안하구나. 술과 관계없어. 이건 벨과 관련된 거다. 펜섬 후작가에서 찾아올 줄은 나도 몰랐지만.”
윌리엄이 말을 막 끝냈을 때 하녀가 현관을 열었다.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실크 모자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사 칼파르 코흐가 헨리 데 펜섬 후작각하를 뵙습니다.”
눈이 동그레진 엘리사가 황급히 인사했다. 뒤따라 나온 윌리엄과 이사벨라가 이어 인사했다.
“윌리엄 칼파르와 이사벨라 칼파르입니다. 뵙게 되어영광입니다. 각하.”
반짝이는 가죽 구두에 케이프달린 고급 오버코트, 자주빛 타이, 은으로 만든 늑대머리장식이 달린 흑단 지팡이를 짚은 남자가 셋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팡이를 짚은 오른손 중지에서 알이 큰 사파이어 반지가 반짝였다.
“헨리 데 펜섬이오. 이런 자리에서 첫 인사를 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코흐부인, 그리고 칼파르씨. 사안이 사안인만큼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했으면 하오.”
펜섬 후작은 백금발에 회색 눈의 차가운 미남이었다. 그도 사교계 신문의 미남 순위 상위에 오르내리는 귀족이다. 뮈레 후작의 장남보다 키는 약간 작지만, 왕국에서 드문 백금발이 인기 요소지.
‘참 아이러니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까 만나기도 힘든 높은 분들을 만나네.’
이사벨라는 속으로 한숨 쉬었다. 왕국 4대 후작가 중 두 집안을 이틀 연속으로 만나고 있다. 게다가 다 미남이다.
“제 아들의 서재가 좋겠군요. 이 집에서 가장 방음이 잘되는데다 아직 퇴근 전이니 비어있답니다.”
그런 조카 손녀의 속을 알리 없는 엘리사가 벤자민의 서재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사벨라가 예쁘긴 하지. 젠트리가 귀족가로 시집가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혹시 조카딸 때문에 오신 건가? 그녀는 들떴다. 잘생긴 후작을 본 순간, 새벽의 사건은 엘리사 머리에서 사라졌다.
벤자민의 서재는 각종 책과 그림들로 가득했다. 책상에 늘어진 그림 몇 장 중엔 이사벨라가 보낸 그림도 있었다. 그런 서재의 문을 닫자 후작이 다시 인사했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지. 프렌시아의 제 1 파수꾼이자 왕국 북쪽 수호자인 헨리 데 펜섬이오.”
윌리엄의 입이 벌어졌다. 흡! 이사벨라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후작 말을 이해 못한 엘리사만 눈을 깜박였다.
프렌시아 제 1 파수꾼.
이는 사악한 것을 사냥해 음지에서 프렌시아를 지키는 왕국의 비밀조직, 데빌헌터클럽의 첫 번째 가문을 뜻했다.
* * *
“애들이나 낄 법한 그런 반지는 어디서 구했냐? 새끼손가락에 반지라니, 혹시 문타시의 유행이니?”
“켁.”
5촌 당숙부 벤자민의 물음에 이사벨라는 씹던 스파게티를 뿜었다. 투투둑. 그릇 위에 스파게티 조각이 튀었다.
“스파게티면이 너무 긴가?”
원인을 제공한 벤자민이 태연히 말했다. 콜라비 피클을 입으로 가져가던 엘리사가 한 마디 했다.
“얘는. 벨을 아직 아기 취급하네.”
“괜찮냐?”
윌리엄이 물 잔을 이사벨라에게 건넸다.
“괜, 괜찮아요.”
할아버지가 준 물을 마신 이사벨라는 당숙부를 살짝 원망스레 보았다. 스파게티를 크게 말아 입에 넣는 모습이 얄미웠다.
“신분 높고 잘생긴 미혼 남자 귀족이 오늘 여기 방문하셔서 주신 거예요.”
사실은 빌려준 거지만.
“쿠흡!”
벤자민의 입에서 스파게티가 주륵 흘러내렸다.
“쯧쯔, 서른을 넘긴 남자가 칠칠맞게 스파게티나 흘리는 구나.”
윌리엄이 근엄하게 말했다.
푸훕. 엘리사가 작게 웃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가볍게 목례한 이사벨라가 왼손으로 자신의 스파게티 그릇을 옆으로 밀었다. 새끼손가락의 홍옥 반지가 반짝였다.
* * *
헨리 데 펜섬 후작도 성격이 급했다.
“뮈레 후작에게 이야기 들었소. 데빌헌터클럽에 정식으로 검은 매 의뢰를 했다던데.”
“네, 후작님.”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게 클럽회원 특징인 모양이었다.
“얘, 무슨 말이야.”
엘리사가 이사벨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 음.”
말을 해도 될까? 그녀는 망설였다.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바라보는 후작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노을지는 창이 배경이어서였을까. 은은하게 빛나는 백금발에 서늘한 회색 눈동자, 여기에 30대 특유의 성숙함까지.
날카롭지만 인간미가 보이던 칼 데 뮈레보다 삭막해 보였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어떤 폭풍이 올지 짐작되지 않았다.
‘최소한 뮈레 자작은 감정 표현은 풍부했지. 이크!’
회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이사벨라는 움찔했다. 덕분에 그녀는 펜섬 후작의 눈에 서린 이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코흐 교수도 이 일에 도움을 줘야하니 부인이 알아도 되리라. 난 부인 입이 아드님의 명예만큼 무거우리라 믿소.”
