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8년.
대장군 파르가의 코우 정벌 시도와 대공 코리옌의 방해는 계속 됐다. 귀족들의 부정부패와 한 번 원정을 떠날 때마다 부담되는 엄청난 돈으로 인해 대제국은 불과 8년 만에 흔들리고 있었다.
육년 간 바뀐 것이 있다면 ‘마법석’이라는 신비한 돌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이었다. 마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던 중 발견된 마법석. 마법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 그냥 돌멩이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는 엄청난 금액에 거래 되었다.
대장군 파르가는 마법석의 존재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제대로 된 마법병을 양성하기 위해 드는 어마어마한 시간. 그것을 마법석으로 대폭 단축할 수 있게 됐으니, 코우 정벌이 더욱 쉬워질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마법석의 존재는 대장군 파르가의 생각처럼 긍정적인 효과만 보이지는 않았다. 점점 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해갔고, 마법석을 이용해 힘을 얻은 자들이 곳곳에서 세력을 형성. 어느새 대도시들을 제외하고는 제국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파르가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고 싶다며 코우 정벌을 황제에게 적극적으로 간언한다. 나라 안이 혼란스러운 데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전쟁 주장. 황제는 결국 전장의 동료였던 파르가의 손을 들어줬다.
제국 8년 5월. 결국 황제는 ‘통일 대업’이라는 명분을 들어 파르가에게 코우 정벌에 대한 전권을 ‘황명’으로 일임한다.
페이도스 지방 북부, 비함사막-
밤이 되자 사막에는 턱이 덜덜 떨릴 정도의 추위가 몰려왔다. 옛날 무역의 나라였던 페이도스. 이제는 국명(國名)에서 지명(地名)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사막을 오고가는 상인들의 행렬은 변함이 없었다.
이미 반나절 이상 모래바람을 정면으로 맞아 찌든 상인들. 낙타의 등에서 짐을 내리고, 천막을 설치하는 일조차 곧 쉴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도저히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짐을 모두 내려 천막을 덮고, 자신들이 쉴 천막을 치는데, 저 멀리, 달빛 덕에 희미하게 보이는 지평선. 흙먼지가 날리는 게 보였다.
“도적, 도적이다!”
망원경으로 흙먼지가 날리는 쪽을 보던 자가 소리를 쳤다. 스무 명도 넘는 상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흙먼지. 어느새 망원경 없이도 모습을 확인할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몇몇은 낙타에 올라 도망치고, 몇몇은 무작정 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지 마!”
상단주가 이들을 진정시켜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의 부하가 다급하게 낙타를 끌고 와 입을 열었다.
“상단주님. 일단 피하시지요!”
상단주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어쩔 수 없이 낙타에 올랐다.
“이봐. 날 돈 주고 고용했으면 써먹어야지. 그냥 내빼면 어쩌겠다는 거야.”
낙타를 탄 상단주의 뒤에서 들린 앳된 목소리. 상단주가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흰색 천을 머리부터 뒤집어쓴 남자가 서있었다.
“도적놈들 때문에 당신을 고용하긴 했지만…. 저 녀석들 딱 보기에도 수십 명은 돼 보이는데 괜찮겠나?”
상단주의 물음에 남자가 뒤집어쓰고 있던 천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남자의 복장은 허름했나. 겉에 걸친 모래색의 외투.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모양의 가죽신발. 외투 안으로 보이는 헤지고, 기운 자국의 바지와 상의가 보였다. 살짝 붉은 빛이 도는 머리카락과 까만 눈동자는 묘한 부조화를 이뤘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눈엔 옅은 쌍꺼풀이 보였다. 이제 갓 어린아이 티를 벗은 듯 보이는 청년. 아니, 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앳된 얼굴.
상단주가 대륙 최고의 정보 수집 단체인 ‘아벨’을 통해 고용한 용병이었지만, 170cm 정도 돼 보이는 키와 그리 크지 않은 덩치. 변변찮은 무기도 안 들고 있는 모습이 썩 믿음직스럽진 않았다.
“저 녀석들 처리하면 100만 헤트 추가. 어때?”
