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각하. 조심하십시오.”
크라타프는 말을 마치자마자 동시에 뒤로 돌았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향한 곳은 도르가 걸어온 길 위. 그곳을 빠르게 달려오는 남자.
“타미스 한 도르!”
타윈의 목소리가 숲에 울리고, 동시에 불꽃이 몸을 휘감았다. 그 모습에 천하의 크라타프도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마, 마법!’
“공작 각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크라타프는 소리치는 동시에 주머니에서 돌멩이 하나를 꺼내 칼자루 끝의 홈에 끼워 넣었다. 크라타프의 칼 주위로 유리처럼 생긴 막이 돔 형태로 넓게 퍼졌다.
‘실드?“
이번에 당황한 쪽은 타윈이었다. 손에서 뻗어 나온 불길은 크라타프의 칼이 뿜어낸 실드를 타고 넓게 퍼졌다. 그 사이 도르가 서재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일환 또한 얼른 천주윤과 왕수문을 서재 안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문 앞을 지키고 섰다.
크라타프가 실드로 불길을 막고 있었지만 열기까지 막을 순 없었다. 어느새 크라타프의 얼굴이 땀투성이가 됐다. 거기에 불길의 위력에 오히려 크라타프가 밀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정도 마법을 쓰는 자라니. 누구지….’
크라타프가 타윈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사이 아까 꽂아 넣은 칼자루 끝의 돌멩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법석이…, 버티지 못한다.’
그때 불길이 사그라졌다. 그의 앞에 서있는 얼굴을 가린 사내, 타윈. 동시에 칼자루 끝의 마법석이 깨져 바닥에 떨어졌다. 크라타프가 천천히 타윈 쪽으로 다가갔다.
“뭐하는 놈이냐.”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타윈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시간은 1시 28분. 2분 안에 도르를 죽이고, 건물 위에 올라가 불화살을 쏴야 한다.
‘목소리로 봐서 나이는 많지 않군.’
크라타프가 차분하게 상대를 탐색하는 동안 타윈은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까 그건 실드 마법석인가.’
여유로운 척했지만 정작 마음이 급한 것은 타윈이었다. 타윈이 사용하는 불꽃 마법은 지옥의 화염이라 불리는 페틴스. 모든 살아있는 것에 옮겨 붙는 불길은 화염 마법 중에서는 물론, 전 마법 최강이라 불리는 것 중 하나였다. 비록 타윈이 완전히 페틴스를 익히진 못했지만 소문 속의 마법석이 이 정도의 힘을 낼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모든 마나를 다 써서 단 번에 끝내자. 어차피 제대로 조절도 못하긴 하지만.’
타윈의 몸에 다시 불길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크라타프가 긴장한 듯 자세를 취했다.
마법이란 마법군단 소속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 크라타프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자가 누군지,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는 지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그러나 그 궁금한 것들을 모두 덮어버리는 것.
“마법사라. 마법사랑은 한 번도 겨뤄본 적이 없는데, 재미있군.”
무사라는 자들이 가진, 미지의 적에 대한 기대감. 크라타프는 아까까지 머릿속에 가득했던 의문들이 사라졌다. 오로지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어떻게 상대해야 할 지. 어서 싸워보고 싶다는 마음 뿐. 이런 크라타프의 생각은 주위 사람들의 몸이 떨릴 정도의 위압감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타윈이 그런 크라타프를 보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재 안에는 천주윤, 왕수문, 도르. 세 사람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닫힌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오로지 소리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
“대, 대체 이게 어떻게….”
천주윤이 도르 쪽을 돌아보고 말문이 막혔다. 도르의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굳은 표정. 자객으로 보이는 자가 달려오며 불렀던 이름은 분명 ‘타미스 한 도르’였다. 누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노리는 것인가.
“설마 반란군이….”
타미스 한 도르가 중얼거리는데 왕수문이 천주윤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하 아니, 각하. 일단은 피하셔야 합니다. 뒷문으로 가사지요.”
“뒷문? 여기 뒷문이 있어?”
“궁궐 안의 모든 건물은 문을 두 개 이상 만드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곳도 궐 안의 건물이니 분명 문이 하나 더 있을 겁니다.”
왕수문의 말을 들은 천주윤이 도르 쪽으로 공손히 입을 열었다.
