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가주가 된 운비백풍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1년 정도 유람을 했다고 한다. 릴리안과 윌리엄 주니어 칼파르의 결혼 증인은 그 기간에 겪은 일이었다.
맹약의 증표는 당대의 가주가 단 2개만 만들 수 있는 귀물이다. 결혼 증인을 설 때 가주 신분이었던 운비백풍은 이 귀물 중 하나를 릴리안에게 줌으로써 가문의 지원을 약속했었다.
운비가의 맹약은 당사자의 핏줄이 기억하는 한 유효하다.
“그럼 부대사님은 싫어도 저희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푸셔야 되는군요.”
이사벨라의 말에 운비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약의 증표가 없어도 황룡의 맹약을 잇는 자로서 도움을 주려 하긴 헸소. 허나,”
잠시 말을 멈춘 운비해랑이 이사벨라를 지긋이 쳐다봤다.
“운비가의 맹약의 증표는 증표를 가진 자가 원하는 만큼의 지원을 약속하지. 낭자는 어디까지 원하오?”
“최대한의 지원을 원합니다.”
이사벨라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얼굴의 반을 덮은 커다란 눈동자에 가득한 호의와 호기심이 부담스러웠다.
“호오, 알았소.”
그녀의 대답에 운비해랑의 부리 끝 깃털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저 올빼미 머리가! 목소리에 흥분이 섞인 것 같은데?’
칼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려는 찰나였다. 운비해랑이 부리를 다시 달싹였다.
“우선 낭자의 모친부터 알아봐야겠구려.”
“네?”
“허어?”
칼과 이사벨라는 당황했다. 릴리안의 혼인선물로 가주의 맹약을 준 운비백풍이다.
“운비가와 어머니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 건가요?”
“아니면 운비백풍님 개인적으로 칼파르양의 모친과 친분이 있었던 거요?”
두 사람의 물음에 운비해랑이 한 손을 들었다. 뾰족한 손톱이 위협적인 네 개의 손가락이 쫙 펼쳐졌다. 풍성한 깃털은 옷소매 안의 손목 위부터 덮여있어서 맹금류의 손은 적나라헤게 드러났다.
‘히엑!’
맹수다! 순간 움찔한 이사벨라의 몸에 소름이 잠시 돋았다. 그녀의 반응에 운비해랑의 동공이 살짝 좁아졌다 돌아왔다.
“진정하시오. 칼파르 부인과 운비가의 연은 오래되지 않은데다 비밀스런 사이요. 이 자리에서 그 연유를 알게 된 모종의 이유 때문이지.”
“가문의 맹약.”
칼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운비해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가 보장하는 가문의 맹약은 한 가문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소. 더군다나 조부님은 남은 맹약 하나를 가주 후보들에게 거셨지.”
운비해랑의 설명에 의하면 현 운비가 가주 운비백풍은 이 일을 대비한 듯 했다.
운비해랑이 10살 되던 해, 차기와 차차기 가주 후보 일곱이 가주에게 불려갔다.
* * *
“너희 중 한명은 내 뒤를 이을 것이고, 남은 자들은 가문의 구심점이 될 것이다. 이제 내가 하는 말은 이 방을 나서는 순간 가슴 속에 묻어야 한다. 지킬 자신이 없는 자는 지금 나가거라.”
어린 운비해랑은 멀뚱히 서 있었다. 아버지와 숙부들, 사촌과 육촌형님도 마찬가지였다.
엄숙함을 담은 운비백풍의 눈동자가 그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그럼 모두 지키겠느냐.”
“예, 가주님.”
“네, 할아, 아니 가주님.”
자손들의 대답에 운비백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흐뭇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십년 전 나는 가문의 이름으로 맹약을 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내 두 번째 가문의 맹약을 하겠다.”
일곱 쌍 눈동자에 놀라움과 경악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도 질문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가한황제를 받들며 700년간 황룡의 발톱을 지휘한 운비가주의 무게는 그렇게 무거운 것이었다.
운비백풍은 가슴의 브로치를 뗐다. 투명한 수정안에 자신의 수염부리털이 들어간 브로치였다.
“이것과 같은 증표를 가지고 운비가에 도움을 청하러 오는 자가 있으면 당대 가주, 혹은 차기 가주로서 성심껏 도울 것을 명한다.”
“그자가 누구라도 상관없습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운비백풍이 미소 지었다.
“아니, 칼파르라는 성을 가진 자에 한한다. 만약, 내가 맹약한 이가 세상을 떠났고, 그 흔적을 따라와 도움을 청하는 이가 있다면 먼저......”
