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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련
작가 : 고은설
작품등록일 : 2017.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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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트머리 후궁 수배령
작성일 : 17-07-25     조회 : 279     추천 : 0     분량 : 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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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트머리 후궁 수배령>

 

 

 연화는 곡식 섬을 든 채로 유화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힌 연화의 몰골이 유화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황궁에 입궁하게 되면 지아비의 사랑은커녕, 이도 저도 아닌 찬밥 신세가 될 거라 여기긴 했었다.

 

 하지만 첫날밤부터 곡식 섬이나 옮기는 노동을 밤새 하는 신세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이제껏 물 한방울 손에 안묻히고 컸던 아가씨인데, 연화의 처지가 민가의 아낙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드니 속이 상했다.

 

 유화는 현빈의 처소에서 엿들었던 말을 전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의협심이 충만하고 오지랖까지 넓은 탓에, 지금도 괜한 고생을 하고 있는 연화의 얼굴을 보니 유화는 제정신이 들었다.

 

 분명, 이 일을 얘기했다가는 팔을 걷어붙이며 송 현녀를 구하려 들게 뻔했다. 그리 되면 연화만 또 입궁 첫날부터 연이어 대형 사고를 치게 되는 셈이 아닌가.

 

 평탄한 황궁 생활은 영영 물 건너가게 된다.

 

 유화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도로 창고를 나가려 했다.

 

 “뭐야? 유모. 무슨 일 있는 거지?”

 

 누군가 말을 꺼내려다 말면, 괜히 더 궁금해지게 마련이다. 연화는 들고 있던 곡식 섬을 내려놓고 유화에게 다가갔다.

 

 “바른 대로 말해. 황급하게 여까지 찾아온 이유가 분명 있잖아.”

 

 “아니어요. 그냥 아가씨가 잘하고 계신지 하도 궁금해서 와봤어요.”

 

 “유모, 내가 유모를 몰라? 바른 대로 말해. 안 그럼, 나 곡식 정리이고 뭐고 다 때려 칠 거야.”

 

 “아가씨이.”

 

 “얼른 말하라니까. 큰일이라며?”

 

 극심하게 갈등하던 유화. 결국 연화에게 토설하고 말았다.

 

 “그게 말이에요. 적목련 처소에 있는 재 현빈 말이에요.”

 

 “재 현빈? 누군데?”

 

 “금세 잊었어요? 아까 아가씨한테 당한 후궁 있잖아요.”

 

 “아하.”

 

 “그 현빈이 후궁들이랑 모략하기를, 오늘 밤에 웬 놈을 시켜 송 현녀를 범하게 만든 다음, 황궁으로 내쫓는다고.”

 

 “뭐야? 그런 쳐 죽일!”

 

 연화는 급 흥분을 하며 주먹을 부르르 떨듯 쥐었다.

 

 “연화 아가씨! 이제는 후궁 마마님도 되셨는데 그 입 좀 아녀자답게 하셔야죠. 그나저나 이젠 어떡하죠?”

 

 “어떡하긴,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어차피 아가씨는 오늘 밤 꼬박 이 곡식 정리를 하셔야 되니까 잠자코 있어요. 그래야 황궁 생활이 편해져요.”

 

 “지금 이 곡식이 문제야? 동료가 위기에 처했는데.”

 

 “지금 동료라고 하셨어요?”

 

 유화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연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유화에게 말을 했다.

 

 “유모, 지금 우리 옷 좀 바꾸어 입자.”

 

 “예?”

 

 “유모는 내 옷 입고 오늘 밤 여기서 곡식 정리 다 해놔. 난 라희를 구하러 갈게.”

 

 “예에?”

 

 

  * * *

 

 유화와 옷을 바꾸어 입은 연화는 곡식 창고를 슬그머니 나왔다. 유화가 입던 옷은 흰색 바탕에 소매와 옷깃이 남색인 상의였고, 무늬 없는 남색 치마였다.

 

 연화에게는 조금 헐렁해서 옷 입은 맵시가 어색한 감이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 할지, 창고 문 앞에는 지키고 있던 상궁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어느 정도, 곡식 창고에서 멀어진 연화는 좌우를 홱홱 살피고 있었다.

 

 날이 어둑해지니, 드넓은 후궁전 안은 이곳이 저곳인 것 같고, 이 길이 저 길인 것 같다.

 

 “분명, 이 방향이었는데.”

 

 가다가 길을 잃은 연화. 지나던 궁녀를 붙들고 문서보관소의 방향을 물었다. 연화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하는 그 궁녀는 의심 없이 길을 가르쳐주었다.

