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는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녀를 내려 보는 청색 도는 짙은 푸른 눈에 미소가 희미하게 어렸다.
“크라켄이 남아있다면 잡을지도 모르죠. 신수 전쟁 이후 크라켄 목격담은 사라졌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칼의 미소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또래 젊은 남자들은 나사 빠진 마냥 돌아다니는 빌리 할아버지의 주정뱅이 손자와 그 패거리뿐이다.
절제된 삶이 몸에 벤 남자가 보이는 부드러운 모습을 전혀 알 리 없었다.
마부이자 정원사인 뮈레가 수하만 도련님의 변화를 살짝 눈치 챈 정도였다.
“흠, 그렇군요. 그러면 물고기를 잡나요? 바다니까 연어를 잡으려나?”
다시 묻는 이사벨라의 목소리는 김이 빠져있었다.
“상어와 대형 물고기, 고래사냥이 주목적입니다. 바다 대형생물은 숫자가 늘어나는 게 늦는데다 육지동물보다 사냥난이도가 높아 허가가 자주 떨어지지 않는다더군요.”
칼은 얼마 전 전대 메그님 공작 장례식에서 들었던 정보를 풀었다.
고래와 상어는 훌륭한 자원이다. 고기와 내장, 이빨, 뼈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그래서 겨우내 살찌운 고래들이 남하하고, 고래를 피해 도망가는 물고기를 사냥하는 상어가 날뛰는 봄에 맞춰 성년제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년제를 구경할 시간이 날까요?”
“성년제가 끝나기 전 일이 마무리되면 잠시 구경하도록 하지요.”
칼의 대답에 이사벨라의 뺨이 붉어졌다.
“어머나!”
소녀답게 감탄하며 두 손을 맞잡는 모습에 칼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줬다.
‘일을 빨리 끝내야지.’
금화보다 환한 그녀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따분할 게 분명한 성년제 구경도 할 만 하리라.
가한제국 부대사를 만나고, 바로 마수 퇴치 용품을 준비하자. 그리고 마수를 찾아 사냥하는 거다.
빠르게 돌아가던 그의 머리는 마부가 기차표를 전해주면서 멈췄다.
“도련님, 여기 있습니다요.”
레스로마행 표였다. 그것도 전용 짐칸과 응접공간까지 딸린, 기차 1칸을 통으로 쓴다는 특등실 표였다.
“특등실이라고요?”
눈이 휘둥그레진 이사벨라에게 마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성수기라서 일반인은 입석구하기도 힘들다지요. 하지만, 우리 도련님이 누굽니까! 뮈레후작가 후계자입죠! 왕실부터 후작집안까지는 티보크서 보관하는 특별칸을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답니다.”
“물론 유료요.”
칼 데 뮈레가 말을 덧붙였다. 아, 네. 이사벨라는 입을 간신히 움직였다.
‘역시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하구만. 암, 우리 뮈레후작님 가문이 좀 대단한가!’
마부는 어깨에 힘을 줬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마부의 생각과 달랐다.
‘으아! 왕족도 쓴다는 특등칸? 그런데 유료라고라! 이것도 의뢰비에 청구되겠지?’
상인 집안의 핏줄답게 그녀는 급속히 뛰어오르는 게 분명한 청구액에 할 말을 잃은 것이었다.
* * *
“에이, 사람은 많은데 이쁜 처자는 없구만. 죄 늙다리에 칙칙한 남정네뿐이니.”
톡 튀어나온 입을 나불거리는 사내 옆에서 다른 남자가 옆구리를 찔렀다.
“프랭크, 지금 한눈 팔 때가 아니다. 제노렐행 기차가 20분 뒤에 출발이다.”
젊은 남자와 판박이인 얼굴에 얍삽한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의 말에 젊은 쪽이 머리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하이고, 아버지. 걱정 마쇼. 내 수도에 가서 모두가 우리 하벨리 위스키를 다시 찾도록 할 테니.”
