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보크는 릴스난 산맥의 서남쪽 구석에 자리한 도시다. 왕국 남쪽에 있지만, 뒤에 자리한 산맥 때문에 겨울바람이 아직 남아있었다.
“문타시만큼 춥네요.”
후우. 양 팔을 껴안아 가슴에 붙인 이사벨라의 말에 벤자민이 코를 훌쩍였다. 코트 위에 늘어뜨렸던 목도리를 목에 두르며 벤자민이 말했다.
“그러냐? 수도보다 확실히 춥구나. 크흥.”
대륙횡단열차에서 막 내린 두 사람 앞에 호객꾼이 붙었다. 그는 이사벨라와 벤자민의 커다란 짐 가방을 양 손으로 하나씩 잡으며 외쳤다.
“티보크 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도시 최고의 숙소로 뫼시겠습니다!”
“흠, 우린 벨자크 호텔에 예약했네.”
벤자민의 말에 호객꾼의 발이 잠시 휘청였다. 벨자크 호텔은 티보크 시에서 가장 비싼 호텔 중 하나다.
“아, 예, 숙소를 예약하셨구만요. 그럼 백동화 세 닢에 호텔까지 뫼시겠습니다.”
“은화 한 닢을 주지.”
은화 1개는 백동화 10개 가격이다. 벤자민의 대답에 호객꾼이 넙죽 허리를 숙였다.
“감사함다! 선생님!”
“대신 저기 저쪽의 짐들까지 옮겨주게.”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곧 볼썽사납게 구겨졌다. 벤자민의 손길이 미친 곳은 기차짐칸에서 내린, 승합마차 한 대를 꽉 채울 분량의 짐 무더기였다.
* * *
“여기서 언제까지 있어야 한담.”
이사벨라는 작게 불평했다. 그녀는 티보크시의 고급호텔인 벨자크 호텔 2층 까페에 앉아있었다. 펜섬 후작은 여기서 조력자를 기다리라고 했다.
‘불안해, 아무래도 내 조력자가 칼 데 뮈레경같아.’
칼파르 위스키를 들고 레스로마에 갔다던 뮈레 경이 기차로 귀국하면 가장먼저 도착하는 도시가 티보크다.
하루가 아까운데 삼일이나 꼼짝없이 기다리려니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 동안에도 의뢰비는 매일 나가잖아. 귀족은 무슨! 악덕 상인들 같으니.’
이사벨라는 한숨을 삼키며 우유 도자기를 들었다. 홍차에 우유를 섞는 그녀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얼린 몸을 녹이는 데는 차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말벗이 좋지 않을까요. 레이디, 저와 함께 차를 드는 게 어떻습니까?”
당황해서 우유를 다 쏟아 부을 뻔 했다. 우유가 찻잔 가장자리를 넘기 직전 간신히 동작을 멈춘 이사벨라는 고개를 들었다.
회갈색 머리에 입이 튀어나온 젊은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벤자민 당숙부와 같이 올 걸.’
이제 봄이 시작되는데 날파리가 출현하다니! 내일 식물병 연구를 위해 테슈 지역으로 출발할 벤자민 당숙부는 준비물의 마지막 점검으로 바빴다.
“호의는 고마우나 전 지금 혼자 있고 싶군요.”
탁, 그녀는 우유 도자기를 쟁반에 소리 나게 올리며 거절했다. 이사벨라의 반응에 남자가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실연당한 거 같은데 거 외로운 청춘끼리 서로 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뭐 이런 무례한...”
기가 찬 이사벨라의 중얼거림은 남자의 말에 잘렸다.
“튕기기는. 좋으면서.”
‘으아!’
나불대는 입술 밖으로 엄청난 양의 침 조각이 튀어나왔다.
투투투. 침이 따뜻한 쿠키와 스콘 위에 그대로 내려앉았다. 경악으로 굳은 그녀 맞은편에 남자가 허락 없이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들어 올린 발을 까딱거리며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프랭크 하벨리입니다. 아름다운 레이디는?”
“정말 무례하군요.”
이사벨라는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침을 쏘아대며 음흉하게 보는 남자와 1초도 같이 하기 싫었다. 게다가 기분 나쁘게 혀까지 내밀어 지 입술을 햝다니!
“이봐. 튕기는 것도 정도껏 하지.”
그녀의 거절에 남자가 정색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프랭크가 이사벨라의 오른손목을 잡았다.
“좋게 말하니까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이거 놔!”
퍽! 이사벨라는 왼 손을 쥐어 프랭크의 얼굴에 날렸다.
“으악!”
인중을 맞은 프랭크가 양 손으로 코 밑을 감쌌다. 오른손이 자유로워진 이사벨라는 몸을 돌려 카페 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난 떳떳해.’
웨이터와 손님들의 휘둥그레진 눈빛을 받은 등이 따가웠다. 은화 1닢을 카운터에 지불하는 그녀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사벨라 양은 남자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악취미가 있군요.”
“어머!“
카페 입구에 칼 데 뮈레가 서 있었다. 당황한 이사벨라의 발이 살짝 꼬였다.
휘청, 몸이 앞으로 쏠리다 말았다. 넘어지지 않게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아주려 내민 칼의 손이 머쓱하게 멈췄다.
“아, 호의 감사합니다.”