* * *
“먼저 가장 가까운 대도서관에 가서 책 한권을 찾아야 하오.”
눈을 살짝 감고 과거를 더듬어 꺼낸 운비해랑의 말에 이사벨라가 작게 헛기침 했다.
“흠흠, 저, 부대사님?”
운비해랑이 눈을 천천히 떴다. 그는 제 조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부리수염깃에 손을 올리고 이사벨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책이라니 당황스럽긴 한데 도서관까지 가아하다니요. 혹여 대사관에 비치되지 않은 책인가요?”
“흠, 대사관에 구비해놓기엔 활용도가 떨어지는데다 부피가 좀 있다오. 가격도 만만찮지, 개인적으로나 공식적으로 비치하기엔 부담되는 책이오.”
수염깃을 쓰다듬으며 답하는 그의 말에 칼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대도서관으로 가야겠군. 운비공,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오?”
“레로마시립 도서관이지. 이곳에서 도보로 20분이면 갈 정도로 지척이라오.”
* * *
레로마시립 도서관은 거대했다.
‘와!’
그녀의 눈은 쉬지 않고 도서관을 훑었다. 문타시는 도서관이 없다. 문타시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한 가문은 웬틸 백작가다.
어린 시절 조부를 따라 방문했던 그녀는 방을 가득 채운 백작가의 개인 서재에 압도당했었다. 그런데 이곳은 백작가 서재와 비교하는 게 모욕일 만큼 책이 많았다.
‘굉장해! 웬틸가 전체를 책으로 채운 것 같아.’
“대학 도서관은 더욱 크다오.”
운비해랑의 설명에 이사벨라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대학은 여자가 들어갈 수 없는 걸요.”
왕립 프렌시아 대학만 해도 그렇다. 기숙사 청소나 주방, 세탁직 직원이 아닌 이상, 여성은 대학에 발을 딛을 수 없다.
“그랬지. 하지만 이 나라, 레스로마 왕립대학은 이제 여자도 출입 가능하다오.”
“그러고 보니 올해 9월에 첫 여학생 입학이 있다고 하던데.”
운비해랑과 칼의 부연설명에 이사벨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그 소문이 사실인가요?”
목소리가 너무 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책을 정리하던 사서가 고개를 들어 셋을 쳐다봤다.
“헙! 실례.”
황급히 입을 다물며 작게 사과한 이사벨라에게 운비해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성년식이라 우리밖에 없는 게 다행이군.”
그 말대로다. 인파가 넘치는 밖과 달리 시립 도서관은 한산했다. 사서 몇 명 외엔 사람이 없었다. 창구에서 책을 기다리는 대기인도 이사벨라 일행뿐이었다.
덕분에 칼은 작은 목소리로 이사벨라에게 자신이 아는 걸 이야기했다.
“운비공 말대로 9월 신학기가 되면 레스로마 왕립대학에 여학생이 입학합니다. 입학 연유가 꽤나 복잡하긴 한데, 왕실이 인가한 정식 입학이라 수업만 잘 따라가면 졸업도 가능하죠.”
“와, 부럽다.”
이사벨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나라 대학도 여학생을 받아주면 좋을 텐데.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그녀의 말에 칼의 속이 약간 울컥했다.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는 이 시대는 지식이 힘이지, 재능이 있으면 서민 남성도 교육받는 세상이다. 여성도 남자와 같은 고등 교육을 받는다면 세계의 변화가 더 극적이지 않을까.’
대학문이 여성에게도 열려있다면 최소한 이사벨라와 이야기 나눌 공통 화젯거리는 더 있을 거다.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까? 아니면 화제를 돌릴까? 목 언저리에서 맴도는 말을 고르는 칼의 뒤에서 사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비해랑 부대사님, 주문하신 책입니다.”
나이 지긋한 중년남자의 말에 칼과 이사벨라는 고개를 들었다.
“수고했네.”
두 사람의 모습을 커다란 눈으로 관찰하던 운비해랑이 우아하게 팔을 들어 책을 받았다.
책은 두터운 양장본이었다. 화려한 금박 제목이 선명했다. 이디프니카 출판사에서 5년 전 칼라인쇄로 재 발행한, [이디카 대륙 생물도감의 식물편 제3권].
“도감?”
“내 조부는 말장난을 좋아하신다오.”
칼의 물음에 운비해랑이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책 뒤의 색인편을 펼쳤다. 이사벨라와 칼은 그런 운비해랑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어디보자. 더 넘겨서, 리을, 리을, 음. 여기 있다.”
