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출발은 못하오. 아무래도 기찻길이 아닌 지역이라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 한다오. 그나저나 낭자, 여행복은 있소?”
운비해랑의 대답에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설마 지금 입은 그런 종류는 아니겠지? 길이 없는 릴스난 산맥은 무척 험하다오.”
운비해랑의 지적에 이사벨라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들었다. 그녀가 챙겨온 여행복은 마차나 기차여행에 어울리는 숙녀용 의상이었다.
“자작님. 저 아무래도 옷을 맞춰야할 것 같아요.”
이사벨라는 머뭇거리며 칼을 보았다. 그새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던 칼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어차피 저도 이런저런 물품을 구해야 하니 시간이 필요합니다. 옷이야 웃돈을 주면 빨리 맞출 수 있겠지요.”
칼의 대답에 이사벨라는 안심했다.
‘다행이다. 옷 때문에 일정이 많이 연기될까 걱정되었는데.’
그런 그녀 뒤에서 운비해랑이 칼에게 작게 말했다.
“정말 당찬 낭잘세. 마음에 들어. 그나저나 자네 나이가 어찌 되나? 이왕 말 놓은 김에 호형호제로 가지.”
‘새머리가 보는 눈이 있군. 그렇지만 끝까지 깐죽거리는 게 영 거슬리는데.’
칼은 운비해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과 맺어질 수 없는 이종족이면서 이사벨라를 사심 있는 표정으로 보는 모양이나,(그녀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칼은 남자의 본능으로 알아챘다!) 자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이 기분 나빴다.
그래도 다시 길을 떠나면 만나지 않을 인물이다. 칼은 최대한 성질을 죽이기로 했다.
“의견을 낸 쪽이 먼저 패를 꺼내야지. 그쪽 나이는 어찌되지?”
칼의 물음에 운비해랑이 비죽 부리를 내밀었다.
“올해 24살이지. 뮈레자작은?”
“동갑이군.”
칼의 무성의한 대답에 운비해랑이 커다란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아쉬운데, 내가 형일 줄 알았건만, 그럼 편하게 부르자구, 칼 데 뮈레.”
“그러지, 운비해랑.”
‘유치해. 애들 같잖아.’
이사벨라는 그르릉대는 두 남자의 행동을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 * *
레스로마의 수도 레로마의 7지구 5번가는 레스로마 최고의 패션 거리다.
의상실과 모자가게, 소품과 보석상이 빼곡한 거리 끝에 프렌시아 대사관과 가한제국 대사관 마차가 나란히 섰다.
“여기서 내려드리겠습니다. 저녁 6시에 여기서 다시 만나죠.”
“아, 네. 자작님.”
칼에게 대답하는 이사벨라의 표정이 이상했다.
‘아니, 그 짧은 시간에 옷을 맞추라고?’
2시간 정도의 짬이다. 천을 고르고 디자인을 선택하는 건 둘째 치고, 그 시간동안 의상실을 고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저리 여자를 모르니 아직 약혼녀가 없지. 멋있다고 생각한 거 취소.’
이사벨라는 살짝 그를 흘겨보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음식과 마수퇴치도구까지 구할 효율적 동선을 짜던 칼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 채지 못했다.
‘2시간이면 옷 맞추는 건 충분하겠지.’
간단한 여행복이다. 체형만 재고 옷을 대강 맞추면 끝인 일이었다. 양산이니, 레이스니, 유행이니 이런 게 없으니 치수를 재고도 시간이 남을 터였다.
‘릴스난 산맥은 아직 인간의 발자취가 드문 곳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할 거야.’
어쩌면 이사벨라의 모친, 릴리안 칼파르를 노리는 마수 본체와 만날 지도 모른다.
‘정화도구도 구해야할까?’
목록을 작성하는 칼의 머리는 바빴다.
“감사했습니다.”
이사벨라는 가게를 찾아가기 전, 프렌시아 대사관 마차 옆에 멈춘 가한제국 마차에 가서 감사인사를 했다.
‘뭐랄까. 꼭 벤자민 당숙부님의 젊을 때 같단 말이지.’
적당함과 부담스러움 사이의 관심이나 속을 살짝 긁는 성격이 그랬다.
그러나 그런 성격과 달리 벤자민은 이사벨라에게 물적, 정신적 지원을 아낌없이 했다. 운비해랑도 그런 성향일 지 모른다.
‘툴툴대면서 은근슬쩍 힘을 실어준다고 할까.’
아니, 무엇보다도 운비가의 호의는 돈이 들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조력자가 마음에 들었다.
마부석에 앉은 운비해랑의 비서와도 가볍게 눈인사한 그녀는 몸을 돌려 거리로 걸어갔다.
“...7지구 5번가라... 낭자가 옷을 사러 가는군. 자작은?”
졸음어린 목소리로 물어보는 운비해랑의 질문에 비서, 김홍차가 대답했다.
“알아보겠습니다.”
