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후궁으로 황궁에 입궁한 첫날밤부터 연화는 원 귀비로부터 벌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연화와 라희는 함께 모란전을 나오며 번갈아 한숨을 내쉬었다. 모란전 상궁들이 연화와 라희가 벌을 받을 장소로 안내하는 중이었다.
라희는 속삭이는 말로 연화에게 말을 건네었다.
“련 채녀님, 참으로 걱정이어요. 하룻밤 새 그 많은 일을 어찌 다할 수 있을까요?”
“힘쓰는 일은 저에게 다 맡겨요. 우선 편지 쓰는 건 송 현녀님이 해주시고 전 일단 곡식 창고에서 일을 할게요. 곡식은 무거우니까 제가 하는 게 맞아요.”
“그러고 보니, 련 채녀님은 힘이 좋으신가 봐요. 아까도 현빈 마마의 손목을 번쩍 잡는 모습이 범상치 않아 보였어요.”
아까 따귀를 때리려는 현빈의 손목을 붙들었던 것을, 라희는 흉내 내듯 한쪽 손을 휘저어 보였다. 그러다 연화를 향해 동그란 눈매를 하고 물었다.
“또 힘쓰는 일을 맡기라 그러시고. 혹여 소녀의 몸으로 무예를 익히셨어요?”
“아뇨. 원래 힘이 좀 세요. 송 현녀님, 우리 힘내요.”
“네.”
라희는 연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라희는 후궁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핍박을 당해오며 외로운 궁 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함께 할 수 있는 동지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황궁 온 첫날부터 이런 일을 겪는 연화에게 동정이 일기도 했다.
“그나저나 어째요? 련 채녀님도 명목뿐이지만 그래도 폐하의 후궁인데. 폐하의 얼굴조차 뵈올 수 없는 신세이니.”
“원래 이곳 후궁전은 이러한 곳인가요? 후궁 중에는 폐하를 뵙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그렇답니다. 저도 친한 상궁에게 들은 얘긴데요. 정비이신 원 귀비 마마조차도 폐하의 승은은 입지 못했답니다. 해서 원 귀비께서는 후궁들을 다스리고 군림하는 데에 낙을 삼고 외로움을 달랜다고.”
“정말 못됐군요.”
“원…….”
라희는 연화에게 반문하려다가 앞서 가는 상궁들을 힐끗 보고는 얼른 목소리를 낮추었다.
“원 귀비께서요?”
“아뇨. 황제 폐하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책임도 지지 않을 거면서 왜 아내를 많이 두는 걸까요? 분명 폐하께선 권위적인 노인네 같은 분일 거예요.”
“쉿! 누가 들어요.”
라희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말하면서 앞서 가는 상궁들을 다시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연화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이윽고, 라희는 연화와 헤어져 후궁 전에 있는 문서 보관소에 들어갔고 연화는 곡식 창고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상궁의 감시에 따라 곡식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곱디고운 붉은 혼인 옷의 소매를 걷어 올린 연화는 마치 전시에 선봉을 서는 장수처럼 위풍당당하게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상궁은 그런 연화를 피식 비웃으며 창고의 문을 닫았다.
‘아마도 무거운 곡식더미를 들지도 못하고 절절매겠지.’
상궁은 입궁 첫날부터 난데없는 고생을 하게 된 연화에게 그다지 동정심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황궁 안에서 이도저도 아닌 신세가 된 후궁들은 많았다.
상궁은 이튿날 동이 틀 때까지 창고의 문이나 지켜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밀려오는 지루함에 온 몸이 뻐근해지는 느낌이다.
“으랏차차!”
갑자기 창고 안에서 연화의 기합 넣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오는 바람에 상궁은 깜짝 놀랐다.
쿵-!
묵직한 뭔가가 바닥에 던져지는 소리에 상궁이 서있던 곳까지 크게 울렸다. 상궁은 놀라 황급히 창고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녀는 이내 눈알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 눈이 떠졌다. 창고 안에선 기장천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조그만 체구의 소녀, 연화가 자기 몸집만큼 커다란 곡식 섬을 번쩍 들더니 바닥으로 팽개치듯 내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백화당에서는 유모 유화가 연화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유화는 부산스럽게 백화당 앞에서 끊임없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수심이 그득했다.
연화의 소식을 들었는지 오라버니인 연우가 급히 백화당을 찾아왔다.
“유화, 연화는 어찌된 것인가?”
“말도 말아요. 연화 아가씨께서 대형 사고를 치셨어요.”
유화로부터 전후 사정을 들은 연우는 연화로 인해 근심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유화에게 다시 입을 연다.
“염려 말게, 유화. 연화는 잘해낼 걸세. 다만 연화가 지닌 힘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찌 될지.”
“그렇잖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누누이 일렀었습니다. 황궁 안에선 절대 튀지 말아야 된다고. 헌데 아가씨 제 말을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니. 이렇듯 천방지축 아가씨를 앞으로 어찌 할꼬.”
“지금으로썬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군.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네.”
연우는 신중하게 유화에게 답하고는 처소를 떠나갔다.
* * *
이제 노을이 지고 있는 청명한 하늘 아래 장엄한 금빛 기와가 햇살에 반짝거리고 있다.
3층으로 된 금빛 기와지붕 건물인 하늘본궁이 있고, 그 외에 여러 부속 건물들이 모여 있었다.
하늘궁 안에는 황제가 즐겨 찾는 활터가 있는데, 그곳엔 호위 무관 여럿과 여름 녹음 빛깔의 내관복을 입은 내관들이 시립해 있었다.
