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연화와 유화는 어느 처소 앞에 이르러 섰다.
처소를 본 연화와 유화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래되고 조그만 집 한 채였는데, ‘백화당’이라는 현판이 초라하게 걸려 있었다.
정원이나 대문 같은 건 없다. 집은 오래도록 비어있었던 듯해 보였다. 황궁 안에 있는 처소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을씨년스럽게까지 했다.
유화는 당장에 처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문의 문풍지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도 했다.
연화는 그 자리에 못 막힌 것처럼 백화당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연화를 백화당으로 안내했던 시중 궁녀가 냉소하며 말하였다.
“설마하니 채녀 마마님의 처소가 장미 궁 같은 줄 아신 건 아니겠지요?”
“…….”
연화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떨어졌다. 천상에 지어진 거대한 궁궐처럼 보였던 황궁 안에, 이렇듯 초라하고 허름한 장소가 있을 거라는 건 생각도 못한 일이다.
조그만 침실 한 칸, 부엌이 한 칸, 응접실 흉내를 한 조그만 공간이 한 칸. 침실도 작은 침대가 겨우 하나가 들어가 있는 조그만 크기.
딸린 시중 궁녀는 지금 곁에 선 도도한 궁녀였고 겨우 한명이었다.
시중 궁녀이지, 실은 황후가 각 후궁들을 감시하고 통솔하기 위해 후궁 당 한명씩 배정한 궁녀에 불과했다. 황후의 사람인 것이다.
연화는 실망감이 들었다. 황궁이란 곳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컸던 탓일까.
그러지 않으려 해도, 절로 연화의 표정은 실망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렇게 누추한 곳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가 자랐던 연위에 있는 사가는 이렇지 않았다. 오래되긴 했어도 고풍스러우면서도 넓고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주변의 한적한 풍광과도 잘 어울리는 그 집은 연화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정원이 있었고, 응접실이 딸린 커다란 침실이 있었으며, 유모를 위한 침실도 따로 있었다.
후궁이라 함은, 황제의 여인일진데. 제국의 하늘이라 일컫는 황제의 여인이 기거하는 처소가 이렇듯 초라할 수 있는 것일까.
언젠가 풍문으로 들었던 말들이 있었다. 황제의 후궁이란 존재는, 황제의 권력을 위해 마련한 일종의 볼모와 같은 존재라고.
연화는 입술이 조가비처럼 다물어졌다. 이제껏 철없이 날갯짓하던 연화의 눈빛은 냉랭한 현실에 부딪혀 잠시 빛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생긋 반짝이는 미소를 덧입고 연화는 곁에 서있던 시중 궁녀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천진하고 아직은 물정 모르는 순수한 소녀였으나 상황을 금세 직시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백화당, 참으로 어여쁜 이름인데? 앞으로 함께 하게 될 시중 궁녀라 했지? 나 연화라고 해. 우리 앞으로 잘해 보자.”
무엇이 불만인지 조금 삐딱한 태도로 서있던 궁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궁녀는 헛기침을 하더니 마지못해 답하였다.
“지아라 해요.”
지아의 어조는 여전히 연화를 무시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때 처소를 둘러보던 유화가 분기탱천해져서 나왔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아무리 밑바닥 후궁이라지만 이렇게 누추할 수가 있어요? 연화 아가씨 사가에서 제가 지내던 방보다 더 못해요. 벽지엔 곰팡이가 생겼고 거미줄까지 있어요.”
유화는 그렇게 말하다가 궁녀인 지아에게 얼굴이 향하였다.
“그리고 이봐요.”
“저요?”
“그래요, 그쪽. 엄연히 그래도 황제의 후궁으로서 오늘은 혼인날인데, 신방으로 꾸며진 곳이 어쩜 저래요? 벽지도 다시 새로 바르고 황제 폐하와 신부가 누울 침대도 새로 하고 처소도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래서는 폐하께서 놀라 도로 나가시겠어요.”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오늘 이곳에 폐하께선 납시지 않으실 겁니다.”
“뭐요?”