워워! 막 움직이려는 프렌시아 대사관 마차가 다시 섰다. 종종걸음으로 프렌시아 마차를 다녀온 비서 김홍차의 보고를 들은 운비해랑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6시에 낭자를 태운다? 그럼 8시에 같이 만찬을 들자고 전하게. 그 곳의 예약 인원을 조정하도록.”
“네. 부대사님.”
가한제국 부대사의 비서가 전한 저녁 초청을 칼은 무표정하게 받아들었다.
‘그리 끌리지 않지만, 레스로마 전통만찬이라니. 이사벨라양에게 좋은 경험이 되겠지.’
더구나 예약한 식당 위치가 어디라 했던가. 비서의 귀뜸에 의하면 레로마 항구의 황실부두 지척이라 했겠다.
황실부두 근방이라면 성년제 개회식 행사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야행성이라 그런지 올빼미 머리가 저녁 일정은 빨리 정하는군.’
덕분에 말 많은 육촌 누님이 초대한 대사 모임 만찬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칼은 가볍게 고개를 흔든 뒤 마부에게 말했다.
“6지구 3번가로 가세.”
6지구 3번가. 검은고래전사 회원들이 이용하는 특수 상점이 있는 거리였다.
* * *
“어디를 갈까?”
레스로마 최대 축제일 첫날 이어서일까. 패션의 거리인 레로마 7지구 5번가는 다른 곳보다 한산했다.
‘빨리 아무 가게나 들어가야겠어.’
자신을 보는 노골적인 시선에 이사벨라는 생각했다.
그녀는 눈에 띄었다. 행인이 적기도 했지만, 간편한 복장에 금발 일색인 레스로마 사람들 사이, 검은 머리와 화려한 숙녀복 차림은 튈 수밖에 없었다.
‘저기부터 갈까?’
결국 그녀는 몇 걸음 걷지 않아 의상실을 골랐다. 남성 작업복과 비슷한 여성복이 진열된 곳이었다.
딸랑. 문을 열자 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Udaigang(나갑니다).”
“Undsolld mig(잠시만 기다리세요).”
가게 안쪽에서 직원 두 명이 외치며 나왔다. 면바지와 블라우스 차림의 여직원들이었다. 이사벨라는 살짝 당황했다.
‘이런, 난 레스로마어가 약한데.’
가한 사람들과는 대륙 공용어를 썼다. 레스로마어에 손짓을 섞어 말할까?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나이가 많은 쪽이 대륙 공용어로 다시 말을 걸었다.
“어머, 멋진 숙녀분이네. 어느 국가에서 오셨나요?”
다행이었다. 이사벨라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옆 나라예요.”
“아! 프렌시아! 성년제를 보러 오셨군요!”
직원의 추측에 이사벨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 김에 레스로마식 여행복을 맞출까 싶어서 왔답니다.”
이사벨라의 말을 동료에게 통역해주던 직원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호호, 축제 기분을 제대로 느끼려면 축제 의상을 맞춰 입는 게 최고죠. 저희 가게에 잘 오셨어요. 저희 옷이 수도 제일이랍니다.”
넉살좋은 그녀 말은 믿을 만했다. 진열장의 남자 작업복같은 여성복과 달리, 구석에 밀린 화려한 연회복을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프렌시아 수도 제노렐의 고급 의상실에서 볼법한 옷이었다.
“상하의를 맞추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이사벨라의 질문에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축제 기간에 입으실 거죠?”
“아, 네.”
이사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릴스난 산맥을 오를 때 입을 거지만, 성년제가 끝나기 전에 산을 탈테니 말이다.
‘흐음, 아예 레로마를 출발할 때부터 입어도 되겠는데?’
개방적인 레스로마에 와서일까.
숙녀가 외출복으로 바지를 입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는 프렌시아에서 시도도 못할 생각을 한 이사벨라는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맞추면 아무리 빨라도 나흘은 걸릴 텐데. 맞춤복을 꼭 고집하실 필요가 없다면 이미 제작된 옷을 사시는 것은 어떨까요?”
품과 기장 수선도 해드린답니다. 호호. 덧붙인 직원의 말에 이사벨라는 귀가 번쩍 트였다.
“제작된 옷이라면 진열대의 저런 샘플옷을 뜻하는 거죠?”
“네. 아무래도 성년제기간은 전국에서 새로운 구매자가 몰리는 시기라 옷 맞춤이 쉽지 않지요. 그래서 거의 모든 의상실은 여러 체형의 옷을 미리 제작해두었다가 판매한답니다.”
호오, 그것 참 실용적인 판매 전략이다. 이사벨라의 눈이 매처럼 반짝였다.
“그럼 맞는 옷이 있으면 여기서 갈아입고 나갈 수도 있군요.”
“역시, 입고계신 옷의 감각을 보고 느꼈지만, 손님은 재치 있으시군요.”
그녀 말에 이사벨라는 결심했다. 여기서 사자. 어차피 여러 군데 둘러볼 시간자체가 없었다.
“저를 따라 오세요.”
대륙 공용어가 유창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 뒤로 가게문이 열렸다. 딸랑.
“Velkomomen(어서오세요)!”
남은 직원이 우렁차게 손님을 맞았다.
진열실에 간 이사벨라는 입을 벌렸다.
