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천주윤의 예상치 못한 말에 황제는 물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코리옌도 놀란 표정이었다. 천주윤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황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3보병대와 동행하겠다는 뜻인가?”
“예. 그곳 지형에 제가 익숙하고, 상운국의 왕족이니 민심을 다스리는 데도 힘을 보탤 수 있을 겁니다. 윤허해주십시오.”
천주윤이 앉은 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진지한 표정에 황제가 고민하는데 코리옌이 코웃음을 쳤다.
“민심을 달랜다. 허허, 천주윤 공.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지금 송경 사람들은 그대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소. 공도 알고 있지 않소?”
코리옌의 말에 천주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항복문서를 전달했던 자신을, 곱게 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천주윤은 그 말에 반론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해 주먹이 떨렸다.
“어허. 대공. 그 무슨 결례인가. 천주윤 공이 이곳에 온지 벌써 9년인데. 고향이 그리울 법도 하지.”
“그렇다면….”
천주윤이 고개를 들고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윤허하지. 오랜만에 가는 고향에서 푹 쉬다가 오시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천주윤이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황제는 격한 반응에 무안한 듯 헛기침과 함께 말을 돌렸다..
“3보병대가 내일 아침 출발하기로 돼 있는데,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서 괜찮겠소?”
“옷가지 몇 개만 가져가면 되니 오늘 저녁에 다 준비할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 먼 길을 가려면 피곤할 터인데 식사 마쳤으면 일어나지.”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코리옌과 천주윤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황제가 만찬회장을 나간 후에야 코리옌과 천주윤도 걸음을 뗐다. 식탁에서 만찬회장의 문까지. 둘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하늘로 뻗은 수많은 깃발들. 수많은 발소리.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까지. 제국의 수도 마오텐을 나온 3보병대는 송경이 있는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만이라는 대군. 그들이 길게 늘어져 행군하는 것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전쟁의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공포로 느껴질 것이었다.
“저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런 중요한 일을 아무런 상의도 없이 결정하시는 것은….”
“알았어. 수문. 어제도 새벽 두 시까지 말했잖아. 앞으로는 꼭 상의하고 할게.”
행렬의 앞 쪽. 천주윤은 물론, 왕수문, 일환도 말을 타고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천주윤이 소심하게 반항했지만 왕수문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일환을 포함한 셋이 얼마 동안 침묵을 지키며 행렬을 쫓았다. 천주윤이 슬쩍슬쩍 왕수문의 눈치를 보다가 활짝 웃으며 한 쪽 손을 내밀었다.
“수문. 인상 좀 그만 써. 주름 생기겠다.”
천주윤이 검지와 엄지로 구겨진 왕수문의 눈썹 사이를 쭉 폈다. 왕수문이 매섭게 노려보자 천주윤이 얼른 손을 뗐고 셋 사이엔 계속 침묵이 돌았다.
수도 마오텐을 나온 지 며칠이나 지났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도착할 송경. 천주윤이 가만히 눈을 감고 9년 전 떠나오며 마지막으로 머리에 담았던 송경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막사 안으로 왕수문이 들어왔다. 왕수문을 보고 천주윤이 빙긋 웃었다. 침상에 앉아 있던 천주윤이 일어나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의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왕수문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저하. 이번 원정에 따라 나신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말씀해 주시지요.”
왕수문의 말에 천주윤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천주윤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막사 입구 쪽을 바라봤다.
“일환. 너도 들어와.”
천주윤의 목소리에 밖에서 경비를 서던 일환이 안으로 들어왔다. 천주윤이 해맑게 웃으며 자기 옆의 빈 의자를 툭툭 쳤다. 일환이 꾸벅 인사를 한 뒤 의자에 앉았다.
“그래. 너희한테는 말을 해줘야겠지.”
천주윤의 말에 왕수문이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일환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끔뻑끔뻑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패형소는 분명 결사항쟁 할 테고, 송경은 분명 대혼란에 빠질 거야. 우린 그 혼란을 틈 타, 제국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간다.”
천주윤의 말에 왕수문은 물론 평소 의욕 없고 무뚝뚝하던 일환의 표정까지 변했다.
“라는 게, 내 의견이야.”
천주윤의 진지했던 표정이 순간 미소로 변했다. 긴장한 표정의 왕수문이 얼른 일어나 막사 밖을 살폈다. 다행히 막사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 앉은 왕수문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손톱을 살짝살짝 깨물던 왕수문이 다시 천주윤을 바라봤다.
진심이다. 그렇다면 과연 가능할까. 왕수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주윤이 살짝 고개를 떨어뜨렸다.
“예전에 내가 말했지. 언젠가 반드시 송경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때는 반드시, 반드시 제국의 울타리를 빠져 나와 다시 상운국을 일으킬 준비를 하겠노라. 다짐했었어.”
“좋습니다. 저하. 저 또한 언젠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수문, 동의해 줄 줄 알았어.”
천주윤이 활짝 웃으며 왕수문을 바라봤다. 왕수문은 여전히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저하. 언젠가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이 아닌 언젠가 말입니다. 완벽하다 싶은 기회가 왔을 때.”
“우리가 소운궁에서, 마오텐에서 나오는 데만 9년이 걸렸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어. 지금이 바로 그 기회야.”
천주윤의 확신에 찬 목소리. 가만히 듣고 있던 일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하. 차라리 패형소와 손을 잡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뒤에서 몰래 송경과 3보병대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겁니다.”
일환 또한 불안했다. 혹여 이 일로 천주윤이 다친다면, 아니 다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그렇기에 내놓은 의견이었다. 최대한 소극적인 방법이었고, 패형소 한 명에게만 정보를 제공한다면 일이 실패할 경우 자신이 그를 죽이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천주윤이 가담한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일환의 말을 들은 천주윤이 미소를 살짝 지었다. 미소였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
“패형소는 9년 전에도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충신입니다. 절 받아 주겠습니까.”