“영주님. 저희가 다른 문을 찾아볼 테니, 잠시 앉아서 쉬고 계시지요.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도르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서재의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주윤은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움직였다. 왕수문과 함께 서재 안의 벽과 책장들을 뒤지기 시작하는데, 도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 영주로 부임한 후 이 정원이 마음에 들어 매일 밤마다 거르지 않고 산책을 했습니다. 이 서재 또한 수도 없이 드나들었지요.”
도르가 천주윤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주윤이 멍한 표정을 짓는데, 도르가 망설임 없이 한 쪽 벽으로 걷기 시작했다.
크라타프의 칼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공기가 일렁거렸다. 아까 마법석을 사용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 타윈이 긴장된 표정으로 크라타프를 노려보던 중 그의 발 아래 깨진 마법석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마법석이라는 거,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이 정도 위력일 줄은 몰랐는걸.”
“보통 무기였으면 마법석 안의 마나를 다 쓰기 전에 박살났을 거다. 나의 명도(名刀), ‘타반’이니 버티고 있는 거지”
크라타프가 자신의 칼을 한 번 허공에 저으며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윈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며 손바닥을 뻗었다.
‘단번에 끝내야 한다! 아까 마나를 너무 많이 써서 이번 페틴스가 마지막일 거야.’
타윈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 불이 손바닥을 통해 앞으로 뻗어 나갔다. 부채꼴로 퍼지는 불꽃의 열기에 멀찍이 서있던 일환이 얼굴을 가리며 뒤로 더 물러났다.
크라타프는 그 열기를 피할 생각 없이 정면으로 보고 서있었다. 두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이 살짝 파였다. 칼을 감싸고 있던 오라가 크라타프의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다가오는 불꽃을 향해 크라타프가 칼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크라타프의 기합소리와 함께 그의 칼 타반이 화염에 닿았다.
‘소용없다. 페틴스는 생명을 태우는 불꽃. 사람의 힘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
타윈의 이런 생각과는 반대로 화염은 칼에 반으로 갈라져 크라타프의 양 옆으로 비켜지나가고 있었다. 열기 때문에 크라타프의 옷이 그을리고, 팔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직접 불이 닿지는 않았다.
타윈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팔을 거뒀다. 화염이 멈추자 크라타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 꼬리를 올렸다.
“끝난 거냐. 애송아.”
천천히 걸어오는 크라타프. 타윈은 그가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 떨리는 팔과 다리. 타윈이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네 놈이 어떻게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지, 배후가 누구인지. 다 밝혀주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마법, 페틴스를 막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이 마나를 잘 조절했느냐, 못 했느냐. 그것이 관건이었을 뿐. 그것을 상대가 막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어…. 이걸 막을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이야?’
자신의 페틴스가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것쯤은, 삼대 마법 중 하나라는 이름에 걸맞을 정도의 위력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마법사도 아니고, 무사가. 그것도 아까처럼 마법석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칼 하나만 들고 막을 줄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까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어디 갔나.”
크라타프의 목소리조차 타윈에겐 두렵게 느껴졌다. 타윈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크라타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페틴스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타윈의 주먹이 쇳빛으로 변했다. 몸의 일부를 쇠로 만드는 마법, ‘바틸’. 마지막 모든 마나를 짜내 자신의 손을 강철로 만든 타윈의 일격.
‘하하…. 이따위 의뢰 역시 받는 게 아니 었어….’
타윈은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정확히 배를 가격했지만 크라타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먹이 강철이라도,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 별 볼일 없으면 아무 쓸 모도 없지.”
크라타프가 자신의 배에 있는 타윈의 팔목을 붙잡고 힘을 줬다. 고통에 타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크라타프는 그대로 타윈을 숲 쪽으로 던져버렸다. 타윈이 꽤 멀리 날아가 쓰러졌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고통에 몸을 뒹구는 타윈 쪽으로 크라타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크라타프와 타윈의 거리가 불과 몇 걸음 남지 않은 순간, 타윈의 뒤 쪽 하늘에 나타난 불빛. 타윈은 보지 못했지만 크라타프는 그것을 발견했다. 하늘로 오르는 불빛을.
“뭐지. 저게.”
크라타프가 하늘을 보며 의아해하자 타윈의 시선도 그를 따라 뒤쪽 하늘로 향했다. 하늘 높이 올랐던 불꽃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저건. 그럴 리가. 불화살이 어떻게….”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불화살이었다. 타윈이 그것을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도르를 죽인 뒤에 쏘아 올리기로 한 불화살. 자신이 여기 있는데, 대체 누가 그것을 쐈단 말인가.
“불화살?”
크라타프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타윈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순간 타윈이 무엇인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무슨 소리지?”
