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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을 거머쥔 자
작가 : 신책
작품등록일 : 2017.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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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운의 항해사 3) 추격전 - 쫓는 자와 쫓기는 자 ②
작성일 : 17-07-26     조회 : 315     추천 : 0     분량 : 5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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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리에가 돌아온 것은 반 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 추워라.”

  자기 몸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두드리며 선실로 들어온 키리에가 호들갑스럽게 벽난로 앞으로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하누인의 질문에 키리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 마디를 던졌다.

  “물범이야.”

  “예?”

  어리둥절한 하누인에게 키리에가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 동네에 물범이 많이 산다고 했잖아. 간혹 배를 따라다니기도 하는데,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이렇게 배에 치여서 죽게 되는 경우가 있어.”

  “배에 치였다고요?”

  “음.”

  하누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채였다.

  “물범이 배와 부딪힌다고 그런 큰 소리가 납니까?”

  단순히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배에 울림까지 있었던 것이 더 문제였다.

  “음, 그래서 나도 오히려 빙산 쪽을 생각했던 건데…….”

  키리에가 무어라 말하기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모로 꼬았다. 하누인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선실 안을 걷기 시작했다. 깊은 생각에 빠졌을 때의 그의 버릇이었다. 평소라면 갑판에라도 나가 보겠지만, 지독한 남극의 추위를 경험한 이 시점에서는 아쉬운 대로 선실을 걷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누인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발을 멈추며 외마디 소리를 외쳤다.

  “두 번 들리지 않았습니까? 충돌은 두 번 있었습니다!”

  키리에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물범이 두 마리였겠지. 아니면 한 번 치인 물범 시체가 뒤로 밀려나면서 다시 한 번 부딪혔거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한 번 부딪히기도 쉽지 않은 일이 두 번 연속해서 일어나다니…….”

  “음…….”

  이번엔 키리에가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하누인은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살피기 시작했다. 뭔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나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부딪혔다는 물범이야 이미 뒤편으로 지나갔겠지만,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창문이 남쪽을 향해 있어 지는 태양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부실 정도의 빛이 바다를 때리고 올라와 하누인의 눈을 어지럽혔다. 물결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빛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바다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하누인은 뭔가 이상한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에 얼른 눈을 비볐다.

  “저건 뭐지요?”

  “무엇 말인가?”

  하누인의 질문에 키리에가 창으로 다가서며 되물었다.

  “저기 바다 위로 길게 늘어서 있는 것 말입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데요.”

  처음엔 빛의 산란이나 파도가 일으킨 거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무언가 바다 그 자체가 아닌 다른 물체가 그 위에 떠 있는 듯싶었다.

  “물범 같은데…….”

  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며 키리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니라 더 잘 보기 위해서 눈을 살짝 감은 것이었다.

  “물범이 저렇게 길다구요?”

  하누인이 언뜻 보기에 그 물체는 거의 배의 길이에 맞먹는 길이를 가지고 있었다.

  “바다뱀 아니냐는 질문이지?”

  키리에가 하누인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바다뱀은 전설일 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키리에는 확실한 대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저게 뭡니까?”

  “허 참, 사람 되게 성질 급하구만. 나라고 모든 걸 다 알겠어? 좀 기다려봐. 확인 좀 하게. 어쩌면 남극오징어일 수도 있고…….”

  “오징어라구요?”

  “우리가 먹는 오징어 말고, 남극둥근지느러미오징어는 길이가 사람 키의 다섯 배가 넘는 것도 있어. 하지만 해수면으로 올라오는 경우가 좀체 없단 말이지.”

  얼버무리는 뱃사람에게 ‘우리’가 먹는 오징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하누인은 더 중요한 상황을 발견하고 급히 말의 내용을 바꾸었다.

  “그거, 거기에만 있는 거 아닙니다.”

  하누인이 다급히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길쭉한 물체는 처음 본 것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도 떠 있었다.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키리에가 다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물범이 맞는데. 근데 물범이 저렇게 컸던가?”

  그렇게 말하던 뱃사람은 하누인이 입을 열려 하자 손을 들어 잠시 기다리라는 표시를 했다.

  “아니, 저 물체가 통째로 물범 한 마리인 게 아니야. 한 세 네 마리 정도가 열을 지어 있는 건데…….”

  물 위로 불룩 튀어나온 부분과, 물 아래로 잠겨진 부분이 번갈아 나타나는 길쭉한 물체. 키리에는 그 모두가 하나의 생명체인 것이 아니라, 튀어나온 각각의 부분이 하나의 물범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석양의 빛을 강하게 받고 있어 도무지 확인이 어려웠다.

  “그렇다 해도 너무 큰데…….”

  키리에의 혼잣말을 듣던 하누인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갑자기 떠오른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키리에씨. …물범족 아닙니까?”

  목소리까지 떨려나오는 하누인이었다.

  “물범족? 그것도 전설에 불과해. 실존하는 게 아니라고.”

  키리에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인조족도 있는데, 물범족만을 전설이라 치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반박하던 하누인은 이내 깜짝 놀라며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또 있습니다. 아니, 저쪽에도…….”

  “후, 너무 많은데? 잠깐 나갔다 오겠네.”

  “아니, 저도 가지요.”