이사벨라는 간신히 대답했다. 재빨리 내민 한 발로 몸을 지탱하느라 온 몸이 부들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내밀었던 팔을 내리며 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레이디. 까페의 모든 눈이 여기 집중되고 있군요. 나가서 이야기하지요.”
* * *
벤자민의 눈빛이 복잡미묘했다.
마주보고 앉은 칼 데 뮈레 자작은 소문 이상으로 잘생겼다. 둘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식당의 모든 사람이 이쪽을 흘끔거리는 걸.
절세미녀인 5촌 조카 이사벨라와 밉상스런 뮈레 자작이 원인일 터였다.
“크험험. 그러니까 뮈렌 자작님이 내 조카 문제를 해결할 담당자란 말이지요?”
관찰과 실험 결과를 믿는 전형적 과학자인 벤자민이다. 그는 미신이나 괴물, 악령, 마수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벤자민에게 이사벨라의 증상은 기존 병원 치료가 곤란한 신경성 질환이었다.
“그렇습니다. 코흐 교수님.”
칼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벤자민은 자기 옆의 이사벨라를 걱정스레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경을 믿지만, 젊은 남녀만 움직이는 거라 세간의 눈이 무섭습니다. 동행해서 혹여 생길지 모를 구설수의 싹을 자르고, 치료 과정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나 맡은 공무가 있어 그러지 못함이 아쉽군요.”
벤자민의 걱정에 칼은 속으로 실소했다. 이사벨라의 혼사는 칼보다 그녀 자신 때문에 더 힘들 터였다. 주먹을 휘두르는 아가씨지 않은가!
숙녀가 아닌, 왈가닥 소년같은 실체를 안다면 코흐 교수는 자기 조카 평판이 아닌, 칼의 안전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검은 매 의뢰는 의뢰자의 명예를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익명으로 움직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작님을 믿겠습니다.”
칼의 확답에 벤자민은 살짝 안심했다. 그래. 명예를 안다면 음흉한 짓을 하진 않겠지. 그는 앞의 잔을 들었다.
“이거, 음식이 식었겠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건배.”
칼과 이사벨라도 잔을 들었다. 미적지근해진 식전 양파수프와 감자샐러드를 먹은 뒤 훈제송어구이를 먹을 때였다.
“이사벨라양, 내일 코흐 교수님이 출발하실 때 우리도 출발할 겁니다.”
칼의 말에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타그만으로 가는 건가요?”
“타그만?”
칼의 물음에 이사벨라는 작게 헛기침했다. 옆의 벤자민이 물을 권했다.
“사례 들렸나? 마시고 이야기하렴.”
“험험, 괜찮습니다. 숙부님. 자작님, 제가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군요. 뮈레 후작님 말씀대로 제가 찾은 정보를 전해드렸어야 하는데,”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재회하자마자 남자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인 이사벨라다. 당황한 그녀가 이런 고급 정보를 바로 말할 정신이 있을 리 없었다.
“실수를 용서해 주세요. 자작님. 타그만은 제 부친이 모친과 혼인신고를 한 마을입니다.”
칼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호텔에 도착해 이사벨라를 만나기 직전, 칼은 먼저 도착한 수하가 전달한 뮈레 후작의 편지를 받았다.
[가보, 외눈의 클립스로 알아낸 사실이다. 이사벨라 칼파르양의 저주는 모계에서 대를 이어 내려왔다. 간단히 알아보니 그녀 모친은 출신이 불분명하고 죽은 지 17년이 되었더구나. 남은 가족들도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이사벨라양 모친 가계를 추적하면 저주의 실체를 만날 수 있을 거다. 네 첫 임무가 검은 매 의뢰라 흐뭇하면서도 걱정된다.
외눈의 클립스를 같이 보내니 꼭 필요할 때 쓰도록 해라.
물론, 중간보고는 틈틈이 하도록.]
후작답지 않게 잔소리와 걱정이 담긴 내용이었다. 그리고 뮈레 후작이 알려준 정보를 활용하려던 칼의 계획은 이사벨라의 말에 사르르 사라졌다.
먼저 모친에 관한 질문을 해서 프로의 모습을 보이려던 생각 말이다. 선수를 뺏겼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사무적인 칼의 되물음에 이사벨라는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렸다.
“네, 유감스럽게도요. 방금 말씀 드린 건 아버지의 일기를 보고 알아낸 거랍니다.”
“부친의 일기장이 있습니까?”
“엘리사 고모할머니, 그러니까 벤자민 숙부님 댁에 아버지 유품이 조금 있는데, 그 중에 일기장이 있더군요.”
윌리엄 주니어 칼파르는 수도에서 지낼 때 고모 엘리사 집에서 머물렀다. 그래서 간단한 옷가지와 이런저런 소지품이 남아있었다. 그 중엔 노트와 일기장도 있었다.
어린 이사벨라가 유품을 망가뜨릴까 본가로 보내지 않았던 물건들이었다. 덕분에 이사벨라는 티보크로 오기 전 아버지의 물건을 하나하나 볼 수 있었다.
“이사벨라양, 괜찮다면 내일 일기장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네. 출발할 때 보여드리죠.”
그녀의 대답을 들은 칼은 다시 나이프를 들었다.
"어쩜 저리 잘 생겼을까!"
"달의 여신같은 미인일세!"
사람들의 찬탄 속에서 서걱서걱. 세 사람의 조용한 식사가 다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