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도스 지방, 주도인 페이시티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탄스산. 별로 높지 않았지만 중턱까지 몇 미터나 되는 높은 나무들이 우거져 길도 찾기 힘든 이곳. 하지만 그 산림만 지나면 정상 부근에는 나무 하나 없는 탁 트인 풀밭이 펼쳐진, 기이한 산이었다. 그 모습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는 대머리 산이라고도 불렸다.
천주윤과 왕수문이 숨을 헉헉 거리며 나무들 사이를 헤치고 있었다.
“조, 조금만 천천히….”
천주윤이 앞서 가는 일환을 보며 말했다. 제법 멀리 앞선 일환은 줄 하나를 잡고 걷는 중이었다. 그 줄 끝에는 타윈이 꽁꽁 묶인 채 앞장서고 있었다.
“일환! 왕제 저하께서 지치셨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가지.”
왕수문이 앞쪽으로 소리쳤다. 일환이 멈춰서 줄을 한 번 당겼다. 타윈이 걸음을 멈추고 일환 쪽을 바라봤다.
“아, 거 참.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왜 이렇게들 체력이 없어.”
타윈이 불평을 하는데 일환이 눈을 매섭게 떴다.
“쉬었다 가시죠.”
타윈이 눈을 내리 깔며 그 자리에 앉았다. 일환도 옆의 돌에 걸터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천주윤이 그제야 살았다는 듯 흙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 모습에 왕수문이 깜짝 놀라 달려왔다.
“저하, 이런 흙바닥에 누우시다니요. 이 것이라도 깔고 누우십시오.”
왕수문이 헐레벌떡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며 말했다. 천주윤이 누운 채 베시시 웃었다.
“괜찮아. 아, 시원하고 좋다.”
“저하. 그러다 어디 몸이라도 상하시면….”
“괜찮아. 괜찮아.”
천주윤이 누운 채 나무들 사이로 하늘을 바라봤다. 새파란 하늘. 송경을 떠난 지 벌써 며칠이 지났었다. 왕수문이 돈을 가지고 나온 덕에 마을이 나올 때마다 먹을 것을 살 수 있었지만, 숙소까지 구하기엔 돈이 부족했다. 천주윤은 난생 처음 하는 노숙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땅을 느끼고, 하늘이 보이는, 산새가 울고 벌레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으며 자고, 일어나 시냇물로 씻는 삶. 모든 것을 잊고 차라리 이렇게 살까 하는 생각까지 마음 한 구속에 피어났었다.
“저하. 이제 슬슬 다시 출발 하시지요. 얼마 안 남았다고 합니다.”
왕수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천주윤이 몸을 일으켰다. 일환과 타윈은 천주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다시 산 위로 걷기 시작했다. 천주윤과 왕수문이 서둘러 둘을 쫓았다.
얼마나 가지 않아 일환과 타윈의 모습이 사라졌다. 앞의 나무들 사이로 풀밭이 희미하게 보였다. 천주윤이 살짝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난 초원. 드넓거나 끝이 없다거나 하진 않았다. 마치 누군가 산 정상을 칼로 벤 듯 평평했고, 풀밭 너머론 산 아래가 까마득하게 보였다. 산양 몇 마리가 풀을 뜯는 것이 보였고, 새들이 가까이서 날고 있었다.
산 정상의 초원. 천주윤이 그 모습에 반해 감탄하고 있는데 앞에서 일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하. 이 쪽입니다.”
소리 난 곳을 보니 일환과 타윈이 작은 통나무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놓인 통나무집은 이상하다기보다는 풍경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천주윤과 왕수문이 천천히 통나무집을 향해 걸었다. 일환과 타윈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통나무집 앞에 서서 천주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통나무집의 문이 열렸다. 천주윤을 보고 있던 일환이 뒤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이 까매졌다.
일환이 순식간에 제압당한 채 쓰러졌고, 그 위를 중년의 남자가 누르고 있었다. 남자는 손바닥으로 일환의 머리를 누른 채 천주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묶여 있던 타윈이 그 틈을 타 얼른 남자의 뒤로 몸을 숨겼다.
“뭐 하는 놈들이지?”
남자의 살벌한 눈빛, 낮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새하얀 백발에 살짝 거뭇하게 탄 얼굴. 키나 덩치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살짝 자란 수염에도 얼굴이 지저분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눈의 붉은색 눈동자가 모든 걸 잡아먹을 듯 매서웠다.
일환이 남자의 밑에서 힘을 쓰고 있는 듯 했지만 이미 제압당한 터라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천주윤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갈 곳이 없어 잠시 묵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천주윤의 말에 남자가 뒤에 있는 타윈을 바라봤다. 타윈이 묶인 채로 방방 뛰었다.