엘리사에게 경고한 후작이 반지 낀 오른손을 품에 넣었다. 그가 꺼낸 건 작은 흑단 상자였다.
딸깍. 상자 안에는 아이들이 할법한 작은 장신구 몇 개가 들어있었다.
옥가락지, 금과 옥으로 만든 귀걸이, 팔찌까지. 일곱 개의 장신구가 잘 보이게 책상에 올린 펜섬 후작이 설명을 했다.
“이건 구속구요. 옛 가한 제국의 황손들이 황룡에게 받은 자신의 능력을 봉인할 때 썼던 도구지.”
칼파르가의 피를 받은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가한 제국 황족 몇몇은 황룡이 나누어 준 힘을 쓸 수 있다. 능력자는 보통 15살 이후 발현되지만, 수백 년 전에는 태어날 때부터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의 사고를 막기 위해 도구로 능력을 구속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후작님도 참. 그런 전설을.”
엘리사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과학자의 모친다웠다. 후작은 엘리사를 무시하고 설명을 이었다.
“칼파르양, 이걸 착용하고 있는 동안은 추적을 막을 수 있을 거요. 밖에서 들어오는 힘과 안에서 나가는 힘을 눌러서 능력을 감추거든.”
이사벨라는 자신의 눈을 보며 말하는 회색 눈동자에 잡혀 꼼짝없이 경청했다.
“그러니까 몸에 지니는 동안은 안전하다는 뜻이네요.”
이사벨라의 대답에 후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똑똑한 처자로군. 하나 골라보시게. 의뢰가 끝날 때까지 그대를 보호해 줄 거네.”
이사벨라는 밋밋한 홍옥 가락지를 골랐다. 그나마 새끼손가락에 들어가는 걸 고른 거였다. 강한 주술을 가진 아티팩트여서 대여료가 하루 은화 한 닢이었다,
“은화 한 닢이면 저런 거 두 개는 사겠구만. 저걸 돈 주고 빌리다니!”
엘리사는 펄쩍 뛰었다. 후작이 가고 난 뒤,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한 윌리엄이 모든 상황 설명을 한 뒤에도 엘리사의 반응은 똑같았다.
“아니, 그 클럽은 대귀족이 최소 두 가문은 있는데 바가지가 심하잖아!”
데빌헌터클럽의 검은 매 의뢰는 개인 수준이 겪는 가장 큰 위험을 막는 의뢰다. 그만큼 다양한 장비와 도움이 제공된다. 돈이 얼마가 들지 아무도 모른다.
* * *
두 시간 전의 일을 떠올리는 이사벨라에게 벤자민이 말했다.
“반지 크기를 보아하니 어린애 거 같은데. 꼬마 도련님이 와서 너에게 반지를 준 거 아니야?”
“음, 저보다 나이가 많아요.”
벤자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에게 이사벨라는 죽은 아이를 대신하는 딸 같은 존재였다. 친딸치고는 나이가 많았지만.
“넌 아직 미성년자야! 그 남자가 자신의 지위로 네게 뭔가를 강요한다면 내게 말해라. 이래봬도 내가 높은 분들과 친하다! 병원장님만 해도 태후 마마의 동생이잖냐.”
“아, 네네.”
이사벨라는 성의 없이 말하며 오렌지를 집었다.
“벌써 다 먹었니? 글피 오전에 출발해야하니 먼저 일어나서 짐 정리해도 괜찮다.”
윌리엄의 말에 이사벨라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벤자민이 입을 벌렸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니, 올라오자마자 시골로 돌아가게요? 외숙부님이야 바쁘겠지만, 한가한 벨은 두고 가시죠? 애가 똘똘해서 이것저것 가르치려는데. 어차피 가을 사교계에 여기서 데뷔할테니까 몇 달 머물면 되겠네.”
쉴새없이 말하는 벤자민에게 윌리엄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벤자민, 바쁜 사람이 이사벨라다. 얘는 3일 뒤 티보크로 출발해야해.”
티보크는 릴스난 산맥 아래의 작은 도시다. 그러나 모든 대륙인은 티보크를 안다.
대륙 북부 끝의 팡티왕국에서 시작해 해안국가인 레스로마에 도착하는 대륙횡단열차가 산맥을 넘기 전 정차하는 마지막 역이 티보크 역이다.
그리고 산맥 너머에 있는 유일한 왕국, 레스로마에서 출발한 횡단열차가 산맥을 넘은 첫 기착지이기도 하다.
헨리 데 펜섬 후작은 이사벨라에게 3일 뒤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티보크로 갈 것을 명했다.
“아니, 얘가 무슨 일로 국경도시 티보크까지 갑니까? 이사벨?”
“글쎼요. 저는 방으로 가겠습니다.”
흥분한 벤자민을 뒤로 하고 이사벨라는 일어났다. 그의 궁금증은 윌리엄과 엘리사가 적당히 둘러댈 터였다.
‘숙부님도 나를 도울 거라고 후작님이 그러셨는데 아직 모르시는 게 숙부님에겐 따로 연락 갈 모양이네.’
펜섬 후작은 벤자민의 활약도 살짝 언급했다. 손님방으로 향하는 이사벨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조력자를 두 명 붙여준댔지. 그 중 한 명이 숙부님인가.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