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도스 지방의 주도(州都), 페이시티-
한 때 군사 강국이었던 페이도스. 그 수도였던 페이시티. 상가의 화려한 모습, 깨끗한 흰색,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들. 뾰족한 지붕이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 있었다.
이런 외관만 보면 옛날의 번영을 다시 찾은 듯 보였지만 페이시티의 실상은 골목에 있었다. 골목마다 술을 먹고 뻗은 사람들. 쥐들이 들끓었고, 화려한 정문과 비교되는 골목 쪽 뒷문들이 건물마다 있었다. 그 뒷문의 숫자만큼 안으로 들어가면 도박장들이 있다는 것은 현재 페이시티 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잘 들어오지 않는 페이시티의 골목으로 들어오는 것은 사막의 투마, 카이르를 단 번에 제압한 붉은빛 머리의 소년이었다.
옛날 켄홀리 상단의 상단주였던 켄홀리 퍼킨. 그에 대한 기억은 이제 사람들에게서 점점 잊히고 있었다. 그러니 부상단주가 몰래 데리고 도망쳤던 퍼킨의 아들. 타윈의 존재 또한 부상단주가 병으로 죽으며 아는 사람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이 붉은빛 머리의 소년, 타윈은 이제 어린 현상금 헌터로 사람들의 머리에 기억돼 갈 뿐이었다.
타윈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잡한 페이시티의 골목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타윈이 도착한 곳은 막다른 골목. 그 막다른 골목에는 군인들이 쓰는 천막 하나가 쳐져 있었다.
타윈은 망설임 없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 왔어요. 나 왔어, 내가 왔어. 돈을 받으러 내가 왔어요.”
타윈이 능청스럽게 흥얼거렸다. 살짝 웃는 타윈의 눈꼬리가 더욱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천막 안에는 남자 하나가 팔로 머리를 받친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갈색 피부에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타윈보다 한 세, 네 살 많을까. 마른 몸매와 날카로운 턱이며, 코 때문에 첫인상은 냉정해 보였지만, 목소리는 의외로 약간 중저음이었다.
천막 안에는 가운데 탁자만 하나 놓여 있을 뿐, 별다른 것은 없었다. 아마 벽에 ‘아벨’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여기가 대륙 최고의 정보 수집 단체. 아벨의 페이시티 지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웬만한 용병들이나 상인, 부자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지금 누워있는 이 남자. 이 남자가 바로 아벨 페이시티 지부의 담당자. 칸이었다. 겨우 스물 셋의 나이에 지부를 담당하게 된 만큼 빠른 두뇌 회전과 계산 능력은 물론, 그 험악한 현상금 헌터들을 상대할 담력까지 가진 인재였다.
칸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데 타윈이 맞은편에 앉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임무 완수. 돈 줘. 돈.”
“너부터 내놔.”
칸이 타윈이 내민 손을 툭 쳐내고 오히려 자기가 손을 내밀었다. 타윈이 활짝 웃으며 자신의 외투 속주머니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타윈이 종이를 건네자 칸이 내용을 확인했다. 종이는 ‘용병 고용 확인서’였다. 거기에는 고용주와 용병의 이름과 둘의 서명, 금액이 적혀 있었고, 맨 밑에는 임무 완수 여부라는 체크란이 있었다. 거기에 적힌 고용주의 서명.
칸이 그것을 확인한 후 똑바로 허리를 펴고 앉았다. 칸의 표정에는 귀찮음이 잔뜩 묻어 있었으나 돈을 받을 생각에 들뜬 타윈은 그런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칸은 자신이 깔고 누워 있던 요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요 밑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지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윈이 그것을 보고 감탄한 듯 입을 헤 벌렸다.
“역시 아벨…. 돈이 막 널려 있네….”
“아니, 딱히 아벨이 대단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돈 깔고 자는 게 기분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거야.”
칸이 대충 지폐 몇 장을 주워 가지런히 하고 세기 시작했다. 타윈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따라서 세다가 ‘열’에서 멈췄다. 제국에서 가장 고가 지폐인 10만 헤트짜리 지폐 열 장. 100만 헤트였다.
타윈이 얼른 그 돈을 가져가려는데 칸이 팔을 거뒀다. 칸이 그 열장의 지폐 중 한 장을 빼 다시 자신의 요 밑에 넣었다.
“소개비 10퍼센트.”
“와, 도둑놈.”