“저 자식들 송경의 대운궁에 있던 놈들이에요! 절 잡아서 지내는 곳을 불라고….”
“그래서 여기까지 데려온 거냐?”
남자의 말에 타윈이 살짝 당황한 듯 시선을 위쪽으로 올렸다.
“그러니까…. 어….”
“대운궁은 뭐하러 갔어.”
남자가 일환의 얼굴을 누르던 손에 힘을 풀었다. 남자가 일어나자 일환도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뒤 거리를 벌렸다.
“저하. 비켜서십시오.”
일환이 칼을 뽑은 뒤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그러나 천주윤은 일환의 옆을 지나 남자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전 멸망한 상운국의 왕족입니다. 줄곧 마오텐에 있다가 이번에 송경으로 왔는데 기회가 생겨 도망쳐 나왔습니다.”
천주윤의 말을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등을 돌린 채 타윈을 보고 섰다.
“이 자식. 이번엔 무슨 일에 휘말려서 대운궁까지 들어갔던 거야.”
“그게 보수가 괜찮은 일이라…. 영주를 암살하는 일에….”
“멍청한 자식. 그래서 성공하면 네가 현상금이 걸릴 텐데. 그 이후엔 돈을 어떻게 벌려고.”
“아….”
남자의 말에 타윈이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타윈을 묶고 있는 줄로 손을 가져갔다. 줄은 손에 닿은 부분이 까맣게 타고, 끊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타윈이 어깨를 몇 번 붕붕 돌리고 손목을 움직여 보았다.
“이제 좀 살겠네. 죄송합니다. 스승님.”
“그래서 저 자들과는 어떻게 만난 거지?”
타윈의 스승이라는 남자가 드디어 다시 천주윤 쪽을 바라봤다.
“붙잡혔는데…. 저 사람들이 절 데리고 도망쳐 나왔어요.”
“그럼 구해준 사람이잖아.”
남자가 천주윤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녀석이 예의가 없습니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묶어서 데려온 저희 잘못도 있죠.”
“아니요. 잘 하셨습니다. 저 자식 묶어 놓지 않았으면 또 무슨 쓸 데 없는 짓을 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남자가 말하며 타윈 쪽을 째려봤다. 타윈이 움찔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여기서 머물기는 힘드실 듯합니다. 사실 저희도 숨어사는 처지라. 모르는 사람을 들이기는 좀 그렇군요.”
“아…. 그런가요.”
남자가 정중하게 말했다. 천주윤이 안타까워하는데 뒤에 서있던 일환이 다가와 천주윤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저하. 저 자. 그라함입니다.”
“뭐?”
“전 마법군 군단장이자 현재 현상금 일억 팔천 헤트의 그 그라함 말입니다.”
일환의 말에 천주윤이 놀란 표정으로 다시 남자, 그라함 쪽을 바라봤다. 현존 하는 마법사 중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자이자, 유일한 마법군단의 탈영병. 현재 최고액의 현상 수배범인 그라함. 그가 자신의 앞에 서있다는 사실에 천주윤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어떻게 할까요. 저하.”
일환이 그라함을 바라보며 천주윤에게 물었다. 천주윤이 머리를 살짝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내가 이야기 하지.”
천주윤이 그라함을 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혹시 그라함 씨입니까?”
“…!”
천주윤의 말에 이번엔 그라함이 놀랐다. 그라함의 표정이 굳고 손이 올라갔다. 그때 천주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안에서 나눠도 되겠습니까? ‘텐크라’에 관련된 일인데요.”
“테, 텐크라….”
그라함이 표정이 아까와는 또 달라졌다. 당황한 듯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라함이 천천히 통나무집 쪽으로 걸어갔다.
“따라 오십시오.”
그라함이 통나무집의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천주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통나무집으로 향했고, 그 뒤를 일환과 왕수문이 따랐다. 타윈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레오트 제국의 수도 마오텐, 테라코 궁전-
궁전은 거대한 만큼 수많은 방들이 있었고, 처음 오는 사람은 길을 잃을 만큼 복잡했다. 그 중 궁전을 정문에서 봤을 때 좌측에 위치한 곳. 일명 영면실(靈眠室). 역대 레오트 왕들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 곳이었다.
매년 첫째 날, 새해가 되면 황제가 직접 와 선대왕의 영혼이 평온하기를 기원하는 의식을 치를 뿐. 그 외에는 평소 오는 자가 없기에 보초병 둘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반년에 한 번 씩 꼭 오는 자가 있었다.
