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한 달 전. 레오트 제국 수도. 마오텐-
온갖 점포들이 늘어선 화려한 거리. 어디서든 보이는 황제의 화려한 궁전. 제국의 수도, 마오텐은 다른 곳들과는 동떨어진 곳처럼 평화로웠다. 특히 궁전 주위로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귀족들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당연 눈에 띄는 건물은 일명 소운궁(小雲宮).
기와를 얹은 지붕에 건물 대부분이 나무로 지어져 있었고, 넓은 마당에는 연못까지 있었다. 마당 여기저기 심어진 각종 나무들이 봄에 꽃잎을 날리고, 가을에 낙엽을 날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옛날 상운국 왕이 거주하던 송경의 대운궁(大雲宮)을 본 따 만들고, 그 이름을 빗대 이름을 지은 저택. 현재 이 저택에 지내는 것은 상운국 마지막 왕인 천주양의 동생, 왕제(王弟) 천주윤.
“저하께서 벌써 가시나?”
마당에 마련된 마차를 보고 지나가던 남자가 근처 하인들에게 물었다.
왕수문. 길쭉하게 하늘로 뻗은 흑색 모자, 살짝 자줏빛이 도는 겉옷은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려와 있었으며 소매와 옷자락 모두 넓고 길어, 바람이 불면 나풀거렸다. 살짝 길쭉한 얼굴에 가는 눈썹,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 때문에 그의 인상이 날카롭게 보였다.
지금은 비록 소운궁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한때 상운국에서 세금을 관리하던 대신이었다. 그의 깐깐하고 한 치의 실수도 용납 못하는 성격은 아랫사람들을 굉장히 힘들게 했다.
“예. 지금 바로 출발하신다고 합니다.”
하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나무로 된 마루에 나온 남자. 길게 기른 머리를 뒤로 한 번 묶는 상운국의 풍습. 그에 따라 묶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걸을 때마다 살짝 씩 흔들렸다.
하얀 피부, 날렵한 콧날과 턱선. 상운국의 통 넓은 옷을 입었음에도 그의 여리여리한 체구를 알 수 있었다. 크진 않았지만 살짝 긴 눈이 왕수문을 보고 웃었다.
“수문. 또 무슨 일로 그렇게 화가 난거야.”
천주윤이 잔뜩 찌푸린 왕수문의 미간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수문이 성큼성큼 천주윤의 앞으로 다가와 위아래로 그의 복장을 훑어봤다.
푸른빛이 은은하게 퍼져 있는 겉옷. 검은색 신발. 단정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던 왕수문의 눈이 천주윤의 머리로 갔다.
“모자는 안 쓰실 생각입니까?”
“어, 어? 모자…. 그게, 답답해서….”
천주윤이 살짝 주눅 든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왕수문의 미간사이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왕제 저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저녁 식사 초대입니다!”
“쉿, 쉿. 수문. 누가 듣겠어.”
천주윤이 주위를 살피며 얼른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왕수문이 최대한 화를 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예. 제가 좀 흥분했군요. 황제 폐하의 식사 초대에 모자도 쓰지 않고 가려 하시다뇨. 결례입니다.”
“알았어…. 모자 쓰고 가면 되잖아.”
천주윤이 힘없이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다. 그때 마루 끝에 앉아 있던 천주윤의 호위무사 일환이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짧게 자른 머리와 턱 언저리의 칼자국이 눈에 띄는 남자였다. 왕수문이 이번엔 일환을 노려봤다.
“일환. 저하의 호위를 맡았으면 조금 더 긴장하지 그러나. 지금 다른 곳도 아니고 궁전에 가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건데.”
왕수문의 말에 일환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왕수문과 비슷한, 아니 더 큰 것 같은 키에 딱 벌어진 어깨. 소매와 품이 넓은 옷을 입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소매와 바짓단에 줄을 묶어 딱 붙게 했으며, 옷자락도 길지 않았다.
“예, 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일환이 허리에 차고 있는 커다란 칼을 한 번 만지며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마차 앞에 서있던 왕수문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다시 방문이 열리고 천주윤이 나왔다.
“자, 됐지.”
천주윤이 짜증스럽게 입을 내밀며 머리의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검은색 타원형에 30cm정도 되는 길이의. 왕수문이 쓴 것과 같은 모자였다.
그제야 왕수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주윤이 다시 신발을 신고 마루를 내려왔다.
“이제 진짜 빨리 가야돼.”
천주윤이 마차로 들어가는데, 왕수문이 옆으로 다가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왕수문이 마차 문에 달린 나무 창문을 열었다.
“오늘 식사에 코리옌 대공도 온다고 합니다.”
“아…. 그래?”
천주윤의 어깨와 눈썹이 축 쳐졌다. 왕수문이 그 모습에 약간 마음이 아픈 듯, 했으나 곧바로 잔소리가 시작됐다.
“그러니 절대 트집 잡힐 일은 하시면 안 됩니다. 황제 폐하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셔야 합니다. 대답은 최대한 짧고 간략하게. 괜히 먼저 말을 거시거나 물어보시거나, 그러지 마시란 겁니다.”
“알겠어, 알겠어. 걱정하지 마.”
“코리옌 그 노인네, 눈치가 보통이 아니니 말조심, 또 말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출발, 일환. 빨리 출발하자.”
천주윤이 결국 참지 못하고 마부석에 앉은 일환 쪽으로 소리쳤다. 일환이 그 소리에 말을 몰고 가려는데, 왕수문이 마차의 옆을 툭툭 쳤다.
