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물이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려.”
조엘의 평가에 벤자민이 동의했다.
‘그것’은 연근처럼 늘어진 뿌리인지 밑둥을 따라 길다란 줄기들이 갈대처럼 솟아 올라있었다. 줄기 끝에는 크로와상 모양의 검은 덩어리가 달려있었다. 일부 덩어리의 중앙은 쩍 벌어져 뿔달린 생물의 입을 연상시켰다.
“죽은 나무속에 있던 생물체입니다. 200배 확대한 거지요.”
모양을 보니 곰팡이같기는 한데, 그런데 이 날씨에 곰팡이 감염이라니. 벤자민은 중얼거리며 노트 앞 장을 넘겼다. 전날 날짜를 서명한 스케치는 이번에 그린 것과 같은 그림이 있었다.
“이상하긴 합니다요. 곰팡이는 장마철이나 날이 푹푹한 때 생기는 놈들 아닙니까요?”
“그렇죠.”
벤자민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쨌든 원인을 찾았으니 치료법을 찾아야하는데, 날이 풀리기 시작해 큰일입니다. 곰팡이는 더워지면 극성이니까요.”
그의 말에 조엘은 끄덕였다. 빨리 치료법을 찾지 못하면 테슈에서 시작된 식물 전염병이 레스로마 동남쪽으로 퍼질지도 모른다.
마차를 타고 올 때 확인했다.
벤자민이 머물고 있는 마을 근방은 죽어가고 있었다. 장작을 가져오는 인근 숲은 물론, 밭에서 올라온 싹도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작물과 나무를 가리지 않고 감염시키는 생물이라니!
‘까딱하단 우리 각하님 영지인 라우터도 큰일 난 턴디!’
조엘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그 앞에서 벤자민이 편지지를 펼쳤다. 간단히 몇 줄을 휘갈긴 그는 스케치한 노트 한 장을 찢었다.
이사벨라가 보낸 편지봉투에서 내용물을 뺀 그는 자신의 노트와 편지를 넣어 밀봉했다.
“조엘씨는 뮈레가로 돌아가신다고 하셨죠? 가는 길에 이 편지를 왕립의과대학에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다시피 여긴 우체국도 멀고, 우체부가 매일 방문하는 곳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와 접선할 전염병학회 직원은 이틀 뒤 옮길 다음 숙소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그라죠.”
조엘은 벤자민의 편지를 받았다. 벤자민은 모르지만, 레비크 병원장은 데빌헌터클럽 정회원이다.
뮈레가에 도착해 집사에게 건네면 바로 병원장에게 편지가 전달될 터였다.
* * *
“그러고보니 자네 손의 편지가 한 통이 아니군,”
프레데릭 데 뮈레 후작의 말에 조엘이 공손히 답했다.
“넵, 각하. 도련님의 편지와 칼파르 아가씨가 펜섬 후작각하께 보내는 편지, 그리고 벤자민 교수가 레비크 병원장님께 드리는 편지까지 세 통입니다요.”
후작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눈꼬리가 올라갔다.
“펜섬 후작각하가 칼파르 아가씨에게 진행상황을 알려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고용주의 표정변화를 눈치챈 조엘이 말을 이었다.
조엘 빌리는 뮈레가의 충실한 고용인이자, 합리적인 클럽맴버답게 데빌헌터클럽과 관계된 모든 편지를 가지고 귀가했다. 우체국보다 내막을 아는 인편이 안전하고 빠른 법이다.
“칼파르양 편지는 내가 전해주지. 자네는 집사에게 교수 편지를 건네주게.”
“넵, 각하.”
고개를 숙인 조엘에게 후작이 말했다.
“그리고 집사가 구근을 구해놓았으니 걱정 말고 마님에게 출장보고를 하게. 조엘, 수고했네.”
정원사인 조엘은 클럽 업무를 할 때마다 출장을 잡아 나갔다. 새로운 화초를 구한다거나, 원예법을 배운다는 등의 이유가 그것이었다.
