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증인 때문에 그런 건가요?”
“허흠흠.”
주례사 옆의 증인란이 이채로웠다. 증인은 신랑과 신부 측 1명씩 두 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름을 적은 증인은 1명 이었다. 사제와 이사벨라가 차마 지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신랑과 신부 증인란에 자신 이름을 적은 증인은 각각의 자리에 다른 인장을 찍었다. 1명이 양측의 증인이 되는 게 가능할까?
눈앞의 증거를 보면 가능한 모양이었다.
결혼 증인 운비백풍(雲飛白風). 운비백풍(雲飛白風).
신랑측 증인 인장 - 붓을 문 부엉이
신부측 증인 인장 – 불새 목을 잡은 용
붓을 문 부엉이는 가문문장이었다.
즉 결혼 증인이 최소한 귀족이라는 의미다. 프렌시아 귀족 문장이 아니지만, 칼 데 뮈레는 그 문장이 어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신부측 인장 때문이었다.
불새 목을 잡은 용.
이건 가한 제국의 황실 수호대, [황룡의 발톱]이 쓰는 문장이었다.
* * * 3. 과거의 잔영 * * *
양초가 일렁이는 방 밖은 어두웠다. 티보크가 지척이건만, 타그만은 아직 가로등이 보급되지 않았다. 문타시도 가로등이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문명의 이기가 대단한데.’
그새 가로등에 익숙해졌네.
맺음말을 적은 편지지를 접으며 이사벨라는 생각했다. 두 통의 편지를 탁자에 가지런히 놓은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하암, 오늘 일은 끝났고, 시골 마을 야경을 볼까나?”
타그만의 밤은 가스등이 들어오기 전의 문타시를 생각나게 했다. 도시 큰길을 따라 세운 쇠기둥 끝에 달린 유리등에 불이 들어오던 밤, 문타시는 새벽까지 환성과 웃음으로 시끄러웠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많은 별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가로등은 도시의 어둠과 함께 밤하늘의 별빛도 몰아냈다. 타그만의 밤하늘은 별이 드문드문한 문타시의 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별이 가득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창을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아가씨! 밤바람이 아직 찹니다요! 주무시기 전에 방문 꼭 닫으셔!”
누군가 그녀에게 외쳤다. 마부, 아니 뮈레가의 정원사였다. 말을 확인하고 오는 모양인지 그는 마구간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염려 감사해요.”
정원사가 고개를 숙이며 여관 문으로 향했다. 잠시 별을 감상하던 그녀는 오래지 않아 창을 닫았다.
“아우, 꾸린내.”
마을 밖에서 불어온 바람에 소와 양똥 내가 섞여 있었다. 마을 외곽에 동물 배설물로 거름을 만드는 장소가 있다. 여관이 마을 초입에 위치한데다 비가 온 뒤기 때문이리라. 냄새가 무척 강했다.
“로망은 로망인가.”
눈이 시릴 때까지 하늘을 수놓는 별을 올려보는 건 훗날로 미루어야겠다.
차락. 커튼을 친 이사벨라는 작게 한숨 쉰 뒤 외출복을 벗었다.
“할머니가 보면 기겁하시겠네.”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우니 기분이 이상했다.
“다음부터는 어디 갈 때 여분 옷을 챙겨야겠어.”
호텔을 나설 때 옷가방을 챙기지 않았다. 뮈레경 때문이었다. 잠시 다녀올거니 짐을 챙길 필요가 없다고 했겠다.
‘그 말에 속았지.’
당일로 다녀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할아버지 말이 맞다. 역시 젊은 남자 말은 함부로 믿는 게 아니다.
‘뭐, 하루정도 이렇게 자도 문제되진 않을 거야. 누가 알겠어?’
그녀는 탁자와 의자에 가지런히 놓은 패티코트와 겉옷을 흘깃 쳐다보았다.
쯧쯧. 뉘 집 딸래미인지 칠칠맞기도 하지. 갈아입을 옷 하나 안 챙겨 오다니.
어휴, 저도 모르게 한숨이 계속 나와 이사벨라는 왼손을 들었다. 가한 황족의 능력을 눌렀다는 아티펙트, 홍옥 반지가 새끼손가락에서 투박하게 빛났다.
‘빨리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부친 일기장에서 티보크라는 지명을 찾았을 때는 금방 끝나리라 생각했었다.
‘사라진 부분은 부끄러워 없앤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 역시 일기장의 공백을 눈치 챘었다.
간단히 적은 결혼식이야 너무 벅차서 그러려니 했지만, 자신의 출생이나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모친의 죽음을 적은 대목을 봤을 땐, 두 달의 기록이 사라진 게 의도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뮈레 자작님 추측을 무시할 순 없겠지.’
모친 릴리안에 대한 감정이 너무 노골적이라 삭제했다는 것보다 칼의 추측이 신빙성 있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한 것.
아티펙트에 보호받는 처지여서일까. 저녁에 본 부모님의 과거 조각 때문일까. 이사벨라는 모친에 대한 그리움과 궁금증이 평소보다 더 커지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 엄마는 어떤 사람인가요?”
사진은 물론, 초상화조차 남기지 않은 릴리안이다. 얼굴 그림을 넣은 로켓 목걸이가 있다고 했지만, 그건 부친의 시신과 함께 신대륙에 묻혔다.
기억을 뒤져도 얼굴은 커녕, 떠오르는 추억 한 조각 없다. 그녀에게 남은 모친 흔적은 새 깃털이 들어간 수정알 뿐.
울적해진 이사벨라는 양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 * *
“인류의 식탁을 축복하는 테우리신 앞에서 고하노니 여기 마주 본 두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당신의 시종인이 신의 대리자로 서고, 먼 곳에서 신의로 내방하신 운비가의 가주인 운비백풍님이 신랑측 증인으로, 가한 제국 황실 수호대장으로서의 운비백풍님이 신부측 증인으로 섭니다.”