  하누인은 두툼한 로브를 몸 위로 걸치며 키리에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선실 안에만 머무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갑판의 상황은 평범하고 조용했다. 추위에 단련된 선원일지라도 계속 바깥에 나와 있기엔 지나치게 추운 날씨였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일만을 마치면 각자의 선실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서 하누인은 선장실로 이동하며 단 두 사람의 선원만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이봐, 선장!”

  갑판을 지나쳐 선장실 앞으로 다가가며 키리에가 큰 소리로 선장을 불렀다. 선장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다.

  “선장, 선장!”

  쾅쾅 문을 두드리며 한동안 소동을 피우자 비로소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문 좀 열어 봐. 이상한 일이 있다고.”

  키리에는 거친 말씨로 문을 열 것을 종용했다. 잠시 꾸물거리는 시간이 지나고, 선장은 겨우 문을 열며 두 사람을 맞았다. 아무래도 낮잠을 즐긴 모양이었다.

  “지금이 낮잠 잘 때인가? 바깥을 한 번 보게.”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요?”

  선장의 목소리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낮잠을 방해받아 짜증이 난 것이 분명했다.

  “물범이 너무 많아. 마치 배를 에워싼 모양새라고.”

  키리에의 말에 선장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물범이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이 해역은 원래 물범이 많은 곳이란 말입니다.”

  선장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방으로 돌아설 채비를 했지만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키리에가 다짜고짜 그 턱수염을 움켜잡은 채 그를 갑판으로 끌고 나갔던 것이다.

  “어, 어, 이거 뭐하는 짓이야?”

  “눈으로 보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잔말 말고 따라오게.”

  하누인이 말릴 새도 없이 키리에는 선장을 끌어다가 뱃전에 세웠다. 하누인과 키리에가 선실 창으로 함께 살폈던 남쪽 바다뿐만 아니라, 배의 좌현인 북쪽 바다에도 비슷한 물체들이 열을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하누인은 햇빛을 피해 배의 앞쪽을 좀 더 집중하여 살펴보았다.

  “물범이 맞군요. 그것도 엄청나게 큰 물범입니다.”

  하누인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키리에와 선장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장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세, 세상에. 어디서 저런 물범들이 떼로…….”

  “선장, 앞서 물범이 배에 부딪혔던 건 알고 있나?”

  키리에가 거친 소리로 선장을 몰아 세웠다. 아무래도 선장이 낮잠을 자느라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 처음 들었소.”

  답하는 선장의 목소리는 다시 공손해져 있었지만 승객을 모셔야 하는 선장의 의무를 다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만 계시오. 위급한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선실에 들어가 대기하셔야 겠소.”

  선장은 여전히 당황하고 있었지만 침착하고자 노력하며 두 사람에게 그렇게 주문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두 사람이 아니었다. 하누인은 이 현상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었고, 키리에는 바로 강운의 항해사가 아닌가?

  키리에는 선장에게 자기 할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투로 훈계조의 말을 건넨 후, 손을 휘저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 해역에서 저만한 크기와 저 정도 숫자의 물범을 본 적이 없어. 이건 뭔가 안 좋은 일의 전조일세.”

  그 말은 하누인을 향한 것이었고, 하누인은 그 속에 숨은 뜻을 곧 눈치 챌 수 있었다. 악운의 순간이 도래했다는 의미였다. 키리에가 악운을 몰고 다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가 여러 번 악운에 부딪혔으나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악운이 닥칠 때 그의 생명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을 수 있으나, 그 주변에 있는 자는 그 악운에 말려들게 되고 심지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악운이 완전히 그들을 점령하려 들기 전에 하누인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누인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배다! 후방 7시 방향에 배가 보인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주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한 선원이 배의 뒤편을 바라보며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라고?”

  당황해 소리를 지르며, 하누인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후방 먼 곳으로 검은 색깔의 배가 떠 오는 것 같았다.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주는 키리에 역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 해역에서는 배가 다른 배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누인의 추궁에 키리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불가능해. 해류의 속도보다 더 빨리 배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오고 있지 않습니까?”

  “믿을 수가 없군. 정말 배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해.”

  뱃사람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바람이 해류보다 빠른 경우라면 돛을 펴서 해류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누인이 언뜻 떠오르는 것을 물어 보았다.

  “그러기가 좀처럼 힘들어. 이 근방은 바람이 그렇게 세지가 않아. 그에 반해 해류는 정말 엄청나게 빠르지. 해류에 올라타 있으면 배가 워낙 빨라서 바람은 마치 역풍이 부는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역풍이 불 때에도 항해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저는 항해는 잘 모릅니다만, 그 방법을 써서 해류보다 빠르게 나아갈 수는 없습니까?”

  “이론적으론,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의미해. 움직이는 해류 위에서 돛을 조작해 지그재그로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인데……. 그러다가 해류 바깥으로 빠져나갈 가능성까지 생각한다면 그냥 얌전히 해류에 얹혀 있는 게 낫다고.”

  “그럼 도대체, 저 배는 어떻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겁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 멀리 보이던 배는 약간 더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석양의 바다에서 그 배는 한순간 자신의 모습을 번쩍이는 빛 가운데 드러내었다. 그 기이한 형태는 하누인과 키리에의 말문을 막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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