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도스 지방과 상운 지방 접경 부근-
숲길 옆 커다란 바위 아래 앉아 천주윤 일행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천주윤은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왕수문은 멍하니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일환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 중이었다.
“음, 그러니까 나도 결국 그 내공이란 걸 쓰고 있는 거네?”
타윈이 자단과 마주보고 앉은 채 말했다. 자단이 한숨을 픽 쉬었다.
“그래. 그렇다고. 마법은 거기서 자연 속의 기를 결합시켜서 불, 물 같은 자연 성질을 띄게 해 방출시키는 거야. 무도에서 말하는 ‘기’는 순수한 자기 몸속의 내공만을 방출시키는 거고.”
“그렇구나. 그럼 나도 너랑 일환 형님처럼 할 수 있겠네?”
“글쎄…. 뭐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힘들 걸. 기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서. ‘무도’와 ‘마도’의 각각 방식에 익숙해진 이상 힘들거야.”
“그렇구나.”
타윈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단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타윈을 보다가 일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님. 이 쥐콩만 한 게 진짜 마법삽니까?”
“뭐? 쥐콩?”
자단의 말에 타윈이 발끈했다. 타윈이 달려들었으나 자단이 가볍게 몸을 한 바퀴 바닥에 구르며 피했다.
“꼬맹아. 이런 데 힘쓸 시간에 수행이나 더 해라. 마법이고 내공이고, 일단 몸속의 에너지를 수행으로 늘리는 게 중요하니까.”
자단이 무신경하게 말한 뒤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타윈이 그런 자단을 노려보다가 바위 뒤 쪽으로 갔다.
천주윤이 어느새 깨 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라진 채 바위 뒤로 향하는 타윈을 보고 천주윤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에릴로는 이제 거의 다 오지 않았나?”
천주윤이 옆에 앉아 있는 왕수문 쪽을 보며 물었다. 왕수문은 듣지 못했는지 멍하니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수문…?”
“아…?”
천주윤이 다시 한 번 부르자 왕수문이 입을 헤 벌린 채 고갤 돌렸다. 천주윤과 눈이 마주치자 왕수문이 입을 닫았다. 눈빛도 다시 또렷하게 바뀌었다.
“저하. 말씀 하십시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말씀을…?”
“아니 에릴로에 거의 다 오지 않았나 해서.”
“예. 이제 거의 다 왔을 겁니다.”
왕수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때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일환이 입을 열었다.
“저하.”
“응?”
천주윤이 고개를 젖혀 위로 올려봤다. 일환이 천주윤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한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쪽에 성이 보입니다.”
“어? 진짜?”
천주윤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은 앞에 살짝 언덕이 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위로 올라가기엔 너무 높았다.
일환이 바위 아래로 내려와 길을 가리켰다.
“언덕은 별로 높지 않은데, 그 반대편 내리막이 굉장히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이 성이더군요.”
일환의 말에 천주윤이 환하게 웃었다.
“타윈, 드디어 성이…. 아.”
타윈이 바위 뒤로 갔던 것을 떠올린 천주윤이 걸음을 옮겼다. 활짝 웃으며 천주윤이 바위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타윈, 드디어 성이 보인대.”
순간 활짝 웃던 천주윤의 표정이 굳었다. 바위 위에 있던 일환처럼 가부좌를 틀고 있는 타윈. 그 주위로 일렁거리는 아지랑이. 천주윤이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타윈이 눈을 떴다.
“무슨 일이야?”
타윈이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천주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릴로 성이 보인다고 하더라고.”
“그래? 얼른 가자. 돈 벌자, 돈.”
타윈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 갔다. 천주윤이 그런 타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몇 번 저었다.
“같이 가, 같이.”
천주윤이 다시 웃으며 타윈을 쫓았다.
페이도스 남부 소속, 에릴로 성-
한 쪽은 숲으로, 한 쪽은 농지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인만큼 성은 조용했다. 성 안에는 작은 시장 거리가 하나 있었고, 그 외에는 대부분이 민가였다. 성 근처에 농지가 있는 사람들도 성내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장사를 하는 사람들, 혹은 귀족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성 한 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 이곳, 에릴로 성의 성주 드랑 핑 게르 자작이 사는 곳이었다.
천주윤 일행은 저택 문 앞에서 ‘헌터’라는 말을 하자마자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곧장 크진 않지만 귀빈들을 접대할 듯 보이는 방으로 안내됐는데, 대리석으로 된 바닥은 물론 고급스러운 소파,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은 샹들리에까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했다.