낮고 온화한 목소리가 작은 신전 안을 울렸다. 둥근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으로 내부가 환했다. 돌과 나무로 만든 제단 앞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제의를 입은 장년의 신관, 신관 앞에 마주선 한 쌍의 남녀-여자는 수수한 레이스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증인석에 선, 화려한 문양을 수놓은 이국적 비단옷의 주인도 후드를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부부의 증표를 교환하십시오.”
온화한 음성만큼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제가 말했다. 새 신랑이 머뭇거리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지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가느다란 은줄이었다. 보석알이나 펜던트를 걸기 좋은 굵기였다. 예물이라기엔 보잘 것 없는 줄을 올린 손바닥이 미미하게 떨렸다.
“잠시, 급한 혼례라 예물을 준비하지 못한 것인가?”
화려한 비단옷 후드 아래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객 증인인 운비백풍이었다. 기품 있는 장년 남성의 물음에 새 신랑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귀금속이야 칼파르 본가로 가면 얼마든지 구하겠지.”
운비백풍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뚝. 신랑 옆에 선 그가 가슴께에서 무언가를 뗐다. 동그랗게 깎은 수정이었다. 수정안에는 회색 잔무늬가 촘촘한 깃털이 들어있었다.
“이 신성한 식의 증인이 되어 기쁘네. 인연에 감사하며 내 상징을 결혼선물로 주니 줄에 끼워 예물의 격식을 갖추게나.”
“과분합니다.”
수정을 내민 손길에 신랑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밝은 갈색 머리 아래 드러난 연분홍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신랑의 거절에 운비백풍이 낮게 웃었다.
“허허, 정직하고 순수한 젊은일세. 허나 이건 평범한 삶을 택한 신부에게 보내는 내 최대한의 공경이며, 우리 가문이 표하는 존경일세.”
날카롭고 커다랗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윌리엄 주니어 칼파르의 손 위에 멈추었다.
“훗날 도움이 필요할 때 이걸 우리 가문에 보이면 운비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거네.”
그 말이 윌리엄 칼파르 주니어를 움직였다. 새신랑의 손이 공손히 수정을 받았다. 호의를 가장한 맹약의 증표가 가느다란 줄에 끼워졌다.
“릴리안. 목을.”
여인이 레이스를 들어올렸다. 하얀 목에 깃털이 들어간 수정알이 걸렸다.
“제 인생에 들어와 줘서 고맙습니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윌리엄 주니어의 고백에 여인이 얼굴을 들었다. 숲을 연상시키는 맑은 녹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윌리엄, 제 손을 잡아줘서 고마워요. 마주보는 손에 제 사랑과 신뢰를 담습니다.”
릴리안이 윌리엄 주니어 칼파르의 손목에 팔찌를 끼웠다. 정교한 무늬가 가득한 나무팔찌였다.
* * * * *
이사벨라는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 아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꿈에서 테우리 신전에서 올린 부모님의 작은 결혼식을 봤다. 기억보다 젊은 아빠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엄마.
‘아, 엄마가 이렇게 생겼구나. 정말 이쁘다. 눈뜨면 절대 안 잊어버리게 그려야지.’
잠에서 깨기 직전 한 각오는 그러나 눈을 뜬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릴리안의 얼굴은 꿈과 함께 사라졌다. 기억이 간신히 잡은 건 자신보다 짙은 녹색 눈동자뿐이었다.
‘아, 엄마.’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닦은 이사벨라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한밤이었지만, 날이 밝을 때까지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꿈의 잔상이 사라지기 전 남은 기억이라도 남겨야했다.
의자에 걸친 코트를 집어 어깨에 두른 그녀는 탁자 앞에 앉았다.
팔락. 빈 편지지 한 장을 끌어당긴 이사벨라는 펜을 잡았다.
뚝.
“이크!”
잉크 방울이 홍옥 반지 위에 떨어졌다. 이사벨라는 반지를 빼서 종이 위에 굴렸다. 손가락에 묻은 잉크도 종이로 대충 닦았다.
‘음, 아침에 세수할 때 손가락부터 씻어야지.’
시골 여관방이라 욕실이 없다. 여관 주인은 원하면 아침에 소셋물을 갖다 주겠다고 했다. 손가락에 희미하게 남은 얼룩을 불만스럽게 쳐다본 그녀는 펜을 종이에 댔다.
‘이거라도 그려두자.’
쓱쓱쓱. 잉크 닦은 자국을 피해 펜이 지날 때마다 검은 선이 생겼다. 소용돌이, 굽이치는 매듭, 작은 나뭇잎들. 곡선을 메운 정교한 무늬가 그린 건 팔찌였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항상 이 팔찌를 차고 계셨어.’
어린 그녀를 안아 올리던 부친이 떠올랐다. 반팔, 혹은 긴팔 옷차림의 윌리엄 주니어 칼파르의 팔목에는 언제나 이 팔찌가 있었다.
찔끔, 눈동자를 적신 물기가 눈 끝에 매달렸다.
‘아버지 시신이 문타까지 왔으면 팔찌도 같이 왔을 텐데.’
부친은 신대륙 어딘가에 묻혔다. 팔찌도 같이 묻혔으리라. 할아버지는 탐험대가 가져다 준 칼의 옷가지와 머리카락 한줌을 관에 넣어 장례를 치웠다.
이사벨라는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툭. 쥐고 있던 펜이 그녀 손에서 떨어졌다.
털푸덕, 눈을 감은 이사벨라의 머리가 탁자에 닿았다.
닫힌 창문 틈으로 새벽 어스름보다 어두운 무언가가 들어와 그녀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