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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가 진 자리
작가 : 백아
작품등록일 : 20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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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우(遭遇) - 세 사람 (1)
작성일 : 16-09-01     조회 : 77     추천 : 0     분량 : 5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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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송경 대운궁-

 그날, 9년 전 그날. 무릎을 꿇고 항복문서를 올리던 자신. 그것을 말 위에서 내려다보던 황제. 천주윤은 그때 본 황제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이후 그가 아무리 인자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봐도, 그날 말 위에서 자신을 경멸하듯 쳐다보던 눈빛은 덮어지지 않았다.

 행렬은 정문 바로 앞에서 멈추고, 칼즈가 말에서 내렸다. 대운궁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내가 서있었다.

 “어서 오시오. 칼즈 준장.”

 핏기 없는 얼굴로, 미소를 짓는 사내. 황제의 사촌동생이자 상운 지방 중부 영주. 타미스 한 도르. 단정하게 자른 그의 금발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 시체처럼 하얀 얼굴이 묘하게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키는 물론 체격도 크지 않았지만 당당하게 편 어깨에서는 이유모를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부관 하나가 칼즈에게 다가가 외투를 입혀 줬다. 외투의 어깨에 붙은 별 한 개가 햇빛에 반사돼 반짝였다. 칼즈는 외투 단추를 잠근 뒤 오른손을 올렸다.

 “충성.”

 칼즈가 크지 않지만 굵은 목소리로 절도 있게 경례했다. 도르도 오른손을 눈썹 옆으로 가져갔다. 칼즈처럼 제대로 된 경례는 아니었다. 도르가 손을 내리자 칼즈도 팔을 내리고 활짝 웃었다.

 “영주님께서 이거 걱정이 크시겠습니다.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지 어찌 단독으로 공격하셨습니까.”

 “하하, 예. 제가 반란군을 너무 얕잡아 봤나 봅니다.”

 도르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지금 황제 타미스 켄 테리의 부친 즉, 선황은 11남매 중 장남이었다. 누나가 하나 있었고, 동생들이 9명 있었다. 이 중 막내는 지금 황제보다도 스무 살이 어렸다. 그러다보니 도르는 말이 황제의 사촌이지 나이로 따지면 손자뻘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현재 황족들 중 황태손을 제외하면 황제와 가장 가까운 친척. 그에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했다.

 “안으로 어서 드시지요.”

 도르가 옆으로 비켜서며 칼즈를 안으로 청했다. 칼즈와 도르가 나란히 대운궁의 정문을 통과하자, 천주윤을 비롯한 나머지 인원들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앞서 가던 도르가 천주윤 쪽으로 살짝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천주윤 공. 오랜만에 대운궁에 오니 어떻습니까?”

 “아, 감회가 새롭군요.”

 “워낙 넓은 데다 큰 건물들이 많아 관리를 하는 데 인력이 많이 듭니다.”

 “그렇습니까.”

 천주윤이 대충 대답하는데, 행렬이 멈췄다. 도르는 칼즈와 대화를 하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자, 지금부터 각자 지내게 될 숙소와 근무지, 시간을 알려주겠다. 아, 천주윤 공은 이 시녀가 머물 곳을 안내해 주겠다고 합니다. 자유롭게 다니셔도 상관없으나 궐 밖으로는 나가시지 않는 게 좋을 겝니다.”

 “알겠소.”

 천주윤이 대답한 뒤, 왕수문, 일환과 함께 행렬에서 나왔다. 칼즈의 옆에 서있던 푸른색 옷을 입은 시녀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시녀가 살짝 앞에서 걸어가고 천주윤과 왕수문, 일환이 그 뒤를 따랐다.

 

 송경의 시장거리는 군대가 밖에 주둔하고 있건 말건,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온갖 귀해 보이는 물건들은 물론, 허름한 소쿠리나 나물들을 파는 자들까지 섞여 화려하다기 보다는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여유롭게 떡꼬치를 먹으며 걸어가는 청년. 켄홀리 타윈. 타윈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송경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거 이러다가 일억 오천만 헤트 금방 모으는 거 아니야?’

 타윈이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앞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타윈이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삐쭉 내밀어 앞을 보니,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거 중앙군 갑옷 아닌가. 웬 중앙군이 여기까지 왔대.”

 타윈이 중얼거리는데 옆에 서있던 오지랖 넓은 사람 하나가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 다른 데서 왔나. 지금 송경 앞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에서 군대를 파견한 거 아니야.”

 “아, 반란군 진압. 어?”

 그 말에 타윈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방에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2명 씩 짝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다가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불러 세워 검문을 했다.

 “반란군의 첩자가 들어와 있을지 모른다면서 수상한 사람은 다 검문 중이야. 지금 아주 길마다 쫙 깔렸어.”

 타윈이 그 말에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무기도 딱히 가지고 다니지 않았고, 돈은 거의 다 ‘저금소’에 맡겨 놨었다. 그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처럼 딱히 검문에 걸릴 게 없음에도 타윈은 중앙군들을 피해 좁은 골목들을 통해 남쪽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여행객은 묵을 작은 여관은 물론, 상단 사람 수십 명이 묵을 만큼 큰 곳까지 즐비한 송경 남쪽의 여객촌. 타윈은 그 중 가장 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물론 가장 싸다는 이유 때문에.

 

 숙소로 들어온 천주윤은 별 거 없는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모처럼 푹신한 곳에 편하게 누우니 저절로 잠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천주윤이 막 잠들려는데 밖에서 왕수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하. 왕수문입니다.”

 천주윤이 한숨을 한 번 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와.”

 천주윤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말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왕수문이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하. 체통을 지키십시오. 타국 사람들 앞에서 얕보이면 안 됩니다.”