그 말에 상단주가 낙타 위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잡다한 놈들이나 막을까 하고 그나마 싼 놈을 고용한 게 탈이었을까. 몸값 100만 헤트인 놈이 자기 할 일 한다고 100만 헤트를 추가로 요구하니 상단주 입장에서는 당연히 환장할 노릇이었다.
상단주가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맹렬히 달려오는 도적들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래. 어차피 못 막으면 못 주는 거잖아. 아니지, 저 놈이 못 막으면 손해가 100만 헤트랑은 비교가 안 돼. 빌어먹을 제발 막아다오’
“좋아, 준다! 100만 헤트. 저 놈들만 막으면 100만 헤트 추가로 준다!”
상단주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소년이 상단주의 옆을 스치고, 모래먼지가 일고 있는 도적들 쪽으로 뛰어갔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에 상단주는 아주 작게나마,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일대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는 카이르 도적단. 약 사십 명 정도 되는 인원이 상단 행렬을 향해 빠르게 말을 몰고 있었다. 맨 앞에서 말을 모는 두목 카이르. 2m는 돼 보이는 커다란 키에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기른 수염과 햇볕에 그을려 검게 탄 얼굴. 왼쪽 뺨에 길게 난 흉터. 자기 말론 옛날에 드래곤과 싸우다 난 상처라지만 누가 봐도 그것은 칼자국이었다.
카이르가 송곳니가 다 보일 정도로 입 꼬리를 올리며 옆에 따라오는 부하 쪽을 바라봤다.
“이봐, 저 녀석들이 가지고 오는 게 뭐라고?”
“케이론 지방의 최고급 물개 가죽과 바다사자 이빨이랍니다!”
“오, 그래? 요즘 물개가죽 지갑이랑 신발이 페이시티 갑부놈들 사이에서 유행이라지?”
“바다사자 이빨로 만든 귀걸이도 값을 제법 받는답니다.”
“좋아, 좋아. 오랜만에 만난 대어구만!”
카이르가 호탕하게 웃으며 더욱 말을 빠르게 몰았다. 그때 옆에 있던 부하 하나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두목, 앞에 뭐가 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카이르의 시선도 앞으로 향했고,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그들의 돌진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냥 밟고 가라!”
카이르가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멈추지 않는 도적들. 점점 그들은 소년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카이르의 바로 옆에 있던 부하 하나가 말을 더 빠르게 몰아 앞으로 치고 나갔다. 카이르의 부하가 칼을 뽑아들고 허공에 붕붕 저었다.
“이건 신종 자살법이냐!”
그 칼이 소년에게 닿기 직전,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소년의 온 몸에서 휘몰아쳐 나온 화염이 순식간에 카이르 부하와 말을 휘감았고, 잠시 타오르던 불꽃이 약 2초 뒤에 꺼졌다. 소년의 몸을 휘감았던 불꽃도 이미 사라진 뒤였다.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가 툭하고 모래에 쓰러졌다. 카이르가 놀라서 말을 멈추자, 뒤 따르던 그의 부하들도 모두 멈춰서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카이르는 지금의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소년과 시체를 번갈아 바라봤다.
“두목. 방금 마, 마법….”
뒤에 있던 부하 하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곧 뒤의 부하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카이르가 허리에 차고 있던 커다란 반달 모양의 대도(大刀)를 뽑아 들었다.
“멍청한 새끼들. 세상에 마법사는 마법단 소속 군인들뿐이야! 그 자식들은 자기 맘대로 퇴역도 못한다고! 요즘 개나 소나 마법석을 들고 날뛴다더니 저 자식도 분명 그런 놈들 중 하나겠지.”
카이르가 자신만만하게 말을 앞으로 몰았다. 카이르는 칼을 휘두르면 바로 소년에게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이봐. 너 뭐하는 놈이야?”
“용병이다.”
“하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아? ‘사막의 투마(鬪馬)’라 불리는 카이르 님이다! 뒤에 내 부하만 마흔 명이 넘어.”
“그래서 뭐.”
소년의 퉁명스러운 대답. 살짝 웃고 있던 소년의 눈이 매섭게 변하고, 카이르가 살짝 쫄은 듯 움찔했다가 뜬금없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요 맹랑한 꼬맹이 같으니라고, 이런 놈을 용병이라고 돈 주고 고용하다니. 이 카이르님이 직접 상대할 필요도 없겠구먼.”
