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군은 이곳에 진을 치고, 1편대 휘하 3개 조만 나를 따르라.”
레오트 제국의 군사 편제는 10명의 분대(分隊)에서 시작해 10개 단위로 합쳐졌다. 10개 분대가 모여 1개 조대(組隊)를 이뤘으며 그 수장은 조장(組長). 10개 조대가 모여 1개 편대를 이뤘고, 10개 편대가 모여 1개 병대를 이뤘으며, 그 수장이 바로 만인(萬人)을 지휘하는 대장(大長)이었다. 이 위로 각 군단은 이루는 병대의 수가 달랐으며, 그 수장을 군단장(軍團長), 흔히 단장(團長)이라고 불렀다.
칼즈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력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제 각기 맡은 일에 집중하여 움직이는데 한 쪽에 가만히 서있는 천주윤이 보였다.
코앞에 있는 거대한 성곽. 천주윤은 가만히 서서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 성벽을 이룬 돌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싶었지만 오래된 기억 속에 그런 것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9년 간 레오트 식 성곽만 보다보니 낯선 느낌이 더 컸다.
“왕제 저하. 칼즈 준장이 입성할 모양입니다.”
왕수문이 조심스레 천주윤의 뒤로 다가와 말했다. 천주윤은 뒤돌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뒤에 서있던 왕수문과 일환의 사이를 가로 질러, 천주윤이 준비된 말 위로 올랐다.
레오트 제국기를 든 기수가 선봉에서 천천히 행진하고, 그 바로 뒤로 말을 탄 칼즈가 따르고 있었다. 천주윤은 다른 부관들과 함께 칼즈의 뒤를 따랐고, 이어 삼백 명의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성 안으로 들어왔다.
성문에서 대운궁으로 이어지는 큰 길은 마차는커녕 말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았고, 사람들이 길 옆에 바짝 서서 행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며 양 옆으로 늘어선 사람들을 훑어봤다. 불안해하는 사람들 사이로 좋은 볼거리라도 되는 양 웃으며 구경하는 자들이 눈에 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느껴지는 차가운 눈초리.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드문드문 천주윤의 귀에 들어왔다.
‘나라를 팔아넘긴 왕족’, ‘매국노’, ‘배신자’ 등등. 무수히 들리는 단어들. 천주윤은 그것들이 지칭하는 게 자신임을 알고 있었다. 천주윤은 더 이상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옮길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볼 뿐. 걷는 것은 체격 좋은 군마(軍馬)가 대신해 주고 있었다.
“저하.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가십시오.”
어느새 왕수문이 천주윤의 말을 몰아 천주윤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천주윤이 왕수문의 얼굴을 보고 피식 미소를 지어보였다. 왕수문의 눈썹 사이에는 어김없이 주름 세 개가 그어져 있었다.
“걱정 마. 이 정도는 다 생각한 거니까.”
천주윤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왕수문은 그런 천주윤의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없어 뭐라 말을 해줄 수 없었다. 다만 그때, 상운국이 역사에서 사라지던 그 때. 고작 11살의 나이였지만 대운궁에서 ‘이 길’을 걸어 성문까지 갔음을 아직까지 천주윤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왕수문이 속도를 늦춰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군인들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그렇게 천천히, 한참을 가서야 모습을 보인 대운궁의 정문. 대운궁의 좌측에는 푸른 매화가 그려진 레오트의 제국기가, 우측에는 왕관과 칼이 그려진 타미스 가문의 황실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때 상운국의 국기가 펄럭이던 대운궁의 정문.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천주윤은 자기도 모르게 고삐를 잡은 두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9년 전, 상운국의 수도 송경-
“왕제 저하, 크, 큰일입니다!”
송경의 깊은 곳에 위치한 전각. 일부 왕족들이 머무는 곳으로, 11살의 천주윤 또한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방문 밖에서 들리는 다급한 신하의 목소리. 천주윤은 방 안에서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파죽지세 같은 적군의 진격 속에 천주윤의 형이자 상운국의 왕인 천주양이 결사항쟁을 천명한 지 불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었다.