정원에 욕심 많은 후작 부인은 그 출장에 아무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번 경우도 수입 뿌리 화초 구입이 공식적인 외부 업무였다.
‘그나저나 헨리가 관심을 보이다니, 놀랄 일이군. 일과 이사벨라, 어느 쪽일까.’
뮈레후작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조엘이 두고 간 편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헨리 이름이 수신인 자리에 적힌 봉투였다.
‘필체도 괜찮군.’
성격만큼 매력적인 이사벨라의 필체였다.
헨리 데 헨섬은 헨섬가의 차남이었다. 10년 전 수도를 뒤흔든 사건으로 부모와 형 부부를 잃고 후작이 된 그는 어떤 여성에게도 이성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헨리라도 생각이 바뀌면 좋지. 헨섬가는 손이 아주 귀하니.’
헨섬가 직계는 헨리와 그의 형이 남긴 10살짜리 딸 뿐이다. 젠트리 가문이긴 해도 칼파르는 오래된 가문이다.
거기다 이사벨라는 데빌헌터클럽에 호의적이었다. 클럽 정체를 아는 안주인은 최고의 배우자감이다.
클럽의 기대주 두 명 중 한명이라도 결혼한다면 얼마나 경사일꼬. 후작은 아들의 편지를 뜯었다.
“허어?”
편지를 펼친 뮈레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차에서 썼는지 필체가 엉망 이었다.
‘급했나 보군.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빌리에게 건넨 모양인데. 음?’
아들 특유의 딱딱한 문체는 그대로였지만, 내용이 길었다. 일을 마치고 레스로마 구경을 조금 하고 오겠다는 말이 쓰잘데기 없이 구구절절했다.
“이거, 칼이 봄바람을 맞았군.”
뮈레후작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 * 4. 두 번째 단서 * * *
릴스난 산맥은 크고 험준하다.
대륙 끄트머리에 붙어 레스로마와 다른 16개국을 분리시킨 이 산맥은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사냥꾼이나 외교관, 무역상정도나 넘나 들만큼 대륙인들의 왕래 제한에 공헌했다.
대륙횡단철도는 보름이상 걸리던 산맥 넘기를 하루로 줄였다.
“감동이에요. 녹지 않는 눈을 실제로 보다니. 아침 햇볕에 빛나는 모습이 얼음보석 같아요. 글은 저 아름다움을 반도 담아내지 못하는군요.”
이사벨라는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차는 산맥의 수백 개 산 중 경사가 완만한 티렐산을 굽이굽이 돌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밤새 산을 올라가 새벽녘에 정상에 도착한 기차는 잠시 멈춰서 짧은 경적을 몇 번 울렸는데 부지런한 승객들이 산 정상 경치를 보라는 배려였다.
기적소리에 눈을 뜬 칼이 이사벨라를 깨워준 덕분에 그녀는 설경을 볼 수 있었다.
티렐산은 만년설이 쌓일 만큼 높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에 만년설이 쌓인 산이 주변에 제법 있었다.
“학자들은 산머리를 덮은 저 눈이 최소 천년은 녹지 않았을 거라 추측합니다. 마수를 피해 도망가는 핏줄을 보호하려 목숨과 바꿔 눈보라를 일으켰다는 눈할미 전설을 알고 있습니까?”
“어머, 굉장히 유명한 전래동화잖아요.”
칼의 물음에 이사벨라가 맞장구쳤다.
황룡과 불새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 이디카 대륙은 어디선가 나타난 마수들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산할미 전설은 그 때가 배경인 전설이다. 산세 험한 산자락에 살던 일가족이 마수를 피해 산을 넘게 되었다. 늙고 병들었던 할머니는 자신을 두고 가라고 가족을 떠민다.
‘신이여, 제 목숨을 바치니 가족을 지킬 힘을 주소서!’
할머니는 마지막 기력을 짜내 신에게 기도한다. 가까이 온 마수의 악취에 숨이 멎을 때까지.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다. 가족이 산 정상을 넘어간 뒤 강한 눈보라가 산 윗자락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여름이 순식간에 겨울로 바뀌면서 산을 오르던 마수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때 시작된 눈보라는 지금까지 산 정상에 내리며 얼어붙은 마수들을 감시한다고 한다.