“쯧, 가서 여자한테 한 눈 팔지 마라. 네 놈 사업 수완이 좋으니 보내는 거라는 거 명심하고.”
부친의 말을 건성을 듣는 프랭크의 눈에 분홍 코트 차림의 여성이 들어왔다.
“휘익.”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부는 프랭크의 반응에 나이든 하벨리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 저놈 버릇하곤.’
색을 밝히는 아들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쉰 그는 아들이 눈길을 주는 쪽을 보았다.
“허, 뮈레자작이군. 우릴 물 먹인 작자의 장남 아닌가.”
옆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베이지색 오버코트에 반들거리는 검정 실크 모자차림의 남자는 애증의 뮈레 후작가 장남이었다.
“저 자가 뮈레자작이라고요?”
제 아비의 말에 프랭크 하벨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뮈레자작을 처음 보았다. 뮈레가 납품은 제 부친의 몫이었다.
‘욕심 많은 영감 때문에 후작가 정문도 못 밟아봤지.’
제 영역을 뺏길까 아들에게조차 대귀족가 출입을 허락 않던 부친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마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수모를 갚는 방법을 떠올리는 게 힘들었을 거다.
‘저, 저 녀ㄴ.’
자작 쪽으로 고개를 돌린 여자의 옆모습을 보는 순간, 프랭크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욕을 삼켰다. 며칠 전 호텔 식당에서 자신에게 수모를 준 여성이었다.
“그럼 옆에 있는 여자는?”
“약혼녀나 친척이겠지.”
분노를 삭힌 아들의 물음에 하벨리씨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들과 달리 그의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다.
‘흐흥. 그렇단 말이지.’
프랭크의 입가가 비뚜르게 올라갔다. 뮈레경의 반응을 보건데 자작은 여자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남녀관계에 정통한 그의 눈은 항상 옳았다.
‘이거, 잘만하면 저 둘을 제대로 물 먹일 수 있겠어.’
레스로마행 기차 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프랭크는 입술을 핥았다.
* * * 겉가지 1 * * *
“검은 매가 레스로마로 갔군.”
프레데릭 데 뮈레 후작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벗어 쥔 모자와 입고 있는 회색 재킷에 묻은 먼지가 그가 먼 길을 왔음을 알렸다.
“넵. 부의장님. 그러고 첫 후견인은 테슈의 임무 수행을 시작했습니다요.”
남자는 간단히 자신의 여정을 후작에게 고했다.
*
칼 데 뮈레와 이사벨라 칼파르를 배웅한 그는 마차를 몰아 우체국에 들렀다. 레스로마의 프렌시아 대사관에 전보를 보낸 후 테슈로 간 그는 꼬박 하루를 헤맨 뒤 벤자민 k 코흐 박사를 찾았다.
코흐 박사는 썩었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무가 우거진 곳에 쭈그리고 있었다.
“벤자민 K. 코흐 박사님?”
코를 막으며 다가간 남자의 물음에 벤자민이 뒤를 돌아보았다. 손수건으로 코 아래를 동여맨 그가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그렇소만. 학회 사람인가?”
들어 올린 코흐 조교수 손에 번호를 붙인 작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안에는 새까만 뭔가가 들어있었다.
“아닙니다. 데빌헌터클럽회원입지요. 이사벨라 아가씨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요.”
그의 말에 벤자민이 벌떡 일어나다 비명을 질렀다.
“벨이? 어아구구! 다리야!”
장시간 쪼그렸던 다리에 쥐가 나서였다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으면서도 벤자민은 쥐고 있는 병을 놓지 않았다.
“허이쿠! 괜찮으셔?”
남자는 허둥지둥 달려갔다. 괜찮다며 손을 젓는 벤자민과 가까워지자 병 안이 제대로 보였다. 칼로 작게 잘라낸 썩은 나뭇조각이었다.
“이거 나뭇조각이구만요. 연구용 샘플입니까?”
남자의 말에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에 가져가서 현미경으로 봐야 알겠지만, 곰팡이 종류가 나무를 썩힌 것 같군요.”