용맹한 형과 달리 천주윤은 하루하루, 적군이 당장 송경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상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방문이 열리고, 신하가 들어와 침상에 앉아 있는 천주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하. 전하께서 자결을 기도하셨다가 발견되시었나이다.”
“뭐? 그게…. 사실인가….”
천주윤은 당장 쓰러질 듯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신하가 말을 이었다.
“그렇사옵니다. 지금 어의가 돌보고 있사온데 아무래도…. 속히 가보셔야 할 듯하옵니다.”
천주윤은 신하의 말에 비틀거리며 일어나 대충 외투를 걸쳤다. 신하가 얼른 일어나 천주윤을 부축하고 옷과 모자를 대충이나마 정리해줬다.
왕의 침전. 호랑이와 신비로운 새들이 여기저기 장식돼 있었다. 천주윤은 침전으로 들어가는 문 하나를 두고 도저히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하가 이끄는 손길에 겨우겨우 문을 넘어,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를 오르고, 방문을 지나 천주윤의 앞에 보인 것은 새하얀 옷을 입은 채 누워 있는 자신의 형. 아니 이 나라의 임금, 지존(至尊).
천주윤이 누워 있는 천주양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맞잡은 형의 손. 옆에 서있던 어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독약을 드시고 쓰러져 계신 것을 궁녀들이 발견했습니다.”
어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천주윤은 그 말이 들리는 지, 안 들리는 지 천주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께옵서 좀 전부터 저하를 찾으셨습니다.”
이어진 어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주양이 힘겹게 눈을 떴다. 가늘게 뜬 눈으로 천주윤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주, 주윤아….”
“형님, 말씀하십시오!”
천주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한 방울이 흐르자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고, 천주윤은 소매로 연신 눈가를 훔쳤다.
“이 형은…, 나는…. 결국, 이 나라를…. 지키지 못 했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형님!”
“네게…. 큰 짐을 남기고, 떠난다. 미안하다…. 미안하….”
천주양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리고,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천주윤은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뒤에 서있던 신하들과 어의가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형님, 형님. 정신 차리십시오, 형님!”
천주윤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천주양은 숨을 거뒀다.
천주양의 죽음을 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온갖 신하들이 모였고, 천주윤이 옥좌에 앉았다. 대신들은 아까의 눈물이 진짜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표정 없이 서있었다. 오로지 천주윤 만이 옥좌에서 퉁퉁 부은 눈으로 훌쩍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하. 소신들도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것 같사오나, 지금 국운이 풍전등화이니 이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전하께서 붕어하시었고, 왕자가 없으시니 저하께옵서 왕위에 오르시어 국란을 수습하셔야 하옵니다.”
노신의 말에 신하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동의했다. 오로지 천주윤 만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전, 저는, 이 자리에 앉을 만한 위인이 아닙니다. 부디….”
“저하, 정히 보위에 오르심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일단 임시로라도 공무를 수행해 주시옵소서.”
“그렇사옵니다. 보위는 한 시도 비워둘 수 없는 법이온데, 지금 상황이 급박하여 왕실 종친들 중 마땅한 자를 찾아볼 시간이 없사옵니다.”
신하들의 말에 천주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결정이 난 듯 화제를 전환했다.
“저하. 지난 번 국경 부근의 병사 오천이 투항한 것은 물론이요, 도성 내의 신하들 또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투항하는 자들이 속출하니, 전하께서 자결하신 것 또한 더 이상 왕실을 보전하기 힘들겠다 판단하신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그 무슨 망발이요! 전하를 모욕하지 마시오!”
“나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오.”
신하들의 언쟁은 점점 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신하들은 더 이상 피해가 늘기 전에 항복해야 한다는 쪽과 죽은 왕, 천주양의 유지를 이어 결사 항전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항복해야 한다는 쪽이 압도적이었고, 그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천주윤에게 고했다.
