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 가뭄이었어.”
“전대륙적 가뭄이었지요.”
하누인이 정정했다.
“음. 나는 그 때 검은땅 시에 있었는데, 한발(旱魃)이 너무 심하게 들어서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게 아니라 목말라 죽을 지경이었지.
“제가 아는 분 중에도 있었습니다.”
하누인의 말에 키리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뭐가?”
하누인이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때 전대륙적 한발 속에서 물을 못 드시고 돌아가신 분이요.”
“저런, 안 된 이야기군.”
키리에가 고개를 숙여 애도를 표했다.
“괜찮습니다. 된 이야기나 마저 듣지요.”
영 안 그럴 것 같은 우락부락한 뱃사람의 섬세한 예의에 하누인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음, 나도 혓바닥에 물을 못 댄지 이틀이 지나 탈진해 있는 상황이었어. 심지어 술도 못 마신 상황이었다고!”
그 와중에 술을 찾는 키리에였다.
“그런데 그 때 비가 왔던 거야.”
“폭풍이 왔지요.”
하누인이 재차 정정했다.
“그래, 폭우를 동반한 폭풍이…….”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본인에게 들으니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누구나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 상황. 아무도 도와주는 손길 없이 큰 길에 대자로 뻗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새파란 하늘 사이로 검은 구름이 나타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바싹 마른 벌어진 입 속으로 물방울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기운을 차리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지.”
“긴급한 상황이 생겼던 겁니까?”
“긴급은 무슨. 장대비가 온 얼굴을 때려 대는데 거기 누워서 어떻게 버티나?”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하누인은 곧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은근히 유머 감각이 있다는 말씀이야. 그런데 정작 말을 꺼낸 키리에의 얼굴에서는 웃음기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하누인이 웃음을 그쳤을 때, 키리에가 말을 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길 한복판에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처마 밑으로 피했을 때에는 발목 높이로 물이 차올랐지. 조금만 늦었으면 익사했을 거야.”
하누인의 표정이 경악으로 변했다. 대경실색했다는 말이 꼭 이런 상황에 쓰이는 말일 듯싶었다. 그 정도의 속도로 내린 비라니. 역대급 사건인 게 문제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비가 그렇게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고, 마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홍수 때문에 좀 난리가 났었지만, 뭐 어쨌든 물 못 마셔서 죽을 일은 없어졌으니 다행이었달까…….”
검은땅 시 전체가 이 사건으로 가뭄과 기근에서 벗어났다. 온 대륙에 죽은 자가 흘러 넘쳤던 대기근의 시기에, 검은땅 시의 아사자는 단 두 명 뿐. 그리고 거기에서 자란 산물을 알뜰히 분배하여 대륙은 대기근의 가장 험악한 기간을 헤쳐 나왔다. 그 때만큼은 나라의 곡식 창고가 넓디런 평야도, 샛강 평야도 아닌, 검은땅 시였다.
“키리에 씨가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꼭 무언가 놀라운 현상이 벌어져 당신을 구해내는 군요. 마치 세상의 모든 운이 당신에게 집중된 것처럼 말입니다…….”
하누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군.”
어떤 것을 모르겠다고 말한 건지 잘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 하누인을 보며 키리에가 말했다.
“모든 운이 다 내게로 온 건지는 모르겠다는 말이지.”
하누인이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키리에씨는 운이 좋다기 보다는 악운에 강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모두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니까요.”
“음, 그런 셈인가?”
키리에가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이 때문이었군요. 검치호가 소란을 부릴 때에도 자신의 안위에 대해 걱정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 그게 말입니다, 실은…….”
하누인은 뚱뚱이 고둥 객관에서 검치호가 달려들었을 때의 일을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악운에서 살아남기를 반복한 키리에에게 검치호의 위협이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신의 추정을 덧붙여서였다.
“꼭 그래서 만은 아니야.”
뜻밖에도 키리에는 고개를 가로 젓고 있었다.
“그만치 현실 감각이 떨어져 있지는 않아. 내 운이라는 것이 영원히 나를 지켜 줄 방패막이라 여길 수도 없고. 몹시 취해 있던 나를 그 현장에서 구해낸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있어.”
키리에는 하누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취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네의 엉터리 같은 계약도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닌가?”