천주윤 일행 다섯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동안 차와 과자가 나왔다.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소파에 천주윤, 왕수문, 타윈이 앉아 있고, 일환과 자단은 반대편 소파에 함께 앉아 있었다. 낮은 테이블에 놓인 과자를 타윈이 얼른 집어 먹었다.
“오, 맛있다. 맛있어.”
타윈이 몇 개를 더 집어 먹자 옆에 앉아 있던 왕수문이 혀를 찼다. 천주윤이 신기한 듯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수문. 대운궁에 있던 내 처소보다 좋은 것 같지 않아?”
“저하. 무슨 그런 말씀을. 대운궁이 훨씬 운치 있고, 고풍스러웠습니다.”
천주윤은 왕수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방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때 여자 하인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와 꾸벅, 인사를 했다.
“자작님께서 곧 들어오실 겁니다. 일어나서 맞이해 주시지요.”
여자 하인의 말에 천주윤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방으로 들어온 것은 두꺼비 같은 얼굴에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남자였다. 얇게 기른 콧수염 때문인지 메기가 연상되기도 했다. 자기 머리만한 둥그런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한 가운데에 꽤 큰 다이아가 박혀 있었다.
수도의 귀족들이 회의를 갈 때나 입는 긴 외투를 입고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붉은 빛깔의 외투는 가슴 쪽 주머니에 보석이 달려 있었고, 단추도 꽤 비싼 보석인 듯 빛나고 있었다.
“이곳 성주인 드랑 핑 게르 자작이라 한다.”
게르 자작이 씩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순간 징그럽다는 생각을 한 것은 타윈 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의 모든 아니, 자작의 옆에 있는 여자 하인은 그 표정을 못 봤을 지도 모르니 빼고. 최소한 천주윤 일행 다섯 명 모두 그 생각을 했다.
게르 자작이 천천히 걸어와 테이블의 좁은 면, 상석(上席)의 개인용 소파에 앉았다. 그제야 천주윤 일행이 자리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징그러운 외모였다. 길쭉한 실눈에 양쪽 볼 살이 출렁거렸다. 손가락마다 낀 반지들이 손가락 살 때문에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너희들이 아벨에서 보낸 헌터들인가?”
게르 자작이 등을 소파에 기대며 매우 건방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왕수문이 순간 울컥해 입을 열려했지만 천주윤이 그를 막았다.
“왜 말이 없지?”
게르 자작이 자신의 앞, 양 쪽에 앉은 천주윤 일행을 번갈아 바라봤다. 게르 자작이 불쾌한 기색을 비추려는 순간, 타윈이 인위적인 미소와 함께 양손을 비볐다.
“아, 예, 예. 저희가 그 헌터입니다. 도적놈들 때문에 의뢰를 하셨다굽쇼.”
준비 동작도 없이 돌변한 타윈의 태도에 천주윤은 물론 왕수문, 일환, 자단까지 놀라 움찔했다. 그러나 타윈은 주위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그까짓 도적놈들 토벌하는 거야. 저희가 전문입지요. 맡겨만 주십시오.”
“음. 그렇게 믿음직스러워 보이진 않군. 어린 것들도 껴 있고….”
게르 자작이 타윈과 천주윤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타윈이 울컥한 듯했지만 최대한 감정을 추슬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하.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주시면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음. 그래.”
게르 자작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벨에서 들은 대로 문제는 ‘라일’이라는 자였다. 약 1년 전 라일이라는 자가 말을 탄 무리 백여 명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성의 방위병은 고작 수십 명. 그 마저도 제대로 된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그들이 몰래 사람을 성 안에 심어 놨던 모양이다.
게르 자작의 말에 의하면 ‘라일’이라는 도적단이 성으로 다가오자 성문이 안에서 열렸다고 한다. 라일이라는 자는 원래 이름도 없던 자였고, 이번에 걸린 현상금도 게르 자작이 페이도스 남부 영주에게 보고를 해 걸린 것이었다.
“빌어먹을 백작 자식, 군사를 보내 달라 했더니 현상금이나 딸랑 걸고…. 아, 방금 한 말은 잊어라.”
게르 자작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가 이내 천주윤 일행의 눈치를 봤다.
타윈은 미소를 짓느라 얼굴에 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하하…. 예, 그래서 그 자식들은 지금 성 안에 있나요?”