“전하.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렇사옵니다. 머뭇거리시는 동안에도 백성들은 전화(戰火)에 짓눌리고 있나이다.”
신하들의 목소리가 자는 동안에도 귓가에서 메아리치는 듯했다. 천주양이 죽은 지 불과 삼일. 삼일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궐 안에서 그것을 슬퍼하는 이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형님…. 전 어찌해야 합니까.”
천주윤은 잘 때마다 천주양에게 해답을 물었지만 그 어떠한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다음날 적의 대군이 송경으로 진격중이며 파견했던 병력이 거의 궤멸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천주윤은 항복을 결정했다.
“적은 이미 무력으로도 송경을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이니, 예의와 성의를 보이지 않으신다면 투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천주윤은 용포를 벗고 잘 때 입는 흰 옷을 입었으며, 항복 문서를 직접 적었다.
“말을 타고 가신다면 적들의 눈에 좋지 않게 비춰질 것이옵니다.”
그 말에 천주윤은 말을 타지 않은 채, 걸어서 송경의 정문을 나왔다. 병사들이 늘어서 왕이 지나갈 길을 만들고 있었다. 천주윤은 병사들 사이로 보이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다가 옆에 선 신하를 바라봤다.
“레오트에는 전하였소?”
“예. 레오트의 왕에게 이미 전하였나이다. 지금 남쪽 성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오니, 서두르시옵소서.”
천주윤이 고개를 끄덕인 뒤,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항복 문서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천천히,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좌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항복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가 죽을 각오로 싸우겠습니다!”
백성들의 목소리. 천주윤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때 수많은 인파를 견디지 못하고, 병사들의 대오가 뚫렸다. 백성들 수십 명이 순식간에 왕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가시려거든, 저희를 죽이고 가십시오!”
“항복하시면 안 됩니다!”
“항복하신다면 저희는 적들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울부짖는 백성들. 그 중 하나는 상운국의 국기를 가지고 와 바닥에 깔았다.
“가시려거든 이 국기를 밟고 가십시오. 그 전에는 결코 가실 수 없습니다!”
절규. 차마 길로 뛰어 들지 못하고 병사들 뒤에서 지켜보는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천주윤이 차마 앞으로 가지 못하는데, 병사들이 몽둥이를 들고 막아선 백성들의 등을 사정없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곡소리고 바뀌고, 백성들의 피가 길 여기저기로 튀었다.
병사들이 백성들을 모두 끌고 가자 천주윤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천주윤의 뒤를 따르던 신하 하나가 앞을 박차고 나왔다.
“저하. 신, 도저히 참을 수가 없나이다.”
정갈하게 관복을 차려입은 자는 지난 번 회의에서 항복에 반대했던 신하였다. 천주윤이 다시 걸음을 멈추고, 신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천주윤을 올려봤다.
“저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투항한다 하시는데, 항복한 나라의 백성들이 어찌 살 지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자기 나라가 사라지면 백성들이 어찌 될 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옵니다. 또한 투항한다면 사람을 보내 문서를 전하고, 성문을 열면 될 일이지, 어찌 저하께서 직접 성 밖까지 걸어가 맞이한단 말이옵니까.”
신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사 둘이 천천히 다가갔다. 신하는 다가오는 병사들을 보더니 품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신은 이 치욕스럽고 비통한 일을 도저히 두 눈으로 볼 수 없나이다.”
신하가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 뒤따르던 신하들이 당황한 듯 서둘러 그의 시신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땅에 흥건한 피. 시신이 치워지고, 병사들이 급하게 헝겊이나 천을 가져와 피가 흥건한 바닥을 덮었다.
걸음을 옮기는 천주윤의 몸이 떨려왔다.
성문을 나오자마자 보인 것은 오금이 저릴 정도의 대군이었다. 그 선두에 황금색 갑옷을 입은 채 백마를 탄 레오트의 왕이 보였다. 천주윤이 나온 것을 확인하자 왕이 직접 부하 몇을 이끌고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