갈색과 검은색이 섞인 커다란 깃털 손가락이 글자 하나를 짚었다. 이사벨라는 눈썹을 찌푸렸다.
‘안보여!’
넓적한 깃털이 글자를 가렸다. 릴ㄹ. 뭐지? 깃털 좀 내려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순간, 운비해랑이 도감을 앞으로 넘겼다. 펄럭펄럭.
“이거로군.”
깃털 손이 213쪽을 짚었다.
“아!”
이사벨라와 칼이 동시에 작은 신음을 냈다. 운비해랑의 손이 짚은 건 처음 보는 나무 소개란이었다.
호리호리한 몸체에 가느다란 가지, 그리고 반투명한 잎사귀 사이사이에 조그만 푸른 점이 달린 나무,
릴리안 푸른눈꽃나무[Lillan Ninguisver viridissimi ]
20년 전 윌리엄 주니어 칼파르가 릴스난 산맥에서 발견한 신종이었다.
“낭자의 춘부장은 낭만적인 자였군. 모친 이름을 영원히 남기다니.”
운비해랑의 말에 이사벨라의 눈자위가 촉촉해졌다. 부친의 서명이 들어간 릴리안 푸른눈꽃나무의 그림을 보니 부친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햇볕에 빛바랜 갈색머리와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 옅은 콧수염을 기른 아버지가 어린 그녀를 안아 올리던 기억.
“릴스난 산맥의 특정 지대에서만 발견되는 나무라니. 그럼 운비백봉님이 알려주고자 하신 건 다음 단서인가?”
그녀의 기분을 돌린 건 칼의 지적이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운비해랑과 책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렇소. 당사자의 흔적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다면 이야기의 시작점을 찾으라고 하셨지.”
“시작점이라니 무슨 뜻이오?”
칼의 되물음에 운비해랑이 혀를 쯧 찼다.
“뮈레자작은 보기보다 둔하구려,”
칼의 진청색 눈동자가 칼날처럼 예리하게 반짝였다.
“마음가짐이 눈 크기에 한참 못 미치는 자에게 들을 말은 아니오.”
칼의 반격을 받은 운비해랑의 눈매가 올라갔다. 부리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둘의 기 싸움은 주변이 서늘해질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흐음,’
이사벨라는 두 남자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를 살짝 갸우뚱 기울이는 것만으로 리본 풍성한 모자가 두 남자의 시야를 가렸다.
“소녀, 아직 미성년인 저를 도와주실 수 있는 단 두 분이 벌일 대치가 두렵습니다. 눈가의 힘을 이제 푸시는 게 어떻겠사와요?”
뜬금없이 가녀린 소녀가 된 이사벨라의 청에 칼과 운비해랑은 머쓱해졌다.
“평소답지 않, 아니, 흠흠. 실례했소.”
“이거 실례했구려. 아.직. 소.녀. 앞에서 이런 추태를.”
입 밖으로 진실을 말할 뻔 했던 칼은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졸지에 소녀 앞에서 유치한 대치의 제공자가 될 뻔한 운비해랑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말한 시작점은 낭자의 부모님이 만난 곳이오. 거기에 이 나무가 있을 거요. 내 조부는 나무가 있는 곳을 찾으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라 하셨지.”
운비해랑은 어색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그 말인 즉, 이사벨라양 부모님이 만난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거군. 운비공.”
말을 완전히 놓은 칼의 반응에 운비해랑의 부리가 몇 번 달싹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가한제국어로 잠시 옹알거린 그가 이사벨라를 흘긋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뮈레자작.”
분위기가 다시 살벌해질까 양 쪽을 번갈아보는 이사벨라를 보며 칼과 운비해랑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뜻을 같이 하면 친구가 되는 법이죠.”
“그렇지. 우린 이제 친구지, 사내는 결심을 하면 무릇 밀고 나가는 법이라오.”
칼의 미소와 운비해랑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였다. 이사벨라는 두 남자의 말이 치기어린 발언인지, 진심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음, 두 분이 친우의 정을 맺기로 하신 듯 하니 기쁘네요.”
그러나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두 번째 단서 때문에 벌써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설마 거기서도 다음 단서를 발견하는 건 아니겠지?’
예상보다 복잡한 어머니의 과거다. 복잡한 속내를 숨기고 두 남자에게 살짝 미소 지은 이사벨라는 입을 열었다.
“그럼 언제 출발하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