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르륵.”
제법 먼 곳에서 희미한 그릉거림이 들렸다.
‘헉! 또 꿈속이야!’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사벨라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역시.’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릴...리..안. 냄..새가 나... 노...놓..치지 아...겠....다.”
부글거리는 쇳소리가 내뱉는 단어에 소름이 돋았다. 거의 열흘 만에 들은 괴 생명체의 말은 집착과 악에 받혀있었다.
‘반지의 힘이 다했나?’
황실에서 나온 봉인 아티팩트라며? 그새 효력이 다했나? 하긴 수백 년 된 기물이니 성능이 떨어졌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구시렁대며 오른손가락으로 왼손을 쓸어내린 이사벨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이 허전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잉크 닦는다고 잠시 뺐었지.’
고민은 금방 끝났다. 기억을 짚어보니 뺐던 가락지를 다시 끼우지 않았다.
‘정말 아티팩트 성능이 좋은 거구나.’
하루 은화 한 닢의 대여료가 아깝지 않은 효과였다,
그러나 효과가 있다는 건 마물이 본격적으로 그녀를 찾고 있다는 의미도 되었다.
칼 데 뮈레의 추측대로 생일 오후 낮잠 때 있었던 접촉으로 마물은 그녀를 더 적극적으로 찾고 있던 게 분명했다.
‘개인 고유의 기운이라고 했던가?’
마물은 먹잇감과 접촉하면 그 기운을 채취처럼 기억해서 쫓는다고 했다. 모친과 비슷한 게 분명한 이사벨라의 기운은 아티팩트로 가려져 있었다.
아티팩트가 없으면 그녀를 찾아 덮치는 게 시간문제라고 했는데. 그런데 왜 반지를 뺀 뒤 다시 끼지 않았던 걸까.
‘어후, 들킬까봐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쩌지.’
이사벨라는 조심스럽게 몸을 쭈그렸다. 그르렁대는 소리가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팔을 들어 어깨를 감싸자 코트가 만져졌다.
‘아, 나 속옷 바람에 코트 걸치고 잠들었지.’
누가 들어오든 민망한 상황이 될 게 분명했다. 탁자에 엎드려 있을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났다.
“공기...주...중에 냄...새가.....다.”
그녀가 현실을 걱정하는 사이에도 마물은 움직였다. 부글대는 쇳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내키는 대로 헤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도망...쳐야겠지?’
이사벨라는 속으로 심호흡하고 천천히 팔을 아래로 뻗었다. 축축한 바닥이 손바닥에 닿았다. 부슬대는 낙엽이 섞인 흙이었다.
‘어?’
생일 새벽, 맨발로 달렸을 때 느끼지 못한 감촉이었다. 그 때는 돌바닥인지, 흙바닥인지, 아니면 천위인지 감촉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질좋은 부엽토가 양 손에 잡혔다.
‘마물의 영역인가!’
그전에 헤매던 공간이 자신의 영역이었다면 이제는 괴물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감각도 같이 예민해 진걸 지도. 크게 숨을 들이키자 짙은 물 냄새가 나는듯했다.
이러다간 괴물이 만든 함정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빨리 도망가야겠다.’
이사벨라는 엉금엉금 손을 뻗어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방에 들어와 깨워주기를 바라며 그녀는 소리가 나는 반대 방향으로 기어갔다.
* * *
“이사벨라! 이사벨라양?”
칼 데 뮈레 자작님? 고막을 울리는 고함에 이사벨라는 눈을 떴다. 살았다! 탁자에 엎드린 동안 돌아간 목이 뻐근했지만, 아픔보다 반가움이 컸다.
이사벨라는 진심을 담아 칼에게 인사했다.
“감사해요! 자작님!”
“아, 음. 괜찮은 것 같군요.”
칼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는 등을 흔들었던 손을 어정쩡하게 들고 상체를 뒤로 젖힌 상태였다. 이사벨라의 주먹을 피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칼의 그런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찌푸둥한 목을 살짝 돌린 뒤 왼손으로 오른 손바닥을 쓸었다.
‘감촉이 아직 생생해.’
부엽토의 촉감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런 이사벨라의 반응에 칼은 슬며시 팔을 내리고 발을 편히 뒀다. 서둘러 들어오길 잘했다. 칼은 스스로 칭찬했다.
* * *
임무 중에는 항상 일찍 일어난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난 칼 데 뮈레는 이사벨라가 아침 세숫물 요청을 했음을 기억했다.
‘따듯한 세숫물이 필요한 지 물어볼까?’
이른 아침부터 숙녀의 잠을 깨우는 건 실례되는 일이다.
그러나 전날, 타그만에 오기 위해 일행이 새벽부터 설친 걸 떠올린 칼은 이사벨라가 이미 일어났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전날 정원사가 방에 가져다 준 물로 간단히 세수하고 벗었던 옷을 입었다. 방을 나서기 전에는 거울로 옷매무새와 머리상태 확인까지 했다.
똑똑.
‘너무 이른가?’
호기롭게 방문을 두드린 뒤에야 그는 이사벨라가 아직 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남자가 결심했으면 행동을 밀어 붙여야는 법. 돌아서기엔 조금 전 노크가 제법 컸다. 칼은 철판을 깔기로 마음먹었다.
똑똑똑.
“이사벨라양. 칼입니다. 일어났습니까?”
처음보다 소리를 키웠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돌아갈까?
‘내키지 않군.’