“저건, 신호야! 원래 내가 쏘아 올리기로 했는데, 다른 놈이 쐈나봐.”
“대체 무슨 신호라는 건가.”
크라타프는 타윈이 두려움에 헛소리를 한다고 여겼는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반란군이 저 신호와 동시에 송경을 총공격하기로 했다!”
타윈이 소리치자 크라타프의 표정이 바뀌었다. 타윈은 사실 자신의 신호로 반란군이 공격을 하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패형소는 불화살을 쏘라고 했을 뿐, 그 이후 어떻게 할지는 말해주지 않았었다. 그저 지금 상황에서 크라타프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게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것은 제대로 먹힌 듯 했다.
‘바, 반란군이 지금…. 지금이라면 분명 상단 연합의 군량이 입성하고 있을….’
크라타프가 뒤로 돌아 서둘러 서재 쪽으로 뛰어갔다. 타윈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도, 도망가야 되는데…. 다리가 안 움직여.’
타윈이 주저앉아 어떻게든 도망가려 기어가는데, 그의 앞을 누군가 가로 막았다.
크라타프가 서재 문을 열어 젖혔다. 문 바로 맞은편의 책장이 옆으로 밀리고, 나타난 문을 막 도르가 열기 직전이었다. 안에 있던 도르와 천주윤, 왕수문이 멍하니 크라타프를 바라봤다. 크라타프가 도르 쪽으로 뛰어 오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 지금, 반란군이 공격을 한 것 같습니다!”
크라타프의 말에 도르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자세히 말해봐.”
“방금 하늘로 불화살이 하나 올라서 아까 그 자객에게 무엇이냐 물으니, 반란군의 총공격 신호라고 합니다!”
“서, 설마 놈들이 군량 수송 시간을 노리고….”
도르가 서둘러 서재 정문을 나가고, 크라타프가 그 뒤를 쫓았다. 도르가 밖으로 나오자 마자 본 것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타윈과 그 앞을 가로막은 일환이었다.
도르가 나오자 일환이 슬쩍 그 쪽을 바라봤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일환의 말에 도르가 잠시 고민하다가 그 쪽으로 다가갔다. 뒤에 서있던 크라타프가 뒤쫓으며 안절부절 못했다.
“공작 각하.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지 알 수 없습니다.”
도르는 크라타프의 말을 무시하고 타윈의 바로 앞까지 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를 죽이려 한 자객의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군.”
도르가 미소를 지으며 타윈의 얼굴을 싸고 있는 천을 벗기기 시작했다. 타윈은 그것을 막을 힘 따위 없었다.
뒤따라 나온 천주윤과 왕수문이 도르의 뒤에 서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드러난 타윈의 얼굴. 하필 달빛이 밝은 데다, 서재에서 나온 빛까지 있어 타윈의 얼굴은 너무도 정확하게 보였다.
“생각보다 어리군.”
도르의 말에 타윈이 다 끝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도르가 그런 타윈의 턱을 잡아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반란군이 공격한다는 게 사실이냐?”
“그, 그렇다.”
타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르가 미소를 지었다.
“크라타프. 돌아가자. 이 아이는 끌고 가서 따로 취조하지.”
도르가 자리에서 말했다. 명을 받은 크라타프가 타윈을 들쳐 업으려 했다. 그때 천주윤이 도르 쪽으로 입을 열었다.
“영주님. 상황이 급하신 모양인데, 이 자는 저희가 끌고 가겠습니다.”
천주윤의 말에 크라타프가 살짝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시지요.”
도르가 가볍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겼다. 크라타프가 들었던 타윈을 땅에 대충 던져놓고 서둘러 도르를 따랐다.
도르와 크라타프가 사라지자 왕수문이 천주윤의 옆으로 다가왔다.
“왕제 저하, 반란군이 총공격했다면….”
“그래. 반란군이 성 안까지 들어온다면,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정신이 없겠지. 오늘 궁을 빠져 나간다.”
“예, 그런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저런 놈은 왜 맡으신 겁니까. 그냥 도르 영주가 데려가게 두시지.”
왕수문의 말에 천주윤이 미소를 지으며 타윈을 바라봤다.
“이 녀석이랑 같이 간다.”
“예?”
“나가서 지낼 곳이 필요할 거 아냐. 자객이라면 그렇게 드러난 곳에 살지는 않겠지.”
천주윤의 말에 왕수문은 뭐라 더 말하기도 지쳤는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일환이 타윈을 한 쪽 어깨에 들치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