“아벨의 규칙이야.”
칸이 나머지 아홉 장을 내밀자 타윈이 힘없이 받아 자신의 지갑에 넣었다. 칸이 다시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처음과 같은 자세로 누웠다.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자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몽롱한 표정이었다.
“아, 칸. 이번에 사막의 투마라는 놈 처리했어. 다 타버려서 현상금은 물 건너갔지만.”
“사막의 투마? 아, 그 허풍쟁이 카이르. 일단 죽었단 말이지. 다른 지부에 연락해 둬야겠네.”
칸이 펜을 들어 자기 옆에 있던 수첩에 ‘카이르 사망’이라 삐뚤삐뚤 적기 시작했다. 이제 이 정보는 전국의 아벨 지부로 갈 것이다. 만약 모르고 ‘카이르’와 관련된 의뢰를 맡기는 자가 있으면 아벨의 지부 담당자가 친절히 설명해줄 것이다. 카이르는 이미 사망했다고.
“나도 별명을 하나 만들까?”
뜬금없는 타윈의 말에 칸이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별명? 갑자기 뭔 별명?”
“별명이 있으면 사람들이 기억하기도 쉽고, 그럼 더 유명해지고 몸값도 오를 거 아냐.”
타윈은 생각만 해도 좋은지 눈이 반짝거렸다. 용병, 헌터들에게 인지도란 즉 몸값. 이름 난 용병, 헌터들의 몸값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났다. 물론 맡는 임무도 그만큼 난이도가 높아졌지만.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다면 용병과 헌터의 차이. 용병은 평화가 끝나고 여섯 나라의 전쟁이 레오트 왕국에 의해 시작했을 당시 생겼다. 병력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 돈을 주고 고용한 실력자들. 그들이 용병이었다.
그에 반해 헌터는 현상금이 걸린 수배범들을 잡거나, 부자, 귀족들에게 돈을 받고 원하는 임무를 수행해주는 자들이었다. 국가에 고용되느냐, 개인에 고용되느냐의 차이랄까.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레오트 제국의 사실상 대륙을 통일한 현재. 용병과 헌터의 차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당시 용병들이 거의 다 헌터의 일을 하고 있으므로, 용병이라고 부르는 자도, 헌터라고 부르는 자도 있었다.
칸이 펜을 놓고 타윈 쪽을 바라봤다.
“그래서 뭐라고 짓게?”
“글쎄…. 음, 음…. 화염 늑대 타윈!”
타윈이 자신 있게 말하고, 천막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칸의 새어 나온 웃음이었다.
“푸하하. 화염 늑대래. 와, 어린애냐?”
칸의 비웃음에 타윈이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돌아앉았다.
“아, 별명은 천천히 생각해보고…. 중요한 건 내가 몸값을 올리려고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거지! 지금 이렇게 벌어서 언제 일억 오천만을 벌겠어!”
“그렇게 해서 일억 오천만 헤트를 언제 버냐?”
“그러니까. 형님, 불쌍한 동생을 위해서 쪼-금만 깎아 주면 안 되나요?”
“죄송하지만, 아벨에 할인은 없다는 것이 규칙입니다. 손님.”
아까까지 미소를 짓던 칸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타윈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칸이 피식 웃으며 누운 채 슬쩍 타윈 쪽으로 다가갔다.
“일억 오천. 단번에 해결할 방법이 있지.”
“뭐? 뭔데?”
칸의 말에 타윈의 눈이 반짝였다.
“너희 스승님. 대마법사 그라함의 위치만 말해주면 돼.”
“뭐?”
“전국 열 개 지부 통틀어서, 그라함의 위치만 알려주면 이억 헤트를 준다는 놈이 무려 세 놈이야.”
“이, 이억 헤트? 스승님 현상금이 일억 팔천인데…. 이억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타윈의 말에 칸의 입 꼬리가 씩 올라갔다.
“명예지, 명예. 전(前) 마법군단장이자 유일한 마법군단의 탈영자. 현재 현상금 최고액이자 현존하는 마법사 중 최강이라는 그라함을 이기면 얻게 된 명성. 그로 인해 뛸 자신의 몸값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 정도 투자해 볼만 하지.”
타윈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칸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날렵하게 몸을 일으켜 앉아 타윈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니까, 타윈. 이 형한테 말해봐. 그러면 네가 원하는 그 ‘일억 오천짜리 정보’는 퉁 쳐줄게.”