발길을 돌리기가 싫었다. 잠시 머뭇거렸던 그는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사벨...이사벨라!”
문손잡이가 비정상적으로 찼다. 뒷목덜미를 타고 척추를 따라 얼음이 굴러가듯 쎄한 감각이 흘러내렸다.
보는 자들의 육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힘을 만났을 때 보이는 반응이었다.
칼은 황급히 방문을 열었다. 덜커덩.
방 중앙에 그녀가 있었다. 종이가 흐트러진 탁자에 뺨을 대고 엎드려 의식을 잃은 채로. 눈을 감은 이사벨라 주변에 내려앉은 옅은 어둠이 연기처럼 움직였다.
얼굴 옆에 올린 왼 손이 비었다.
‘이 여자가!’
반지를 빼고 자다니!
칼은 뛰듯이 들어가 그녀 등에 손을 올리고 흔들었다. 칼파르 저택만큼 마수가 영향을 미치지 않아 클럽 반지 알 아래 상비한 비약, [다람쥐꼬리버섯] 가루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개인 고유의 기운이라고 했던가?’
마물은 먹잇감과 접촉하면 그 기운을 채취처럼 기억해서 쫓는다고 했다. 모친과 비슷한 게 분명한 이사벨라의 기운은 아티팩트로 가려져 있었다.
아티팩트가 없으면 그녀를 찾아 덮치는 게 시간문제라고 했는데. 그런데 왜 반지를 뺀 뒤 다시 끼지 않았던 걸까.
‘어후, 들킬까봐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쩌지.’
이사벨라는 조심스럽게 몸을 쭈그렸다. 그르렁대는 소리가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팔을 들어 어깨를 감싸자 코트가 만져졌다.
‘아, 나 속옷 바람에 코트 걸치고 잠들었지.’
누가 들어오든 민망한 상황이 될 게 분명했다. 탁자에 엎드려 있을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났다.
“공기...주...중에 냄...새가.....다.”
그녀가 현실을 걱정하는 사이에도 마물은 움직였다. 부글대는 쇳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내키는 대로 헤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도망...쳐야겠지?’
이사벨라는 속으로 심호흡하고 천천히 팔을 아래로 뻗었다. 축축한 바닥이 손바닥에 닿았다. 부슬대는 낙엽이 섞인 흙이었다.
‘어?’
생일 새벽, 맨발로 달렸을 때 느끼지 못한 감촉이었다. 그 때는 돌바닥인지, 흙바닥인지, 아니면 천위인지 감촉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질좋은 부엽토가 양 손에 잡혔다.
‘마물의 영역인가!’
그전에 헤매던 공간이 자신의 영역이었다면 이제는 괴물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감각도 같이 예민해 진걸 지도. 크게 숨을 들이키자 짙은 물 냄새가 나는듯했다.
이러다간 괴물이 만든 함정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빨리 도망가야겠다.’
이사벨라는 엉금엉금 손을 뻗어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방에 들어와 깨워주기를 바라며 그녀는 소리가 나는 반대 방향으로 기어갔다.
* * *
“이사벨라! 이사벨라양?”
칼 데 뮈레 자작님? 고막을 울리는 고함에 이사벨라는 눈을 떴다. 살았다! 탁자에 엎드린 동안 돌아간 목이 뻐근했지만, 아픔보다 반가움이 컸다.
이사벨라는 진심을 담아 칼에게 인사했다.
“감사해요! 자작님!”
“아, 음. 괜찮은 것 같군요.”
칼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는 등을 흔들었던 손을 어정쩡하게 들고 상체를 뒤로 젖힌 상태였다. 이사벨라의 주먹을 피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칼의 그런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찌푸둥한 목을 살짝 돌린 뒤 왼손으로 오른 손바닥을 쓸었다.
‘감촉이 아직 생생해.’
부엽토의 촉감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런 이사벨라의 반응에 칼은 슬며시 팔을 내리고 발을 편히 뒀다. 서둘러 들어오길 잘했다. 칼은 스스로 칭찬했다.
* * *
임무 중에는 항상 일찍 일어난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난 칼 데 뮈레는 이사벨라가 아침 세숫물 요청을 했음을 기억했다.
‘따듯한 세숫물이 필요한 지 물어볼까?’
이른 아침부터 숙녀의 잠을 깨우는 건 실례되는 일이다.
그러나 전날, 타그만에 오기 위해 일행이 새벽부터 설친 걸 떠올린 칼은 이사벨라가 이미 일어났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전날 정원사가 방에 가져다 준 물로 간단히 세수하고 벗었던 옷을 입었다. 방을 나서기 전에는 거울로 옷매무새와 머리상태 확인까지 했다.
똑똑.
‘너무 이른가?’
호기롭게 방문을 두드린 뒤에야 그는 이사벨라가 아직 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남자가 결심했으면 행동을 밀어 붙여야는 법. 돌아서기엔 조금 전 노크가 제법 컸다. 칼은 철판을 깔기로 마음먹었다.
똑똑똑.
“이사벨라양. 칼입니다. 일어났습니까?”
처음보다 소리를 키웠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돌아갈까?
‘내키지 않군.’
발길을 돌리기가 싫었다. 잠시 머뭇거렸던 그는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사벨...이사벨라!”
문손잡이가 비정상적으로 찼다. 뒷목덜미를 타고 척추를 따라 얼음이 굴러가듯 쎄한 감각이 흘러내렸다.
보는 자들의 육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힘을 만났을 때 보이는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