“그리고, 저하. 이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잠깐, 멈춰 봐.”
천주윤의 말에 일환이 다시 마차를 멈추고, 왕수문이 주위를 살폈다. 왕수문은 거의 창문 안으로 고개를 넣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송산에 패형소라는 자가 상운국 부활을 기치로 걸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도르 영주가 군을 이끌고 출전했지만 쉽게 진압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오히려 반란군의 기세가 대단해 밀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왕수문의 말에 천주윤의 표정이 바뀌었다. 굳은 얼굴로 천주윤이 뭐라 말하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일환. 출발하자.”
“저하. 결코 내색하시면 안 됩니다. 그 일은 말도 꺼내지 마십시오.”
출발하는 마차를 쫓아가며 왕수문이 말했지만 천주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차가 소운궁의 대문을 빠져 나가고, 왕수문은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천주윤 공. 식사는 입에 맞으시오?”
“예. 굉장히 맛있습니다.”
궁전 안에 위치한 화려하고, 거대한 만찬회장.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 그 만찬장 한 가운데에는 긴 식탁이 마련돼 있었고, 그 위에 빼곡하게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진귀한 재료들로 만든, 생전 처음보는 음식들.
넓은 식탁에 앉은 사람은 오로지 셋. 식탁 끝, 화려한 의자에 앉은 황제. 타미스 켄 테리. 그의 오른쪽 가깝다고 하기엔 살짝 먼 감이 있는 위치에 앉은 대공. 덴웰 친 코리옌. 황제의 왼편, 코리옌의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천주윤.
식탁 주위에는 시중을 드는 시녀들 몇이 서있었고, 호위하는 병사들은 멀리, 만찬회장 벽 쪽에 늘어서 있었다.
“이게 케이론의 물개 고기라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좋다고 하니 많이 드시게.”
황제가 포크로 멀리 있는 붉은 양념의 스테이크 비슷하게 생긴 고깃덩이를 가리켰다. 옆에 서있던 시녀가 그 접시를 가져다 황제에게 가져왔다.
“아니. 저기 천주윤 공에게 드려라.”
황제의 명령에 시녀가 천주윤에게 다가가 앞에 접시를 내려놓고 다시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폐하.”
천주윤이 인사를 한 뒤 물개고기를 잘라 한 입 먹었다. 과연 궁전의 요리사들이 만든 요리라 그런지, 약간 매콤하면서 달짝지근한 양념의 맛이 입 안에 퍼지고, 물개고기의 살짝 질긴 식감이 느껴졌다.
“아주 맛있습니다.”
천주윤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제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통일에 이제 단 한 발을 남겨둔, 아니 사실상 대륙 통일을 달성한 황제.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고, 수많은 적들을 굴복시켜온 그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로 기록될 지도 모를 그는 이제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인자한 모습의 노인일 뿐이었다. 아직도 여느 장군들 못지않은 풍채였지만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는 감출 수 없었다.
하얗게 센 머리가 왕관 사이로 훤하게 드러나 있었고, 볼 살이 늘어져 축 쳐져 있었다. 남자답게 보였을 커다란 코와 툭 튀어나온 턱도 이제는 그를 돈 많은 어느 시골의 노인으로 보이게 하고 있었다.
“천주윤 공. 내 아들 같아서 그러니 너무 딱딱하게 대할 것 없소. 편하게 말 하시오.”
“감사합니다. 폐하.”
손자뻘인 천주윤을 보며 황제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천주윤은 그 말에 가슴이 답답하고 시큰거렸다.
조국을 멸망시킨 적국의 심장에서 공작의 작위를 받고,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는 자신. 망국의 왕족.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반란군이라는 이름으로 싸우는 이들. 망국의 백성들.
“그러고 보니 폐하. 송경 인근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도르 공이 힘들어하는 것 같던데, 지원군으로 어느 부대를 보내실지 정하셨습니까?”
가만히 있던 대공 코리옌의 말에 천주윤이 괜히 움찔했다. 다행히 코리옌과 황제, 둘 다 천주윤에게 관심을 주고 있지 않았다.
황제가 입에 있던 음식을 삼킨 뒤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3보병대를 보낼 생각이오.”
“3보병대라면 보병군단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니, 반란군을 훌륭히 토벌할 것입니다.”
코리옌의 말에 천주윤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으며 옆에 있던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여기 천주윤 공도 있는데, 그 일은 그만 이야기하지.”
“예, 폐하.”
코리옌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천주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최대한 표정을 밝게 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얼마 동안 식사가 계속되는데, 다시 코리옌이 입을 열었다.
“이번 반란이 어찌 보면 잘 된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코리옌을 살짝 노려봤다. 코리옌이 말을 이었다.
“코우 원정이 그 덕에 연기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성과 없는 원정으로 계속 국고가 낭비되고 그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졌는데, 또 다시 원정이라니. 대장군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폐하께서 그를 윤허하실 줄 몰랐습니다.”
코리옌의 말에 황제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허허, 소리 내 웃었다.
“그 친구가 워낙 외골수라 그래. 내가 죽기 전에 어떻게든 완전한 통일을 보여주려고 저러는 거니, 대공이 이해 좀 하시게. 오죽하면 곧 팔십인데 매번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가겠나. 하하. 참 그 친구도 정정해.”
황제의 말에 코리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하하, 소리 내 웃었다. 둘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아무 말도 없던 천주윤이 갑자기 황제를 바라봤다.
“폐하.”
낮게 깔린 목소리에 경직된 표정. 황제가 천주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 하시오. 천주윤 공.”
“이번 반란군 진압에 저도 동행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