“아니. 그날 쳐들어와 우리 방위군 병사들을 몇 명이나 죽이고…. 여기로 쳐들어 왔지.”
“그래요?”
“그래. 내 창고를 뒤져서 전국에서 힘들게 모은 보물들을 수레에 싣고 가더군. 거기다가 앞으로 성문을 닫으면 당장 쳐들어와 날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천한 것들이 감히….”
게르 자작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분노로 얼굴까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타윈에게 중요한 것은 그딴 것이 아니었다.
“창고에 있는 보물들을 가져갔다면…. 혹시 저희 보수를 줄 돈이….”
“무슨 헛소리야. 그 놈들은 고작 농가에서 쓰는 수레 대여섯 개 밖에 안 가져왔어. 그딴 걸로 이 몸 창고의 보물들을 다 가져갈 수 있다고 보나?”
“아, 그렇군요. 예, 예.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겁니다. 하하. 그래서 놈들은 어디 있죠?”
“모르지.”
“예?”
게르 자작의 말에 타윈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가 아차 싶었는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어디 있는지 모르신다니….”
“그놈들은 한 달에 한 번 씩 성 안으로 들어와 우리 성 안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고 있어. 나한테는 세금도 걷지 못하게 하고 말이야! 그 덕에 반년에 한 번, 백작님께 올려 보내는 세금을 다, 다아, 내 돈으로 내고 있단 말이야!”
게르 자작이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타윈이 살짝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그놈들 본거지를 찾아내 뿌리 뽑겠습니다. 헌데…. 저희가 지낼 곳도, 돈도 없어서 그런데 선금을 조금주시면 안 되실까, 하고 조심스럽게 아뢰어 봅니다. 하하.”
타윈이 뒤통수를 긁으며 괜히 오버해 웃었다. 게르 자작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일단 십만 헤트네. 이걸로 지내고, 만약 성공 못한다면 뱉어내야 될 거야.”
“그럼요.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타윈이 얼른 돈을 챙기며 말했다. 페이시티 음식점에서 돈을 뜯어낸 이후로 가장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게르 자작이 다시 한 번 천주윤 일행을 쓱 훑어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별로 세보이지도 않고, 별로 믿음직스러워 보이지가 않는데….”
중얼거리는 게르 자작 쪽으로 타윈이 입을 열려는 순간.
“어이, 아저씨. 나 본 적 있어?”
일환의 옆에 앉아 있던 자단의 목소리. 타윈은 물론 게르 자작의 표정까지 굳었다. 자단이 매서운 표정으로 게르 자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 너 방금 뭐라고….”
게르 자작이 어이가 없는 것은 물론 살짝 화까지 난 듯 손가락으로 자단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자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게르 자작 쪽으로 다가갔다.
“아저씨 나 본 적 있냐고. 초면에 왜 반말을 찍찍 해대. 나이도 조또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 보이구만.”
자단의 걸쭉한 입담에 게르 자작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못했다. 타윈이 얼른 자단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 최대한 살가운 표정으로 게르 자작을 바라봤다.
“자작님, 죄송합니다. 얘가 천성이 양아치라서요. 물론 성격이 더러운 만큼 실력도 믿을 만하죠. 자작님이 실력을 안 믿어 주시니까 이 친구가 화가 난 거예요. 하하.”
“무슨 헛소리야. 그냥 인성이 좀 몇 대 맞아야 될 인성….”
타윈이 얼른 자단의 입을 손으로 가로 막았다.
‘제발, 제발 닥쳐. 제발.’
타윈이 자단에게 딱 붙어 소리 나지 않게 입을 뻐끔거렸다.
“이런 무례한, 당장 경비병을 불러 저 놈을….”
게르 자작이 뒤에 서있는 하인에게 명령하려는 순간, 자단과 눈이 마주쳤다.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은 눈빛. 게다가 자단의 옆에 앉아 있던 일환도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일환의 턱에 난 칼자국과 자단의 팔뚝에 있는 문신을 게르 자작이 번갈아 바라봤다. 그의 이마로 땀이 한 방울 흘렀다.
“어험. 그래. 저 정도 기개는 있어야 그 놈들을 토벌하지. 좋아. 의뢰를 맡기지 어서 가봐.”
게르 자작의 말에 타윈이 활짝 웃으며 연신 허리 숙여 감사하다 인사했다. 자단은 여전히 못마땅한 듯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