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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레이디
작가 : 커피새
작품등록일 : 2017.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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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 번째 단서 (2)
작성일 : 17-07-31     조회 : 249     추천 : 0     분량 : 5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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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햇살에 빛나는 사파이어 은반지가 오른손 중지에서 반짝였다.

 

  체스터 가는 프렌시아의 3파수꾼 가문이다. 듀겔린 데 체스터 대사는 현 체스터 후작의 동생이며, 대사 부인은 프레드릭 데 뮈레 후작의 오촌 조카였다.

  칼 데 뮈레의 육촌 누나인 그녀는 칼의 첫 단독 임무가 검은 매 의뢰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나저나 시간이 촉박해 새로 단장할 여유가 없군요. 화장만 살짝 고쳐야겠네요.”

 

  숙녀는 시간별로 옷을 갈아입는 법이다. 외출복에 모자나 코트, 장갑 정도는 갈아입는 게 당연했다. 안타까워하는 대사부인에게 이사벨라가 작게 미소 지었다.

 

  “급히 출발하느라 옷을 많이 챙겨오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있었어도 의상 선택 폭이 없었을 거예요.”

 

  그녀가 입은 외출복은 이틀 전 기차를 탈 때 입었던 옷이었다. 호텔까지 바리바리 싸왔던 짐 대부분은 벤자민 당숙부 집으로 다시 보냈다.

  모자와 외투를 두 개씩밖에 가져오지 못했다는 이사벨라의 고백에 대사 부인이 가볍게 웃었다.

 

  “오호호, 의뢰가 끝나면 귀국 전에 가벼운 쇼핑도 괜찮겠네요. 열차 덕분에 대륙 유행의상이 레스로마에도 제때 들어오고 있답니다.”

 

  게다가 지금은 레스로마의 수도, 레로마의 모든 의상실의 숙녀복이 할인 중이었다.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는 레스로마 성년식은 남녀 모두 사냥복을 입는다.

  그래서 여성복 제작자들은 성년식 전후 한 달간 할인 행사를 했다.

 

  “와! 정말 멋진데요!”

 

  이사벨라는 양 손을 맞잡으며 눈을 빛냈다.

 

  ‘여기 은행에서도 예금을 찾을 수 있겠지? 벤자민 숙부님이 주신 알바비가 제법 되는데.’

 

  프렌시아보다 저렴한 가격에 동급의 옷을 맞출 수 있다니, 귀국 전에 꼭 평상복 한 벌이라도 맞추리라. 이사벨라는 다짐했다.

 

  대사관저 메이드의 도움을 받아 화장을 급히 손본 이사벨라는 11시 20분에 현관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지금 나가도 좀 막힐 겁니다.”

 

  듀겔린 대사의 충고가 맞았다. 마차가 큰 길로 들어서자 바로 속도가 줄었다.

 

  “벌써 축제 분위기로군.”

 

  칼의 중얼거림대로 였다. 거리는 흥분한 사람들의 함성과 움직임으로 시끌시끌했다.

 

  “호외요! 호외! 폐하의 개회사가 레로마항 황실부두로 바뀌었소! 시청이 아니외다!”

 

  “오늘 밤 8시! 폐하의 개회사는 레로마항 황실부두!”

 

  호외를 외치며 달리는 신문팔이 소년들의 함성 사이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외침이 섞여 있었다.

 

  “오늘 정오부터 2주간 판매하는 성년정식세트가 백동화 2닢!”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살촉을!”

 

  “켈빈! 여기야!”

 

  일행을 부르는 젊은이들의 고함까지, 저녁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성년식을 치르는 레로마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대단해요. 온 도시에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어! 제노렐과 완전 다른 분위기네요!”

 

  창밖을 살짝 내다본 이사벨라의 눈이 빛났다.

 

  ‘그대가 가장 생기 넘치는데.’

 

  칼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옆얼굴만 살짝 봐도 알 수 있었다. 반짝이는 연두색 눈동자와 뺨에 오른 홍조, 위로 올라간 입매는 마차 밖 군중이 뿜는 흥분과 설렘보다 밝고 찬란했다.

  봄처럼 환한 얼굴을 보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화사한 분홍 코트가 그리는 가슴의 굴곡에 눈이 간 순간 칼은 눈을 감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몸 중심이 홧홧했다. 며칠 전 아침 일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심호흡! 심호흡!’

 

  그런 그의 고민을 알 리 없는 이사벨라는 해맑게 바깥 구경을 했다.

 

  “와! 정말 레로마는 항구도시구나. 바람에서 짠 내가 나!”

 

 

 * * *

  마차는 12시 40분 경 가한제국 대사관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밀리지 않았다. 다른 마부들의 양보를 받는 프렌시아 국기 인장이 찍힌 대사관 마차를 타서였다. 일반 마차라면 1시까지 도착하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칼 데 뮈레 자작과 이사벨라 칼파르양 되십니까?”