“전설을 추적한 민속학자 그룹이 레스로마 변경에서 산할미 전설의 원형설화를 찾았다고 하지요.”
칼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이야기했다.
기차가 넘어가고 있는 티렐산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는 산이 전설의 진원이었다. 만년설이 휘몰아치는 산등성이에 즐비한 기암괴석들이 전설을 뒷받침했다.
이 보고는 이미 몇 년 전 대륙 구전문학학회에서 발표된 내용이었지만, 대중에게까지 알려지진 않았다.
이사벨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가족 사랑을 강조하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산할미 전설이았다. 이사벨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모든 할머니는 대단한 분이군요.”
고향 문타시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할머니를 떠올리는 걸까. 이사벨라의 표정에 칼은 심장 부근이 아릿하며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니, 왜 계속 피부 안쪽이 간지럽지?’
그녀를 볼 때, 이야기할 때, 심지어 그녀를 생각할 때조차 몸이 제 멋대로 반응한다. 전날 밤도 그랬다. 칸막이로 나뉜 옆 침대의 그녀 때문에 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잠시 숨을 가다듬던 칼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를 가져올 건데 이사벨라양도 마시고 싶은 게 있습니까?”
“음, 따뜻한 홍차를 두고 경치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홍차를 주문하도록 하지요.”
귀빈전용인 특등칸은 기본적으로 승객일행만 탄다. 객차 한량인 특등칸 내부는 작은 응접실과 식당, 휴게실, 침실에 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다.
귀빈용인만큼 시종단과 호위인력이 같이 타는 게 일반적이지만, 급하게 대여한 만큼 객차 안에는 두 사람만 있었다.
‘이거 필요할 때마다 일일이 나가야다니 귀찮군.’
열차 출발 전, 기관장에게 특등칸 안으로 사람을 보내지 말라 말한 게 이리 불편할 줄 몰랐다.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나갈 테니 객차 연결통로 뒤의 직원 대기석에 승무원이나 한명 배치해 주시오.”
덕분에 이렇게 싱숭생숭할 때마다 자리를 비우는 건 자연스러웠다. 불편하지만 방해받지 않는 건 좋다니. 모순되는 감정에 칼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특등객차 문을 열고 나간 칼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뭔가?”
객차 연결통로 앞에서 웨이터가 승무원과 실랑이 중이였다.
“아, 각하. 이 자가 들어가려고 해서 막고 있었습니다.”
“기적 소리에 기침하셨으면 시장하실 것 같아 주방장님 명으로 간단한 다과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웨이터는 억울한 얼굴로 칼에게 말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그의 앞에는 다과와 차를 담은 서빙 카트가 있었다.
“주방장의 지시를 받았다고?”
칼의 되물음에 웨이터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빈이니 최고의 예우를 하라는 차장님의 주문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승무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은 손을 들어 승무원의 뒷말을 막았다. 그는 냉랭한 어조로 승무원에게 말했다.
“이 자가 열차 근무자가 맞는 지 확인해보도록.”
그 말에 웨이터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카트에 손을 여전히 올린 채로 그는 칼에게 물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각하”
“각하의 지시가 있기 전까진 어떤 서비스도 하지 못하게 되어있지.”
칼 옆에서 승무원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쳇, 그 말을 들은 웨이터가 서빙 카트를 두 사람에게 밀었다.
드르륵. 덜거덕. 촤라라.
“허이쿠!”
각설탕과 과자가 서빙판 위를 구르고 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출렁였다.
타다닥! 승무원과 칼이 반사적으로 카트를 잡는 사이 웨이터는 몸을 돌려 객차 안으로 뛰어갔다.
“저, 저 놈이!”
카트를 고정한 승무원이 수상한 웨이터를 뒤쫓으려 몸을 틀었다.
“쫓아가봤자 소용없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