칸이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하며 얼굴을 타윈 쪽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타윈이 살짝 당황한 듯 몸을 뒤로 뺐다.
“뭐, 뭐?”
“위치만 알려달라는 거야, 위치만. 형한테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칸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윈이 얼른 칸을 밀어내고 멀리 떨어진 천막 한 쪽 구석으로 기어갔다.
“미, 미안하지만, 스승님을 배신할 순 없어. 별 일 없으면 가, 간다.”
타윈은 일어나 나가려고 천막 입구를 젖힌 순간,
“으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입구에 서있는 것은 커다란 새. 독수리만한 크기에 머리 부분은 붉은 색, 날개는 까만 색, 몸은 흰 색 깃털이 난 우스꽝스럽게 생긴 새였다. 눈은 단추처럼 동그랗게 생겼고, 부리는 커다란 고깔모자를 뒤집어 씌워 놓은 것 같았다.
“뭐야, 헬리…. 깜짝 놀랐잖아.”
타윈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대륙에서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생물은 단 둘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본 사람도 별로 없는 아니, 그것조차 진짜인지를 알 수 없으니 세상에 존재하는 지조차 알 수 없는 존재. 드래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이 ‘헬리핀’이라는 새였다.
지능도 제법 높고 순종적인 데다 기억력도 좋아, 옛날에는 군용으로 멀리 있는 아군에게 말을 전하는 데 많이 사용했었다.
지금 이 천막 앞에 서있는 헬리핀은 칸이 키우는 새로, 이름은 헨리. 칸이 정말, 정말 대충 이름을 지었었다.
헬리의 역할은 각 지부끼리 정보를 교환하거나 지내는 곳이 정해져 있는 헌터에게 임무를 알리는 것. 헬리가 다른 헬리핀과 다른 점이라면 머리가 두 개인 기형(奇形)이라는 것. 칸은 둘을 구분하기 위해 좌헬리, 우헬리라고 불렀다.
“타윈이다. 타윈.”
“그러게 바보 타윈이네.”
좌헬리와 우헬리가 타윈을 보며 번갈아 말했다. 타윈이 그 말에 울컥해 뭐라고 말하려는데, 뒤에 있던 칸이 선수를 쳤다.
“헬리. 송경 지부에서 무슨 말 있었어?”
“있었다. 송경 지부. 의뢰 하나 맡을 사람이 없다. 이쪽에서 맡을 사람 있으면 보내라.”
우헬리의 갈라진 목소리가 끝나자 좌헬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뢰금 칠백만 헤트. 임무 성공 시 추가금 줄 수 있다.”
“치, 칠백만?”
그 말에 타윈의 눈이 뒤집혔다.
상운 지방의 주도인 송경. 상운 지방은 페이도스 지방의 동쪽에 마주한 지방이었다. 송경은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도시였기에 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 금액인데 송경 쪽에서 맡겠다는 헌터가 없다고? 대체 무슨 일….”
“내가 할게, 내가!”
타윈은 칸의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 손을 번쩍 들었다. 칸이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잠깐 타윈 무슨 일인지 한 번 들어보고….”
칸이 말리려고 했지만 타윈은 좌헬리의 목에 걸려 있던 의뢰서를 가지고 순식간에 천막을 나갔다.
칸이 멍하니 열린 천막 입구를 통해 멀어지는 타윈을 바라봤다. 헬리도 그런 타윈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둘 아니, 셋이 눈을 마주쳤다.
“임무가 뭐야, 헬리?”
“임무, 의뢰인. 패형소. 의뢰인 위치, 송경의 북쪽 산, 반군 진영.”
“바, 반군 진영?”
좌헬리의 말에 반쯤 감겨 있던 칸의 눈이 동그랗게 됐다. 이어 우헨리가 입을 열었다.
“임무, 목표물 제거. 목표물, 송경 영주. 타미스 한 도르.”
“타, 타미스 한…, 도르라고?”
칸은 온 몸의 힘이 빠지며 축 늘어졌다.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송경의 영주, 타미스 한 도르. 영주를 죽이는 것에 반란군과 연결된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모두가 꺼릴 일. 심지어 송경 영주 타미스 한 도르라면 황제의 사촌동생이었다. 오히려 임무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
“타, 타윈…. 이거… 큰일인데….”
칸은 그제야 송경 쪽에서 왜 맡겠다는 사람이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