카이르가 말 머리를 돌려 뒤로 가며 손짓하자 대기하던 부하들 중 셋이 맹렬하게 말을 몰았다. 그들이 칼을 뽑아 들고 소년을 치려는 순간, 다시 한 번 일어난 불길. 그 셋은 맨 처음 덤볐던 자와 똑같은 신세가 됐다.
부하들이 동요하고 있었지만 카이르는 최대한 태연한 척 칼을 어깨에 턱하고 걸쳤다.
‘그 비싼 마법석을 몇 개 씩 가지고 다닐 리는 없겠고. 조금만 더 힘을 쓰게 하면 마법석 힘이 다할 거야. 그런데…, 마법석이 얼마나 가지…. 쓴 적은커녕, 본 적도 없으니 알 수가 있나….’
카이르가 부하들을 더 공격시키려고 주위를 살폈다. 부하들은 모두 겁먹은 표정으로 카이르를 보고 있었다.
“뭐, 뭐야. 너희….”
“두목. 두목이 실력을 보여주십시오!”
“맞습니다. 저희 같은 잔챙이는 상대가 안 됩니다. 사막의 투마! 카이르 님께서 나서실 땝니다!”
부하들의 말에 카이르가 당황한 듯 땀을 흘렸다. 어느새 부하들이 모두 카이르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카이르가 무엇인가 결심한 듯 칼을 허공에 몇 번 멋있게 휘둘렀다.
“좋아! 사막의 투마, 카이르 님의 대도 앞에 적은 없다!”
카이르가 말을 몰고 다시 소년 쪽으로 다가갔다. 소년은 그 모습이 지루한 듯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었다.
“이제 끝났어?”
소년이 자신의 붉은빛 도는 머리카락 몇 가닥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카이르는 바로 공격하지 않고 다시 위풍당당하게 칼을 허공에 휘둘렀다.
“꼬맹아. 마지막 기회다. 지금 도망가면 쫓지 않으마.”
“너야 말로 그냥 좋은 말로 할 때…. 아, 너 혹시 현상금 걸려 있냐?”
그 말에 카이르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래. 이 자식. 내 현상금을 알면 무서워서 도망갈지 몰라.’
“그거 좋은 질문이군! 그래. 이 사막의 투마, 카이르 님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무려 50만 헤트! 어때, 이제 좀 오금이 저리냐?”
카이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소년의 반응은 그의 의도를 깨끗하게 빗나갔다.
“아, 그럼 시체는 온전히 남겨야 되잖아. 힘 조절이 되려나.”
소년이 자신의 손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카이르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사막에 즐비한 도적들. 물론 그 중 카이르가 최상위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름 수많은 싸움을 거치며 단 한 번도 진적이 없는 몸이었다.
카이르가 칼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그 아래 있는 것은 카이르의 대도에 닿는 순간 흔적도 남지 않고 터질 것 같은 소년의 작은 머리.
예전에 군대가 직접 토벌하러 왔을 때도 잡히지 않고 무사히 도망 다녔으며, 오히려 군마(軍馬) 세 필을 약탈한 자신이었다. 군대라고 해도 열 명 남짓한 숫자의 일개 분대였지만…. 어찌 되었든 군대를 상대로도 살아남았던 몸. 사막의 투마, 카이르!
“아, 힘 조절 또 못했네.”
는 여기서 잠들었다.
화염에 휩싸인 카이르의 몸이 사막의 모래에 툭, 쓰러졌다. 불이 사라지자 새까맣게 탄 카이르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고, 뒤에 있던 카이르의 부하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아, 50만 헤트 더 벌 수 있었는데….”
소년이 안타까운 듯 쭈그려 앉아 카이르의 시신을 바라봤다.
“에이. 그래도 100만 헤트 더 번 게 어디야.”
다시 소년이 빙긋 웃으며 일어났다.
‘역시 세 번이나 썼더니 지치네. 그 자식들 도망가서 다행이지, 덤볐으면 큰 일 날 뻔했어. 힘 조절하는 게 빨리 익숙해 져야 되는데. 그보다 사막의 투마…. 뭔가 멋있는데 나도 별명 하나 만들면 몸값 좀 올라가려나.’
소년이 피곤한 듯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상단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