 

  대사관 현관 앞에 나와 있던 직원이 대륙 공용어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맞소.”

 

  칼의 대답에 직원이 공손이 대답했다.

 

  “운비해랑 부대사님의 집무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드시지요.”

  부대사의 집무실은 2층이었다. 집무실 문은 한눈에 봐도 묵직한 나무였는데, 지나면서 본 다른 방문보다 훨씬 두꺼워 보였다.

 

  “이 문만 겨울이군요.”

 

  이사벨라의 중얼거림에 직원이 말했다.

 

  “부대사님은 예민하십니다. 이 문은, 부대사님이 발령받아 오실 때 제국에서 하사한 겁니다.”

 

  그의 설명에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문이 새 것이라 싶었네.”

 

  칼의 말이 맞았다. 부대사의 집무실 문은 고풍스러운 대사관과 달리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직원이 문손잡이 위의 놋쇠 고리를 잡아 문에 부딪쳤다. 쿵쿵쿵. 놋쇠 고리의 울림이 묵직했다.

 

  “프렌시아 왕국의 귀빈이 도착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안에서 누군가 말했다.

 

  “들라 하시랍니다.”

 

  제법 크게 외친 직원과 달리 작고 희미한 음성이었다. 아니, 꽤 먼 거리에서 말한 듯 원근감이 느껴졌다.

 

  ‘문이 두꺼워서 그런가. 방음도 잘 되는 것 같아.’

 

  속으로 생각하는 이사벨라의 앞에서 직원이 문을 열었다. 밖으로 여는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나오는 모습이 문을 여는 데도 힘이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드십시오.”

 

  문 안에는 두 번째 입구가 있었다. 문과 문 사이 작은 공간을 두고 만든 실내 문은 커튼이 쳐진 입구였다.

 

  “가한제국은 고위직일수록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비서나 시종을 거쳐 만나게 되어있죠.”

 

  “아하.”

 

  칼이 이사벨라 귀에 대고 작게 알려주었다.

 

  ‘참 비효율적이야, 누군가를 만날 때 시간이 그만큼 지체되잖아.’

 

  이사벨라는 자신들을 맞이하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는 실내 문 앞의 작은 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비서 김홍차입니다. 부대사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으로부터 두 사람을 인계받은 비서, 김홍차가 커튼을 잡아 젖혔다.

 

  “운비해랑 부대사님, 프렌시아 왕국의 칼 데 뮈레자작 일행입니다.”

 

  안쪽을 향해 말을 한 비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멀뚱히 서 있는 칼과 이사벨라를 향했다.

 

  “들어가십시오.”

 

  “음, 알았네.”

 

 

  약간 당황한 칼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는 이사벨라를 에스코트해서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은 어두웠다. 책상과 접견용 테이블 세트가 벽을 시원하게 자른 듯 커다란 창문을 보게 배치했으나 그 창의 절반 이상이 두터운 커튼으로 가려져있었다.

  부대사는 커튼 앞에 뒷짐을 쥐고 서있었다. 칼만큼 큰 키에 머리까지 가리는 독특한 가한 의상을 걸친 채였다.

  뚜벅뚜벅, 또각또각.

  두 사람의 발소리에 남자가 천천히 뒤 돌아봤다. 얼굴 반을 차지한 커다란 두 눈에 졸음이 살짝 어려 있었다.

 

  “만나서 반갑소. 운비해랑이외다.”

 

  볼을 덮은 잔 깃털 아래 뾰족한 부리가 열렸다 닫혔다. 대대로 가한 황실 수호대인 운비가는 조인족이었다.

 * * * * *

  이사벨라의 저주에 관한 칼의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짧았다.

 

  “그러니까 뮈레자작은 이사벨라 칼파르 낭자의 모친에 대한 해답을 찾으러 여기 온 거구려.”

 

  진하게 우린 커피를 세 잔째 홀짝이며 운비해랑 부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잠겨있던 검은 눈동자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점점 생기가 돌더니 이제 흑요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부대사님은 제 부모님의 증인이셨던 운비백풍님과 어떤 사이신지요?”

 

  이사벨라의 질문에 운비해랑이 눈동자를 돌렸다.

  데구르르. 올빼미 눈동자라니, 진짜 밤을 지배하는 새를 연상시키는 얼굴이었다.

 

  “운비백풍님은 본인의 조부이외다. 그리고 운비가의 현 가주이오.”

 

  “와아.”

 

  작게 감탄사를 낸 그녀 옆에서 칼이 질문했다.

 

  “운비백풍님도 과거에 레스로마에 발령받으셨소?”

 

  “그렇다오. 운비가의 차기 가주 후보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해외에서 십년 이상 보내야 한다오. 여기에 운비가주는 황룡의 발톱을 지휘하는 별운검을 겸하오. 소신 역시 황제폐하의 성은을 받잡아 올 초 레스로마 부대사로 부임 받았소.”

 

  ‘그러니까 본인이 잘났다 이거잖아.’

