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누인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지만 바다치고는 물살이 거센 편이었다.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에서 하얀 포말이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는 앞으로 전진한다. 그 앞에는 얼음을 깨기 위한 쇄빙장치를 달고서였다.
그는 시선을 돌려 배의 우측과 좌측을 둘러보았다. 좌측 멀리로 마지막 벽을 이루는 절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었다.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끄트머리에 소라고둥항이 조심스레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뒤로도 절벽이 계속될 것이다. 처음 배를 띄워 바다로 나왔을 때, 하누인은 두 번 놀랐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소라고둥항의 아름다움에 한 번 놀랐고, 그 다음에는 끝 간 데 모르는 마지막 벽의 모습을 보며 놀랐다.
‘과연 빌어먹을 벽이라 불릴 만하구나.’
이것이 하누인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폭풍이 불어서 배가 조난이라도 당한다면 어디 급하게라도 배를 숨길 장소가 없었다. 육지로 향했다간 배를 절벽에 들이받고 그대로 박살나 버릴 상황이었던 것이다.
배의 우측엔 더 먼 거리로 하얗게 물든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눈을 비벼 떠야 간신히 보일만한 먼 거리였지만, 워낙 설원에서 반사되는 빛이 강했기 때문에 그 해안가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하누인이 알기로는 그 곳은 바로 남극대륙이었다. 남극대륙은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수많은 탐험가들이 그곳을 탐험한다고 뛰어들었지만 그들 거의 모두가 실종되고 말았다. 오직 한 명의 위대한 탐험가가 그 곳을 답사하고 바다에 가까운 지역에 ‘얼음평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뿐이었다. 그보다 더 깊은 땅은 여전히 지도상에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라고 적혀 있었다.
배는 그렇게 마지막 벽과 남극대륙 사이를 지나 빙설해협으로 향했다. 한여름에도 얼음과 빙산이 떠다니는 위험하고 추운 바다였다. 하지만 그 바다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었다. 하누인이 바라보는 사이에도, 배 뒤로 무언가 돌고래 같은 것들이 따라 붙고 있었다.
“물범들이야.”
어느 샌가 키리에가 하누인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하누인과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 동네는 추워서 돌고래들이 잘 나타나지 않지. 그래서 물범들이 돌고래 대신 배를 잘 따라다닌단 말이야.”
키리에가 묻지도 않은 것을 이야기했다. 하누인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쇄빙선 구하느라 힘들지 않았어요?”
키리에가 피식 웃었다.
“이 근방에서 갈 수 있는 항구들이 죄다 빙설해협을 통과해야 해. 쇄빙장치 없으면 원양으로 나갈 생각 꿈도 못 꾼다는 얘기지.”
“그래도 뭘 열심히 살피면서 배를 골랐잖아요?”
하누인은 골목에서 뛰쳐나와 배를 타러 달려가던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미행을 떨군다고 번개같이 뛰면서도 키리에는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배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타고 갈 배를 골랐다. 어디로 갈 배인지는 따지지도 않은 채였다. 그저 배의 형태만으로 배를 고른 키리에는 배의 선장에게 참잘난항이라는 목적지만을 제시한 뒤 나머지 처리를 하누인에게 맡겼다. 결국 하누인은 주머니에서 또 다시 금화를 끄집어내야 했다. 선장이 참잘난항으로 갈 계획이 없다고 뻗댔기 때문이었다.
“쇄빙장치에도 종류가 있으니까. 이 배는 중형급이야. 중형급치고는 쇄빙장치가 잘 달려 있지. 남극대륙에 접근만 하지 않는다면 문제될 일은 없을 거야. 혹시 거대 빙산이라도 떠내려 온다면 또 모르지만……. 그 땐 선장이 잘 처리하기를 기대해야지.”
키리에는 그렇게 말하며 바닷바람을 쐬었다. 바람 쐬기에는 조금 추운 날씨였지만 오랜 항해 생활이 몸에 밴 그는 바닷바람 맞는 것을 즐겼다.
“당분간 무료하게 바다를 떠가겠군요.”
“무료하길 바래야지. 바다가 거칠어지면 무료하진 않겠지만……. 설마 그걸 바라는 건 아닐 테지?”
키리에가 다시 씨익 웃었다.
“여기 바다는 거의 빠지면 죽는다고 봐야 해. 수온이 거의 영하에 가까우니까. 바닷물에 1분만 잠겨 있어도 체온이 떨어져 살아남기 힘들지.”
하누인도 마주 웃었다.
“추운데 뭐라도 먹으면서 얘기하시죠.”
키리에는 하나도 안 춥다고 반발할 기세였지만 하누인의 표정을 보고 이내 수그러들었다. 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나란히 몸을 돌려 선실로 내려갔다.
선실은 작지만 아늑했고, 누군가 이미 군불을 때워 놓았기 때문에 따뜻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하누인이 워낙 추위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키리에는 급히 주방으로 가더니 럼 주 세 병을 얻어 방으로 돌아왔다. 말로는 하누인을 위해서라 하지만, 세 병 중 두 병을 자신의 앞에 놓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한 것이었다.
“어떻게 강운의 항해사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겁니까?”