그 가운데, 온통 황금빛의 황제의 옷을 입고 하늘의 태양과 달을 새겨 넣은 황금 상투관 머리를 한 남자가 과녁을 향해 활의 시위를 당기고 있다.
그는 이십대 중반 즈음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였고 키는 훤칠한 것이 8척은 되어보였다.
그의 체구는 검술과 무예로 다져진 것처럼 풍채가 좋고 단단해 보였다.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는 황제의 눈빛은 창공을 가르는 한 마리의 매처럼 예리했다.
그러한 황제에게, 하늘 제국의 총리대신이자 황후의 아버지인 ‘예후’가 다가왔다.
자줏빛과 은백색과 밤하늘 빛깔의 비단 옷을 입은 총리는 사슬처럼 보이는 금목걸이를 하고 있었으며 금띠를 두르고 있었다.
예후는 긴 반백의 수염에 눈매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자였다.
“폐하. 또 이곳에 계셨군요.”
황제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계속 과녁을 향해 집중할 뿐이다.
“폐하, 오늘은 폐하의 하나 뿐인 따님인 황녀 전하의 생신이지 않습니까? 모처럼 장미 궁에 들르셔서 황후 폐하와 함께…….”
과녁을 향해 활을 조준하고 있던 황제는 별안간 방향을 틀더니 총리를 향하였다. 그리고 화살을 쏘는 것이었다.
황제가 쏜 화살은 총리의 얼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 이런! 살이 빗나가고 말았군. 그러게 과녁을 향해 집중할 때엔 말을 걸지 말았어야지.”
황제는 총리를 향해 차갑게 대꾸하고는 곁에 서 있는 내관에게 활을 건네었다.
그가 총리의 곁을 횅하게 스쳐가자 금빛 긴 옷자락이 조금 펄럭였다.
황제의 태도에서는, 일 년 내내 얼음과 눈으로만 땅을 덮는다는 북쪽 백색 대륙의 바람이 이는 것만 같다.
총리는 끄응 하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제는 그가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황제이다.
* * *
어느덧 날은 어두워져, 한 폭의 흑청 빛깔 비단 위에 흩뿌려진 것 같은 무수한 은빛 별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여인의 눈썹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이 밤하늘에 월백색의 미약한 빛을 물들이며 구름들을 흩고 있었다.
재 현빈의 처소인 적목련각 응접실에서는 여인들의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응접실로 들어서는 문의 하얀 문풍지로 새어나오는 등불의 은은한 빛에는 여인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도 묻어나오고 있었다.
“현빈 마마, 오늘 일로 인해서 그 연화라는 계집이 이곳 후궁 전이 어떤 곳인지 알았을 겝니다.”
“알아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 한참 모자란 계집이 아니겠는지요. 그나저나 송 현녀를 이참에 어떻게 해야겠어요. 송씨 계집은 얼굴이 반반해서, 집안이 변변치 못하다 해도 언젠가는 황제 폐하의 승은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제도 그 영악한 계집이 황제의 시야에 띄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승은을 입게 되면, 얼마나 기고만장해지겠어요. 그동안 당한 분풀이를 우리에게 하려 들 겁니다.”
“허면 현빈 마마께서는 송 현녀를 어쩌시렵니까?”
“제가 물색해 놓은 놈이 하나 있습니다. 그 놈에게 송 현녀를 범하게 해서, 황궁 밖으로 나가게 만들 겁니다. 송 현녀는 원 귀비 마마께서도 눈엣가시로 여기고 계시니 우리의 이러한 처사를 기뻐하실 겁니다.”
현빈의 처소, 응접실 문밖에는 공교롭게도 연화의 유모가 와있었다. 유화는 부디 연화 아가씨를 잘 봐주십사, 또한 엎드려 사죄할 겸 현빈의 처소를 찾아왔던 터였다.
현빈의 계획을 우연히 엿듣게 된 유화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세상에나!’
유화는 사색이 되어 조금 뒷걸음질을 쳤다.
‘이를 어째?’
유화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참으로 황궁은 화려함 이면에, 암투와 권모술수가 가득한 살벌한 곳이라 하더니.
연화가 입궁한 첫날부터 이리 직접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다. 유화는 돌이켜 앞뒤 생각할 것 없이 연화가 있는 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곡식 창고에 이르러 연화를 만나려 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상궁이 제지했다. 유화는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어 상궁에게 은밀하게 쥐어주었다.
은화가 손에 들어오자 이제껏 뻣뻣하던 상궁은 단숨에 태도가 달라졌다. 상궁은 주위를 살피더니 창고 앞을 떠나는 것으로, 유화가 연화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유화는 창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후궁전의 곡식 창고는 제법 컸다.
장정 두 사람이 마주 들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곡식 가마니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이야압! 으라차차!”
곡식 창고를 가득 메우는 소리는 기골장대한 장수의 기합소리와 같다.
입궁 첫날, 아니 새신부로서 보내는 첫날밤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성실히 노동 중인 연화를 본 유화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혼인 옷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무거운 곡식 섬을 어깨에 짊어졌던 연화는 저만치 곡식 무더기 위에 내던졌다. 곡식 섬이 무더기 위로 던져지자 묵직한 소리가 유화의 고막을 울렸다.
쿵-
“연화 아가씨.”
“이야합!”
연화가 또 다시 곡식 섬을 천하장사처럼 들어올렸다.
“아가씨, 큰일이어요.”
“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