 

  속으로 생각하는 이사벨라 옆에서 칼이 되물었다.

 

  “가까운 프렌시아를 두고 대륙에서 가장 외진 레스로마를 택한 이유라도 있으신지?”

 

  그래. 프렌시아에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돈을 뿌리며 국경을 넘지 않았어도 되잖아.

  이사벨라는 칼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에서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을 가진 나라가 레스로마 밖에 없지 않소이까.”

 

  그 말이 맞았다. 대륙 최고봉을 낀 릴스난 산맥과 이디카 대륙을 둘러싼 바다를 가진 나라는 레스로마가 유일했다.

 

  “그 덕에 두 사람은 보다 긴 시간 같이 있게 되지 않았소?”

 

  “크헙!”

 

  “네?”

 

  이 올빼미 얼굴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운비해랑의 다음 말에 칼은 입에 막 가져다 물었던 쿠키를 내뿜었다. 이사벨라의 두 눈이 찻잔만큼 동그래졌다.

  “두 사람, 연모하는 사이 아니오?”

 

  정색한 이사벨라의 표정과 칼의 반응에 운비해랑의 오른쪽 눈이 샐쭉 올라갔다.

 

  “부대사님, 성년식을 맞지도 않은 제 혼삿길을 막으시려는가요?”

 

  “공,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구려.”

 

  이사벨라의 항의와 뒤이은 칼의 냉소에 운비해랑이 머리를 살짝 갸웃거렸다. 커다란 눈동자가 데구르르 구르며 두 사람을 훑었다.

 

  “실수라면 사과하리다.”

 

  운비해랑의 목소리에 유감스러움은 없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콩닥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찻잔을 잡았다.

 

  ‘눈이 커서 그런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마수에게 다시 잡힐 뻔 했던 며칠 전 새벽 악몽을 칼이 깨워준 뒤 부터였던가. 칼을 제대로 보는 게 힘들었다.

  그를 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두근거리고 기분이 붕 뜨는 경우가 많았다.

 

  ‘이게 연모라는 거겠지. 하지만, 자작님은 나를 의뢰인 이상으로 보지는 안을 거야.’

 

  첫 만남부터 이사벨라의 주먹을 맞았다. 테슈의 여관에서 자신을 깨울 때도 몸을 뒤로 빼서 사정거리를 벗어나지 않았던가.

  속이 답답해진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운비해랑을 보았다.

 

  “부대사님, 운비가와 제 모친은 어떤 관계인지요?”

 

  “허어, 낭자는 보기와 달리 성격이 급하시구려.”

 

  운비해랑의 대답에 칼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입가를 닦은 냅킨을 테이블 위로 던지다시피 놓으며 이사벨라를 두둔했다.

 

  “이사벨라 칼파르양의 저주는 당사자의 혈연을 따라 이어진 강한 집념이오. 그리고 아마도, 저주를 피해 자신을 감추고 혼인했을 선대의 혼인 증인을 설 정도면 운비가가 릴리안 칼파르와 막연한 사이라는 건 금방 유추할 수 있지 않소?”

 

  “맞아요.”

 

  시원시원한 칼의 지적에 이사벨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장단을 들은 운비해랑이 머리를 살짝 움직였다.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러운 동작이었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다시 데구르르 구르더니 이사벨라를 향했다.

 

  “이사벨라 낭자, 어머님을 얼마나 알고 있소?”

 

  “거의 알지 못해요. 제가 2살 때 돌아가셨거든요. 아버님도 제가 10살 되던 해 신대륙에서 돌아가셨죠.”

 

  그녀의 대답에 운비해랑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춘부장이 계셨으면 같이 움직였겠지. 그럼 모친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겠구려.”

 

  “저보다 짙은 녹색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셨던 건 압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목으로 손을 올렸다. 장갑을 낀 채 손가락을 움직이니 시간이 좀 걸렸다.

  마주한 올빼미 얼굴의 뽀죡한 부리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할 때 그녀는 목걸이를 빼냈다.

 

  “어머님이 받은 혼인선물입니다. 운비백풍님이 주셨죠.”

 

  그녀가 내민 줄에 달린 수정을 본 운비해랑의 양 눈이 올라갔다. 얼굴의 잔 깃털이 부스스 일어났다. 머리깃털이 쫑긋 일어나며 후드가 벗겨졌다.

 

  “중요한 것이오?”

 

  그의 반응에 칼이 물었다. 갈색과 검은색이 섞인 깃털 얼굴이 이사벨라 대신 대답했다.

 

  “조부님의 부리수염털이오.”

 

  은줄에 걸린 수정알 안에는 회색 줄무늬가 촘촘한 작은 깃털이 들어있었다.

  수정을 보던 운비해랑의 커다란 눈동자가 두 사람을 향했다. 한 눈이 이사벨라를, 다른 눈동자가 칼을 보았다.

 

  “그리고 가주의 이름으로 우리 가문의 신의를 보장한 맹약의 증표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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