잠시 몸을 녹이고 럼을 한 잔 마신 후에야 하누인은 간신히 입을 열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남극에 가까운 바다는 실로 추워서,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하누인의 몸을 꽁꽁 얼려 놓았던 것이다. 키리에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그야 나한테 운이 워낙 많기 때문이지.”
“운이 많아요?”
독특한 표현을 듣고 하누인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음. 운이 좋다기 보다는 운이 많지. 죽을 운명을 몇 번이나 버텨냈으니까.”
“……그럼 몇 개 들려주세요. 무료한데.”
하누인이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대며 말했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한 자세였다.
“그닥 들을 만한 얘기도 아닌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키리에는 술을 한 잔 들이켠 뒤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태어날 때부터 쓸 데 없이 운이 좋았지.”
자신의 태어남을 쓸 데 없는 것으로 만드는 화법이 인상 깊어 하누인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모친이 나를 품고 아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가는데 그 마차가 산적들의 습격을 받았지. 마차가 넘어진 틈에 잘 안 보이는 쪽으로 기어가 겨우 목숨을 건지셨는데 하필 그 때 산통이 시작된 거야. 산고부터 배꼽줄 자르고 태반 뒷정리까지 홀로 마무리하셨지.”
“태어나길 특별하게 태어나셨군요.”
“뭐, 그런 셈인가?”
키리에가 씨익 웃었다. 쓸 데 없다는 표현을 특별하다는 표현으로 바꿔 준 하누인의 마음씀이 고마워서일까.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운이 많달 수는 없잖아요.”
하누인이 재촉했다.
“글쎄, 많은 일이 있었다니까? 아주 어릴 적부터 검술을 익혔는데 말이야…….”
“검술이라고요?”
놀라는 하누인에게 웃어 보이며 키리에가 말을 이었다.
“안 그래 보이나? 여튼 아는지 모르겠지만, 검술은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게 돼. 그 훈련을 위해 아버지와 대련을 하다가 검으로 돌쩌귀를 내려쳤는데 검날이 부러졌지 뭐야. 그게 튕겨서 내 이마에 박혔지.”
심각한 이야기였지만 워낙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별 일 아닌 것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하누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흉터가 없는데요?”
그는 말없이 한쪽 이마를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으로 교묘하게 가려진 곳에 제법 긴 흉터가 남아 있었다. 오래된 듯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위험해 보이는 부위였다.
“일단 급소는 비껴갔지만 제대로 된 처치를 하지 않으면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어.”
“어떻게 사셨습니까?”
키리에는 럼을 들이켰다.
“운이 좋게도 왕영 마법사가 근처에 마실을 나온 참이었지. 사람 목숨은 구해 줬지만 흉터까지 없애 주는 은혜를 베풀지는 않았어.”
한 모금 더 들이마시자 술병은 거의 비게 되었다.
“그러곤 검을 내려놓고 마법을 익히기 시작했어. 마법도 처음 단계까진 순조롭게 나아갔지. 운이 좋아서였는지는 몰라도. 가르치는 선생조차도 늦게 시작한 것치곤 익히는 속도가 빠르다며 감탄했을 정도니까.”
“그런데요?”
“그런데 기본 마법들을 배우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할 때 또 문제가 발생했어. 내 마법적 특징을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선생이 욕심껏 여러 가지 마법을 가르치다가 그게 꼬여 버린 거지.”
하누인은 경악했다.
“그걸 경험하고도 살아계신 겁니까?”
키리에가 킥킥 거렸다.
“오, 마법폭발을 아나?”
웃음이 잦아들고 나서 그는 말을 이었다.
“지금 자네 앞에 내가 있잖아. 이 내가 설마 유령은 아닐 테지.”
자신의 볼을 잡아당기며 다시 웃은 키리에는 이내 자신의 앞에 놓인 술병을 잡아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빈 병이었다. 입에 탈탈 털어 넣으며 병 끝에 혀를 대어 보던 그는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살았어. 선생은 죽었지. 괜히 옆에 있다가 휘말려서 말이야.”
하누인은 불신의 눈으로 앞에 선 뱃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때껏 마법폭발을 경험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 폭발은 마법을 수련하는 자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물론 그것은 물리적 폭발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그 주변 상당거리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마법적 폭풍이다. 그런 폭풍이 사람의 몸 내부에서 벌어지니 몸이 견뎌낼 리가 만무했다. 당장 키리에의 경우를 보아도 그 옆에서 그를 도우려던 마법 스승마저 죽었다질 않은가? 이건 운이 좋다고 말하고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누인의 표정을 보던 키리에가 씨익 웃으며 그에게 술을 권했다. 아직 하누인의 잔에는 럼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거 봐. 재미있는 얘기가 아니랬잖아.”
하누인이 얼버무렸다.
“아니, 재미없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만 얘기할래.”
“하나만 더 듣겠습니다.”
“‘더 해 주세요’도 아니고 ‘더 듣겠습니다’라고?”
하누인이 말없이 웃었다. 키리에도 잠시 웃다가 하누인의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먹을 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면서 키리에는 그 잔마저 자신의 입에다 털어 넣었다. 그 얼굴은 이미 벌겋게 익어 있었다.
‘정말 술을 좋아하긴 하는구나.’
하누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선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똑똑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