키리에를 구한 이유가 계약을 맺기 위함이 아니냐는 준엄한 비판처럼 느껴져 하누인은 몹시 민망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키리에는 별 뜻 없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얼굴로 다시금 술기운이 퍼져 들었다.
“들을 만큼 들었으면, 이제는 좀 자 둘까?”
뱃사람의 얼굴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며칠 정도나 걸릴까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하누인이 물었다.
“한 3일?”
“해류만 따라간다구요?”
“음, 최남단곶까지는……. 거기에서는 다시 키를 잡아야 참잘난항으로 올라갈 수 있지.”
“정말 무료한 시간이 되겠군요.”
하누인이 한숨 섞어 말했다. 한참을 떠들었는데도 아직 한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뭣하면 내 얘기나 더 들으면 되지. 아니면 자네 얘기를 들려 줘도 되고.”
“…사양하겠습니다.”
뭘 사양하겠다는 건지 딱 잘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뭐든 사양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얼마 안 마신 와인의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하여 뱃멀미와 섞여 버렸던 것이다. 뱃멀미나 취기에 익숙한 뱃사람이야 끄떡없어 보이는 모양이지만, 하누인은 좀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뱃멀미에나 시달리며 3일을 더 가야 한단 말인가?’
끔찍한 얼굴로 하누인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나 먼저 가서 자네. 자네도 좀 자 둬. 뱃멀미에는 잠만 한 게 없지. …취기에도 그렇고.”
뱃사람은 하누인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렇게 말한 뒤 선실 한 켠에 붙은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약 반각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침대에서는 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규칙적인 코 코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코까지?’
하누인은 답답한 표정으로 일어서다가 비틀거리며 창틀을 잡았다. 배가 한쪽으로 쏠리는데 취기까지 일어 중심을 잃은 탓이었다. 그는 창문을 열어 제치고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잠시 쐬었다. 영하를 맴도는 그 바닷바람은 그의 증상에 아주 즉효였다. 정신이 말짱해진 하누인은 눈물과 콧물을 포함한 모든 액체가 얼어버리기 전에 급히 창문을 다시 닫았다. 그러곤 소파에 다시 기대어 누웠다. 정리가 필요했다. 모든 정보를 정리해야 다음 단계를 계획할 수 있을 터였다.
무사히 키리에와 맺은 계약. 누군지 모를 미행자. 대륙에 몇 안 남은 검치호를 동반한 젊은 여성.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인조족. 술을 보내 온 대(大)상인 빌켄.
참 신기하기 짝이 없는 상황들을 머릿속으로 열거하던 그는 빌켄에 이르러 문득 생각을 멈추었다. 그가 상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확성기를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보통의 사람들이 마법이 걸린 물건들을 알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상인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것도 대상인이라면.
이 나라의 상인들이란 온 나라의 산물을 모아다가 필요한 곳으로 배분하는 사람들이다. 장사는 둘째 문제이다. 물론 작은 상인들이야 자기 동네에서 돈 되는 물건 몇 종류만 팔며 살아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상회를 이끄는 상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좀체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물품들까지도 있는 대로 긁어모아 리스트를 만든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그 리스트를 교환하며 물건이 가야 할 곳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물건이 필요한 곳을 찾아 그것을 팔아먹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돈벌이가 둘째 문제인 것이 아니다. 결국엔 어느 물건이나 팔아먹고, 마침내는 이윤을 남기게 되는 것이니까. 여전히 이들에게도 돈벌이는 첫째 문제일지 몰랐다. 하지만 이들 대상인들의 조직을 통해 나라는 각 처에 필요한 물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고도 쉽게 물건들을 수송할 수 있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랄까. 상인은 돈을 벌고, 나라는 돈을 아끼는 것이다.
‘빌켄은 확성기를 알아보았고, 빌켄은 돈을 벌고…….’
찬 기운이 사라지고, 다시 급격히 올라오는 취기에 하누인은 소파에 누운 채 정신없이 이 생각 저 생각을 주워섬겼다. 빌켄은 물건을 보내고, 키리에는 세 가지 물건을 받고, 선장은 바구니를 건네고, 여자는 인조족을 받았다. 그리고 검치호가 모든 것을 삼켰다. 미행자마저 검치호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하누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쇄빙선 채로 삼켜졌으니 말이다. 그르릉 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들리고 천장에서는 검치호의 목젖이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곧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