새초롬하게 답변하는 지아의 말에 유화는 눈을 치켰다. 지아는 가녀린 체구의 소녀치고는 당찬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후궁들만 해도 140여분이나 계시지만요. 폐하께선 후궁을 새로 들이실 때마다 신방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폐하께선 오늘 후궁 전에 후궁 한 분이 입궁했다는 사실조차 모르실 거예요. 후궁 간택과 입궁은 태후전의 소관이니까요. 마마님의 행색을 보아하니, 평생 가장 아래인 7품 후궁의 신분을 벗어나실 수나 있을 런지 참으로 걱정되네요. 어쨌든 벽지는 힘들게 새로 바를 건 없구요. 그래도 형식적이나마 신방 흉내라도 내어 꾸며드린 건, 제 공로이니 알아두셔요.”
“뭐야? 이 계집애가!”
“이봐요, 말조심 하시죠? 저 원래 황후 처소에 있던 사람이에요. 이러다 황후 마마께 연화 마마가 밉보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뭐, 뭐?”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저는 백화당의 시중 궁녀로 파견되긴 했지만 엄연히 아직은 장미 궁 소속이라서 제가 할 본분이 그곳에 있거든요.”
지아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새침하게 하고서 총총히 사라져갔다. 유모 유화는 너무나 분한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이고. 주인마님께서 살아만 계셨어도 우리 연화 아가씨가 이런 개 같은 신세는 겪지 않았을 텐데. 아이고, 우리 연화 아가씨가 이런 후궁 따위나 되지 않았을 텐데. 고이고이 기른 우리 금쪽같은 아가씨.”
연화는 보다 못해 유화 곁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등을 두들겼다.
“유모, 뚝! 뚝! 누가 들으면 여기 초상난 줄 알겠어.”
그렇듯 초라하게 후궁 살이를 시작하게 된 연화이다.
열일곱 평생, 명 소왕국에서도 가장 작은 지역인 '연위'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고 그저 천방지축으로만 살아온 연화.
지역관의 여식은 황궁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된다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어도, 설마하니 연위와 같은 조그만 시골 지역 관리의 여식까지 황궁으로 부름받을 줄은 몰랐었다.
연화는 제국의 황궁에 그것도 후궁으로서 살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관심도 두지 않았었다. 때문에 황궁에 대한 모든 건, 생소하고 낯설었고 무지했다.
연화는 훌쩍거리는 유화를 달래며, 지난 밤 연우의 사가에서 홀로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달빛은 깊어졌으나 잠 못 들던 밤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신부 옷을 입고서 달빛처럼 고아한 어느 전각의 신방 안에 머물게 되겠지. 지금처럼 밤이 깊어져 하루 동안 소란했던 세상이 다시금 잠들어 고요해질 때에, 침실의 문이 열리고 지아비인 황제가 신랑의 모습으로 오겠지 하였다.
그러할 때에, 박색인 얼굴을 보고서 지아비가 내치면 어쩌지 하며 홀로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홀로 잠 못 들며 했던 고민이 무색해졌다.
연화는 유화의 등을 두들기다 말고 고개를 조금 들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 걸까? 유모 말대로 박색 얼굴을 보여 봤자 좋을 거 없으니.’
연화는 마음을 다잡고는 벌떡 일어났다.
“유모, 이젠 여기가 우리 거처인데 불평하고 있으면 뭐해? 우리 힘내서 청소부터 하자.”
“예? 아이고 내가 아가씨 앞에서 주책이었네요.”
유화는 눈가를 소매로 훔치고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누군가 처소로 다가왔다.
“련 채녀 마마 계시오?”
“누구요?”
유화가 물으며 방문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처소 앞에는 상궁이 와 있었다.
청색 치마에 옥색 상의를 입은 것을 보니, 아마도 조금 전 정애 상궁과 비슷한 신분의 상궁인 듯했다. 상궁은 조금은 뻣뻣한 태도로 유화에게 말을 전했다.
“폐하의 정비이신 원 귀비 마마의 명으로 왔사옵니다. 당장 련 채녀 마마께선 모란전으로 오시지요.”
그러고서 상궁은 횅하니 가버렸다.
연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유화에게 말하였다.
“정비? 원 귀비 마마시면 정1품 마마이신 거지? 헌데 모란전은 또 어디야?”
유화는 미간을 주름을 만들며 심각해진 얼굴을 했다.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했다.
“아가씨, 분명 신고식을 치르는 걸 거예요. 이럴 땐 그냥 조용히 고분고분, 아가씨 알았죠? 그래야 황궁 생활이 순탄하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