“와아!”
예상보다 많은 옷이 행거에 걸려 있었다. 셔츠, 블라우스와 쟈켓, 그리고 통 넓은 바지가 색상별로 있었다.
“다른 방에는 모자와 신발도 있답니다.”
직원의 자랑을 들은 이사벨라는 주의 깊게 옷들을 살폈다.
‘의외네. 고를 수 있는 옷이 이렇게 많다니.’
레스로마 여성 평균키는 프렌시아보다 크다. 그리고 기성복은 사이즈 줄이기가 늘리는 것보다 쉽다. 대부분의 옷기장이 길어서 이사벨라는 쉽게 옷을 고를 수 있었다.
“셔츠 네 장에 쟈킷 두 벌, 바지 세 장, 그리고 모자도 두 개를 고르셨으니 지금 신으신 이 구두는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어머, 고맙군요.”
이사벨라의 미소가 광대뼈까지 올라갔다.
시간 내에 쇼핑을 마친데다 옷값이 예상보다 훨씬 쌌다. 이뿐이랴. 착용감을 확인하러 입은 바지와 셔츠, 쟈켓, 구두의 편함은 말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아예 이렇게 입고 나가시겠어요?”
한 세트를 맞춰 입고 거울로 확인하는 그녀에게 직원이 물었다.
“음, 그럴까요?”
6시에 데리러 올 칼의 눈이 휘둥그레질 것을 생각하니 올라간 입꼬리가 계속 휘어졌다.
‘문제없겠지? 어차피 바로 대사관저에 갈 거니까.’
대금은 자작에게 말해 뮈레가 수표를 빌려 내면 되겠지. 릴스난 산맥으로 출발하기 전에 은행에 들려 그만큼의 돈을 찾아 뮈레자작에게 주면 되잖아.
“돈은 6시에 일행이 오면 지불할게요.”
이사벨라의 말에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머지 옷과 드레스는 어디로 배달해 드릴까요?”
직원의 말에 이사벨라는 탈의실 안을 가볍게 걸으며 말했다.
“6시에 마차가 오기로 했답니다.”
7지구 5번가 입구에서 만날 예정이지만, 마부에게 말해 여기 들리면 될 터였다.
타닥타닥. 신발 굽이 낮으니 소리도 다르네? 아이처럼 미소 짓고 발소리를 들으며 탈의실을 걷던 이사벨라가 직원을 보았다.
“잠시 주변을 걸어보고 올게요.”
레스로마 복식차림이다. 가게에 들어오기 직전처럼 주목받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세요.”
직원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함께 탈의실을 나서며 이사벨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혹여 저와 마차가 엇갈릴 수 있으니까 미리 알려드리겠어요. 옷을 실어줄 마차는 프렌시아 대사관 마차예요.”
“어머, 대사님의 가족이나 친척이신가보다!”
감탄하며 웃는 직원의 말에 이사벨라는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옷이 잘 어울리네요!”
매장에서 남은 직원과 노닥이던 여자가 대륙 공용어로 외쳤다. 광대뼈를 덮은 주근깨와 대충 땋아 내린 붉은 빛 도는 금발 때문에 말괄량이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거친 셔츠와 바지, 낡은 부츠 차림이어서 일까. 그녀는 진짜 여행자 같았다.
“아, 고마...워요.”
얼떨떨하게 대답한 이사벨라에게 주근깨 여자가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여기 직원언니에게 들으니 프렌시아에서 왔다면서요? 성년제를 보러?”
“네.”
이사벨라의 대답에 여자가 폴짝 뛰어 그녀 앞으로 왔다. 그녀는 이사벨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진짜 아름다운 눈동자네요. 봄을 부르는 녹색이라니.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죠?”
“음, 이름을 물을 때는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게 예의 아닐까요?”
정중하지만, 상대의 무례를 가볍게 꾸짖는 이사벨라의 말에 여자가 꺄르르 웃었다.
“어머, 아하하하. 비싸 보이는 분홍 드레스에 리본달린 모자를 쓰고 있을 때부터 느꼈는데, 진짜 레이디네.”
‘드레스에 모자? 의상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나를 눈여겨봤다는 말이잖아!’
이사벨라는 경악했다. 입을 벌리며 기겁하는 그녀에게 여자가 말했다.
“아, 놀라게 해서 미안요. 내 이름은 헬가예요. 올해 열여덟, 성년이 되었죠. 레이디의 이름과 나이는?”
“이...이사벨라. 열아홉 살이죠.”
이사벨라는 떨떠름하게 이름만 말했다. 성을 알려주기는 싫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가문을 덥석 알렸다가 집안 전체에 흠집 잡힐까 걱정되었다.
‘가명을 댈걸 그랬나.’
본명을 말한 걸 후회하는 그녀의 왼손을 헬가가 덥썩 잡았다.
“열아홉 살! 성인이군요!”
“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당황한 이사벨라의 눈을 계속 쳐다보며 헬가가 외쳤다.
“이사벨라! 옷도 제대로 입었는데, 성년제를 현지 스타일로 즐겨보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