천주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자신의 백성에게 미움 받는 것. 일환은 그 심정을 가늠할 수조차 없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저하!”
왕수문이 살짝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천주윤의 얇은 입술이 움찔했다.
“이미 나는 9년 전 송경에서 한 번 죽었어.”
다리 위에서 천주윤의 주먹이 부르르 한 번 떨렸다.
“이제 곧 송경입니다. 천주윤 공.”
3보병대의 대장, 준장 칼즈. 아직 삼십 대였지만 전쟁에서 공을 세우며 무섭게 빠른 속도로 승진한 그였다. 보통 소장이 하는 ‘병대’의 대장 자리를 준장의 계급으로 꿰차며 곧 소장 진급이 확실시 된 인물이었다.
일환보다 큰 체격에 아귀가 떠오르게 하는 험상궂은 얼굴이었지만 만 명의 병사를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는 그의 실력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행군의 앞쪽에서 천주윤과 나란히 말을 몰고 있었다. 그 뒤로 왕수문과 일환, 칼즈 준장의 부하들이 뒤 따르고 있었다.
“반란군의 기세가 제법 대단하다는 데 자신 있으십니까?”
천주윤의 물음에 칼즈는 웃음을 참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봤자 반란군들 아닙니까. 천주윤 공은 뒤에서 놓치지 말고 잘 구경하십시오. 정예병이라 불리는 우리 3보병대가 어떻게 적을 박살내나!”
“예. 무운을 빌겠습니다.”
천주윤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칼즈가 표정을 바꾸며 천주윤 쪽으로 살짝 말을 붙였다.
“무운보다는 다른 걸 빌어 주시오.”
“예?”
천주윤이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칼즈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의 험상궂은 얼굴 덕에 미소는 살벌하게 비춰졌다.
“이번 전투를 이기는 것은 당연하고 문제는 도르 공에게 잘 보이는 것이오.”
“도르 공이요?”
“그렇습니다. 천주윤 공께서도 도르 공의 눈도장을 찍어 놓으십시오.”
천주윤이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멀뚱 바라보자 칼즈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천주윤 공은 소운궁에만 있어 정보가 어둡나 봅니다.”
천주윤이 묻지 않았지만 칼즈는 혼자 신이 나 말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영토가 늘어나며 황제 폐하께서 귀족들에게 영지를 하사하셨지요. 그런데, 그때 황제 폐하께서 기존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허울만 남거나, 이름 있는 귀족들에게 일부러 군사 자금을 대게하고, 작은 공을 세우게 해 영지를 하사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지를 받고 세력을 키운 지방 귀족들을 바로 신귀족이라 합니다.”
“아, 신귀족.”
천주윤이 대충 알겠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기존, 레오트 본국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귀족들을 구귀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계시는 도르 공이 바로 신귀족들의 수장격이라 이 말입니다.”
“그렇군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천주윤 공도 잘 보여 두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천주윤이 대충 웃으며 대답했다. 칼즈는 만족한 듯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선두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송경이 보입니다!”
그 소리에 천주윤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송경. 자신이 태어나서, 자랐던 곳. 멸망한 조국의 수도.
“천주윤 공. 이제 송경이 보인 답니다.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칼즈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천주윤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앞을 바라볼 뿐. 계속 되는 전진. 앞으로 높이 솟은 성벽이 보였다.
‘송경….’
옛날 상운국의 수도에서, 이제 상운 지방의 주도가 된. 송경. 천주윤은 희미하게 보이는 송경의 성벽. 벅차오르는 가슴에 천주윤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것을 꾹 참고 천주윤이 말고삐를 꽉 쥐었다. 그때 앞에서 칼즈의 부하 하나가 허겁지겁 말을 타고 다가왔다.
“대장님. 송경에서 온 연락입니다!”
“말해라.”
칼즈가 위엄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부하가 말에서 내려온 후 경례를 한 후 입을 열었다.
“도르 공작님께서 직접 마중 가가지 못하니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하. 뭐 그런 것 가지고 양해까지야.”
“그리고 주력군은 남쪽 성문 밖에 주둔시키고, 오백 명 이하의 병력만 대동해 입성하시라 하셨습니다.”
“알겠다. 군량에 관해서는 말씀 없으셨나.”
3보병대는 출전하면서 송경에 도착해 하루 이틀 정도 더 버틸 정도의 군량만을 지참했었다. ‘코우 정벌에 사용하기 위해 모아놓은 군량을 함부로 소진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장군 파르가가 직접 도르에게 서신을 보내 군량을 준비하도록 했었다.
“예. 전대륙 상단 연합에 연락을 해놨으며, 반란군의 눈을 피해 오늘 밤 변복한 후 입성할 것이라 합니다.”
“바로 우리에게 지급하는 게 아니라 입성을 하나?”
“예. 일단 수량을 확인한 후 며칠 분 씩 나눠서 지급 하겠다 하셨습니다.”
“이유는?”
“혹 군량을 성 밖에 쌓아 뒀다가 적이 급습하면 피해가 클 것이라 하셨습니다.”
부하의 말에 칼즈가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 역시 도르 공은 대단하시구나. 병법을 아셔. 도르 공에게 가서 모두 알겠다 전하고, 내가 왔으니 이제 걱정하실 것 없다 말씀 드리도록.”
“예!”
칼즈의 명을 받은 부하가 다시 경례를 한 뒤 말 위에 올랐다. 칼즈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행군을 재촉했다. 천주윤은 주절주절 떠드는 그가 불편해 살짝 뒤로 빠져 왕수문, 일환과 함께 행군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