 “이미 상운국은 망했는데, 무슨 타국이야. 이제 다 같은 레오트 국민이지.”

 천주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하자 왕수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많지 않은 나이에도 망국에 가슴아파하고, 의개를 가진 자. 무엇보다 다시 상운국을 일으키려는 그 의지. 왕수문이 천주윤을 아직까지 옆에서 모시고 있는 이유였다. 이런 왕수문의 실망한 표정을 읽은 천주윤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인정할 건 인정을 해야지.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냉정하게 생각해야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거잖아. 안 그래?”

 “저, 저하….”

 천주윤의 말에 왕수문은 감격한 듯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 모습에 오히려 천주윤이 당황했다. 왕수문은 소매로 눈물까지 훔치기 시작했다.

 “소신 왕수문. 저하의 입에서 대업이라는 말이 나오니 가슴이 뛰고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수, 수문. 왜 그래. 진정해. 너무 오버하지 마.”

 천주윤이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으나 왕수문은 전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9년 동안 함께하며 왕수문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색한 상황 속에 갑자기 밖에서 일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하. 일환입니다.”

 “어, 들어와.”

 천주윤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일환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왕수문이 언제 울었냐는 듯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섰다.

 “저하. 그럼 전 물러나 보겠습니다.”

 ‘가짜로 운건가….’

 천주윤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왕수문을 바라봤다. 왕수문이 나가려는데, 천주윤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잠깐만 일환도 왔으니 이야기 좀 하자.”

 천주윤이 작은 원형 테이블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이어 왕수문과 일환도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왕수문과 일환이 빤히 바라보는 가운데, 천주윤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같이 갈 곳이 있어.”

 “어디 말씀이십니까?”

 왕수문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으나 천주윤은 천진한 표정으로 웃을 뿐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송경 북쪽, 송산. 반란군 진영-

 패형소의 병사들이 광장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그 앞 단상에는 패형소가 갑옷을 갖춰 입고 손에 칼까지 든 채 서있었다.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망국의 백성으로 사느라 얼마나 고단했는가. 오늘 드디어 우리가 저들의 목을 베고 고향을 되찾는다!”

 패형소의 말에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적의 중앙군이 지원을 온 지금, 오히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는데 저런 말을 하는 패형소가 이해될 리 없었다. 웅성거리는 병사들을 신경 쓰지 않고 패형소가 말을 이었다.

 “일전에 유능한 용병 하나를 고용해 송경으로 보냈다. 오늘 밤 그가 영주 타미스 한 도르를 죽이기로 했다. 만약 그가 성공하면 송경에서 불화살이 오를 것이고, 수장이 죽어 당황한 적을 우리는 총공격해 섬멸 할 것이다!”

 패형소의 말이 한창인 가운데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패형소가 진짜 용병을 고용했는지, 그 용병이 누구인지. 정확한 정황을 모르는 병사들은 들리는 풍문을 전했고, 그것은 계속 퍼지고 퍼져 거금을 들여 헌터들 중 최고로 불리는 자를 고용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적의 중앙군 또한 먼 길을 달려와 지치고, 정비가 끝나지 않았을 테니 지금이 적기다. 형제들이여. 불화살이 오르는 순간,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품에서 잠들 것이니, 돌아가 마음껏 기쁨을 누리자!”

 패형소의 말이 끝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누군가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그것을 신호로 모인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패형소는 만족한 표정으로 단상을 내려왔다. 단상 옆에 서있던 그의 부관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암살에 실패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걱정스러운 부관과 달리 패형소는 담담했다.

 “걱정 마. 이미 첩자 하나를 더 심어놨어. 오늘 도르가 죽든 살든 송경에선 불화살이 오른다.”

 “그, 그렇다면 설마 사기를 돋우기 위해….”

 부관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패형소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걱정 말게. 오늘 밤 상단연합의 수레가 저 대군의 군량을 싣고 남문을 통과한다는 정보야. 그들이 통과하는 시간에 맞춰 일제히 공격. 열린 성문으로 들어가 단숨에 송경을 점령한다.”

 패형소의 말에 부관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야말로 존망이 걸린 일전. 패형소는 떨리는 기색도 없이 미소까지 지으며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부관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칼을 살짝 뽑았다가 다시 넣었다.

 광장에선 아직도 병사들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함성을 지르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밤이 깊었지만 송경의 번화가는 아직도 불 켜진 점포들이 즐비했다. 대로로 낮보다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오고갔고, 인력거들 사이로 마차 몇 대가 드문드문 보였다.

 남쪽 여객촌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 그곳 3층의 작은 방 안 침대에 타윈이 앉아 시계를 보고 있었다.

 “1시 1분 전…. 그냥 2시에 갈까….”

 타윈이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원래 패형소와 약속한 시간은 1시 반. 1시 반이 되기 전 도르를 죽이고 불화살을 올리는 것이 정해진 약속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운궁으로 들어가 영주를 죽인다고 생각하니 타윈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약속 어겼다가 돈이라도 깎으면…. 아니지. 지금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냥 선금 받은 걸로 만족하고 튈까…. 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이 바닥은 신용이 생명인데. 그래도 반란군이잖아. 아니,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 반란군이 아니라 반란군 할애비라도 고객은 고객이야.”

 타윈이 미친놈처럼 머리를 싸잡고 흔들며 중얼거렸다. 괴로워하던 타윈이 무엇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이제 정확히 1시.

 타윈이 사막에서처럼 긴 천으로 얼굴을 싸맸다. 눈밖에 보이지 않도록, 꽁꽁 싸맨 뒤에야 타윈이 옆에 놓여 있던 활을 어깨에 메고, 화살통을 반대쪽 어깨에 걸쳤다.

 “좋아. 이렇게 된 거 해보자. 정 안 되면 튀면 되지 뭐.

 방문을 여는 타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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