 

 ‘별일 없어야 하는데.’

 

 연화는 라희가 있는 그곳으로 곧장 내달렸다. 곧, 문서를 보관하는 건물이 저만치 보였다. 1층으로 된 아담하고 고풍스런 건물이었다.

 

 안에는 등불이 켜 있는지, 창으로부터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상하게도 감시하는 상궁이 없다.

 

 연화는 건물로 다가가다가 멈칫하고 근처에 있는 나무 뒤에 얼른 몸을 숨겼다. 검은 복면 차림을 한 사내 둘이 문서 보관소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저 놈들이군.’

 

 연화는 고개를 홱홱 돌려 다시 주변을 살피었다. 사위는 어둠이 잠식해 있었고 인적도 없어 고요했다. 미풍이 나무의 잎사귀에 스치는 소리마저 민감하게 들려올 정도이다.

 

 해가 지기 전에는 지나던 궁인들이 그리 많더니, 지금은 사방이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연화는 발걸음을 문서 보관소로 옮겼다. 방금 전까지, 불빛이 새어나오던 창이 일순 불이 커져 캄캄해졌다.

 

 그것을 본 연화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마음이 초조하고 조급해졌다.

 

 이제껏 연화는 어릴 때 죽을 만큼 크게 앓았던 이후로는 지극히 평탄한 삶을 살아왔었다. 봄의 나른한 오후의 한때처럼,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연화의 삶은 늘 그러했다.

 

 황궁으로 입궁하는 것이 결정되어지기 전까지는.

 

 그런데 오늘 하루, 특히 이 밤은 어쩐지 이제까지의 평범하던 일상과 일별하고 무척 다이나믹할 것만 같다. 그녀는 지금과 같은 살벌한 상황은 맞닥뜨려 본 적이 없었다.

 

 연화는 황급히 다가가 문서보관소의 문을 열려 했다. 그런데 안에서 잠긴 듯 문이 열리지 않았다.

 

 연화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안에 현녀 마마 있어요?”

 

 안에선 쥐죽은 듯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쿵쾅 대는 소리가 짤막하게 들려왔다.

 

 라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마음이 급해진 연화는 ‘으라차차’ 하며 문고리를 잡고 잡아당겼다.

 

 이내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문고리뿐만 아니라 문짝까지 우지끈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 안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꺄악!”

 

 연화는 반쯤 뜯어진 문을 과격하게 발로 뻥 찼다. 그러자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저만치 떨어져나갔다.

 

 “현녀 마마!”

 

 연화는 있는 힘껏 라희를 불렀다. 그녀의 커다란 목청에 힘이 실리자, 이곳 근방이 연화의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다.

 

 문서보관소 실내는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연화를 붙들었다.

 

 엎치락뒤치락할 것도 없이, 연화는 그 사내를 붙들어 강력한 힘으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악!”

 

 훈련된 장정이 가냘픈 소녀의 우격다짐에 저항 한번 못하고 허수아비마냥 팔랑거리며 바닥에 내리꽂혀진 것이다.

 

 또 다른 사내도 연화를 향하여 공격을 해왔다. 그가 주먹을 날리자, 어둠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던 연화는 그대로 맞아 나가떨어졌다.

 

 “꺄악!”

 

 너무나 아프다. 난생 처음 맞아보는 연화이다. 그 와중에 연화는 생각했다.

 

 ‘이씨. 나 이래봬도 곱게 컸는데. 우리 아버지 냉랭한 분이어도 손찌검 한번 안하셨는데.’

 

 너무 아파서 연화는 바닥에 쓰러져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남자가 연화의 멱살을 붙들고 일으켰다.

 

 그때, 연화는 돌덩어리 같은 머리로 남자의 이마에 세게 박치기를 했다.

 

 딱-!

 

 바가지 깨지는 듯한 파열음이 일었다.

 

 “아윽!”

 

 남자가 비명 소리를 내며 이마를 부여잡자, 연화는 그 남자를 번개같이 붙들고 번쩍 들어서 어느 한곳을 향해 세게 내던졌다.

 

 그러자 그 사내는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쳐 ‘와장창’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졌다.

 

 결국, 후궁전의 문서보관소는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연화는 뱁새 같은 작은 눈으로 어둠 속을 훑으며 라희를 찾았다. 어둠 속이라 잘 식별이 되지 않았다.

 

 “라희님! 괜찮아요?”

 

 그녀가 라희를 부르자, 어느 한 곳에서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가 화답하였다.

 

 “련 채녀님이세요? 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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