“희한타. 곰팡이는 죽은 나무 표면이나 낙엽에서 자라지 않습니까요? 이건 안에서부터 썩은 것 같은뎁쇼?”
어? 남자의 물음에 벤자민의 눈이 동그레졌다.
“곰팡이를 좀 압니까?”
“쬐금 압니다요. 본업이 정원사입죠.”
남자의 대답에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병을 조심스레 바닥에 두고 장갑을 벗었다.
“만나서 반갑구려. 정식으로 인사하겠소. 프렌시아 왕립의대의 균학 조교수 벤자민 K. 코흐입니다.”
“뮈레 후작가의 차석 정원사 조엘 빌리입니다요.”
벤자민의 손을 맞잡은 조엘이 대답했다.
* * *
“조엘, 코흐 교수는 나무 전염병 원인을 밝혔나?”
프레드릭 뮈레 후작의 질문에 정원사 빌리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넵. 그리고 원인을 찾았으니 치료법을 찾을 거라 했습니다요.”
* * *
벤자민이 채취한 샘플은 10개가 넘었다.
“샘플은 이만하면 충분히 얻었고, 임시 연구실 거리가 좀 되는데 마차 좀 얻어 탑시다.”
“에. 그라십쇼.”
장갑과 손수건, 작은 칼과 핀셋, 채집병 따위를 천조각에 갈무리해 가져온 가방에 넣은 벤자민은 넉살좋게 마부석 옆에 올랐다.
그는 덜컹대는 마차 위에서 이사벨라의 편지를 읽었다. 5촌 조카의 근황과 계획을 알게 된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펴곤 조엘에게 물었다.
“뮈레후작가에서 일한다고 했죠? 거기 장남되는 자작의 인품이 어떻습니까?”
“좋은 분입죠. 그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냉철하지만 책임감도 크시다우.”
돌직구를 던지는 벤자민의 물음에 조엘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손주까지 본 조엘이다. 그는 벤자민의 걱정을 쉽게 짐작했다.
그러나 그는 적절히 작은 주인을 추켜세우며 벤자민의 걱정을 제법 희석시켰다. 칼 데 뮈레의 평소 행동을 알려주되 이번 임무 중 얼핏 보인 반응을 생략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조카 영애가 강단 있습디다. 웬만한 사내보다 담이 센 듯 합디다요.”
조엘은 이사벨라 칭찬도 빼먹지 않았다. 덕분에 벤자민의 호감을 산 조엘은 숙소에서 벤자민의 연구과정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 * *
“흐음, 역시 같은 감염원이군.”
간이 현미경으로 샘플을 관찰하던 벤자민이 탄식을 뱉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엘은 마른 침만 삼켰다.
‘과학자는 마술사라는 말이 맞구먼!’
조엘에게 벤자민의 행동은 섬세한 묘기였다.
박사의 왼눈은 현미경의 하나뿐인 접안렌즈를, 오른눈은 옆에 펼친 노트를 들여다봤다.
양손도 쉼 없이 움직였다. 왼손은 장비 몸체의 초점조정기와 제물대 위의 샘플을 계속 오갔다. 얇은 유리판에 고정한 샘플 위치가 미세하게 바뀔 때마다 초점 조정기 나사를 살짝살짝 돌리는 모습이란!
이뿐인가.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잡은 오른손은 오른눈동자와 합세해 관찰중인 샘플을 노트 위에 세밀하게 그려냈다.
슥슥.
맨눈으로 보면 검게 썩은 조각이다. 이 부스러기가 확대되어 그려지는 모습은 경이로움 자체였다.
“아무래도 신종 같아.”
스케치를 마친 벤자민이 중얼거리며 현미경에서 눈을 뗐다. 피곤한 지 양 눈을 몇 번 깜박이며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벤자민의 손가락이 스케치를 가리켰다. 제대로 숨도 내쉬지 못하던 조엘은 박사의 물음을 듣고야 그림을 제대로 보았다.
“꼭 마물 같은뎁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