“문을 열어라.”
보초를 서던 병사들의 앞에 다가온 것은 까만색 군복을 입은 늙은 군인. 그러나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에,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충성!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얼른 문을 양쪽으로 잡아 당겨 열었다. 이제는 늙어 주름진 얼굴, 매서웠던 눈매는 살과 함께 아래로 쳐져 있었지만 여전히 눈빛에선 빛이 나는 듯했다.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내린 그의 얼굴을 모르는 자는 전군(全軍)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군을 통솔하는 대장군. 코울 딘 파르가. 그를 모른다면 그는 분명 코우 왕국의 간첩일 것이었다. 본디 황제가 겸임하는 원수 계급. 황제는 파르가에게 그 원수 계급장을 사후 반납한다는 조건으로 수여했다. 전군을 황제의 허락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전군 대원수(全軍 大元帥)가 바로 그였다.
파르가가 칼을 병사 하나에게 맡기고 영면실로 들어갔다. 낮임에도 안은 빛이 별로 없이 어두웠다. 방은 굉장히 넓었으며, 문에서부터 방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카펫이 깔려 있었고, 좌우로 거대한 기둥이 있었다. 기둥 너머 벽을 따라서는 쭉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자신을 등용하고 신임했던 선대왕 즉, 지금 황제의 아버지인 타미스 켄 포르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단 이곳에 들어온 이상 초대 왕의 초상에 인사를 올리는 것이 원칙.
파르가가 천천히 카펫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대한 기둥들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뒤로 한 채. 카펫은 반대편 벽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는 레오트를 세운 초대 왕, 타미스 켄 사익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파르가가 초대 왕의 초상을 보며 허리를 숙였다. 잠시 묵념을 한 뒤 파르가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카펫의 중간쯤을 걷는데 드디어 기둥 뒤의 기척들이 움직였다. 복면을 하고 일반 병사들의 군복을 입은 자들. 수는 열 대여섯에 모두 칼을 들고 있었다.
“감히 영면실에 칼을 들고 들어오다니. 법이 두렵지 않은가.”
파르가가 태연하게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파르가를 둘러쌌다.
“초병, 초병 밖에 있나!”
파르가가 문쪽을 향해 소리쳤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긴, 보초병들이 돕지 않았다면 애초 이곳에 저런 행색으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파르가는 태연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때 자객 몇이 움직였다. 자객의 칼이 파르가의 옆구리를 향해 찌르고 들어왔다. 그러나 파르가는 옆으로 가볍게 움직여 피한 뒤, 무릎으로 찌르고 들어온 자객의 손목을 쳤다. 자객이 칼을 놓친 채 뒷걸음질을 쳤다. 나머지 자객들이 달려들었고, 파르가는 여유롭게 공격들을 피하며 당수로 그들의 목과 손, 명치 등을 쳤다.
자객들이 잠시 주춤하자 파르가가 떨어진 칼 중 하나를 잡아들었다.
“감히 누구의 사주를 받아 여(余 : 자기 자신을 이름)를 살해하려 하는가!”
파르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영면실에 울렸다. 자객들은 어느새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대장군!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군들에게 사주한 자가 누구인가.”
자객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그, 그것은 죽더라도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부디 소인들의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 말에 파르가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사주한 자가 여기에 있는가?”
“….”
자객이 아무런 말도 없었다. 파르가가 칼로 기둥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일개 병사들도 주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함구(緘口)하는데, 어찌 비겁하게 숨어 있는가! 사내라면 당당히 칼을 들고 나와라. 만약 그대고 이긴다면 여가 죽어도 죄를 묻지 않겠노라 약조한다!”
팔십 가까운 나이에도 파르가의 목소리는 젊은 군인들 못지않았다. 잠시 파르가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울린 뒤 다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런 비겁한….”
파르가가 작게 중얼거린 뒤 엎드려 있는 자객들을 훑어 봤다. 파르가는 칼을 바닥에 던져버린 뒤 걸음을 옮겼다. 자객들이 엎드린 채 길을 비켰고, 파르가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어라!”
파르가가 문 바로 앞에 다가가 소리쳤으나 열리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파르가가 직접 발로 문을 걷어 차 열어버렸다. 보초병들이 깜짝 놀라선 엎드렸다. 파르가는 딱히 그들을 추궁하지 않고 자신의 칼을 신경질 적으로 뺐어들었다.
파르가가 멀리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초병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때 영면실 안에서 길게 한숨 소리가 들렸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의문의 남자. 남자는 다리에 힘이 빠지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으면 진작 나갔지….”
남자가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