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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도록 너를
작가 : 카페인부작용
작품등록일 : 2017.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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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 남자랑 잘거니까 꺼져.
작성일 : 17-07-27     조회 : 307     추천 : 0     분량 : 10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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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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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4월의 마지막 밤, 청담동의 고급스러운 한 Bar.

 

 미니스커트 밑으로 뻗은 가늘고 긴 다리를 꼬고 바텐더 테이블에 앉아 독한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연거푸 세잔이나 들이키고 있는 여자를 인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꽤 높은 하이힐이 눈에 거슬린다.

 

 대체 여자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하이힐에 왜 그리들 열광을 한단 말인가.

 

 바텐더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고 내려놓은 빈 스트레이트 잔을 노려보며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듯하다.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거지?’

 

 가볍게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의 입모양에 집중 한 인혁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

 

 그녀의 입모양은 분명 ‘욕’을 하고 있었다.

 

 장밋빛 자그마하고 도톰한 입술로 나쁜 놈, 미친 새끼, 개자식, 열여덟 새끼 등 본인이 알고 있는 다채로운 욕들을 시전하고 있는 듯했다.

 

 ‘남자친구가 바람이라도 폈나보군.’

 

 지이잉, 테이블 위에 올려둔 그녀의 핸드폰이 아까부터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신경질 적으로 배터리를 빼내 핸드백에 처박아 넣는다.

 

 술기운이 도는지 자세가 흐트러지며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빈 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운다.

 

 위스키가 이미 잔에 채워지고 넘쳐흐르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멈추지 않는다.

 

 바텐더가 급히 다가와 위스키를 잡아 세우고 테이블에 번진 술을 닦아주지만 조금의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잔을 들어 입에 대는 순간 언제 왔는지 낯선 남자가 술잔을 낚아챈다.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그녀가 조금은 느린 동작으로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뒤 무시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바텐더에게 다른 잔을 달라는 손짓을 한다.

 

 그녀가 다시 잔을 채우기 위해 위스키병을 들자 이번에는 그것을 낚아채며 소리친다.

 

 “실수라고 했잖아!”

 

 Bar 안의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숙이며 눈을 감고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친 후 실실 웃기 시작했다.

 

 “하연아, 그건 그냥 실수였어. 나영이한테 나 정말 아무 감정 없어. 어제는 술이 너무 취해서 나도 모르게... 미안해.. 그 일 별거 아니야. 정말 한번 뿐이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끝내기로 했어.”

 

 “관심 없으니까 꺼져..”

 

 살짝 꼬이는 발음을 가리려는지 느리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모습이 인혁의 눈에 마냥 귀여워보였다.

 

 “그일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내 마음이 너한테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한번만 이해해줄 수 없어?”

 

 그렇구나, 저 여자의 이름이 하연이구나. 그 다채로운 욕의 주인공이 저 남자이며, 저 나쁜 미친 개자식이 저 여자도 아는 사람과 잤구나.

 

 그 잔인한 사실을 저 여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인혁에게도 어떤 기억이 떠오르면서 뻔뻔한 저 남자의 말에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본인 또한 자신과 밤을 보내고 싶어 하는 여자들과 잠자리하는 걸 별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가 없으니까..’

 

 인혁은 꿈틀거리는 눈썹사이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일에 감정이입을 하며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어. 그 실수 나는 이해 못하겠다고, 그러니까 꺼지라고.”

 

 “내가 왜 그랬는데! 네가 한번을 안주니까..”

 

 그녀가 더 들어줄 수 없었는지 있는 힘껏 그 남자의 뺨을 후려 갈겼다.

 

 “니가 이딴 인간이란 걸 알고 있었나보지!”

 

 갑자기 맞은 탓에 어안이 벙벙한지 잠깐 동안 멈칫하더니 뺨 정도는 맞아 줄 수 있다는 듯 긴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나가려한다.

 

 그녀가 반항을 해보지만 술기운이 몸에 퍼져버린 탓인지 움직임이 둔해져 여의치가 않다.

 

 인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 남자의 팔을 잡는다.

 

 “여자분이 싫다는데 그만하시죠.”

 

 “당신은 뭐야, 내 여자야 상관 마.”

 

 내 여자? 내 여자라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인혁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 그의 팔을 잡은 인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인혁이 그 남자의 팔을 거칠게 들어 올리려는 순간,

 

 “이 남자랑 잘거야.”

 

 인혁이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약간 돌려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뭐?”

 

 그 남자 또한 뜨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니가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그거... 오늘 이 남자랑 해보겠다고 이 개자식아..”

 

 “너 미쳤어? 그걸 말이라고 해?”

 

 “왜 말이 안 돼? 니 입으로 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 별거 아닌 거 누구랑 하든 상관없잖아? 그러니까 이손 놓으라고”

 

 하연은 놀라우리만치 침착했다. 술이 그녀를 이토록 침착하게 해주는 것일까?

 

 “그..!”

 

 그 남자는 더는 말을 잊지 못하고 그녀의 반응에 황당해 미쳐 돌아버리기 일보직전이라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인혁을 그윽하게 쳐다보고 있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애절해 인혁의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기서.. 저를 데리고 나가줘요... 저 새끼 내 눈앞에서 치워줘요 제발..."

 

 뭔가를 숨기려는 듯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잘도 참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진다.

 

 그녀의 눈물을 보자 인혁은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인혁이 남자의 손을 그녀에게서 거칠게 뿌리쳤다.

 

 남자는 그녀를 절대 보내줄 수 없다는 듯 다소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다시 잡아 챗다.

 

 “이하연!”

 

 몸이 둔해진 때문인지 거슬리게 높은 하이힐 때문인지 그녀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아악! 아아..."

 

 넘어지며 발목을 삐끗했는지 그녀가 발목을 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그녀가 짧은 A라인 스커트를 입은 탓에 발목에서 손을 떼고 두 손으로 스커트를 내리며 가리느라 안절부절 더 정신이 없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인혁은 화가나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모르는 여자의 일인데 왜.. 단순히 불의를 보고 치미는 분노가 아니었다.

 

 인혁이 재킷을 벗어 그녀의 스커트부분을 덮어주었다.

 

 남자가 '전 애인이 된 여자' 에게 덮인 재킷이 거슬려 못 참겠다는 듯 걷어내려고 그가 뻗는 손을 인혁이 저지했다.

 

 "이 여자 배려 좀 하지? 발목 아픈 것 보다 가리려고 애쓰는 거 못 봤나?"

 

 남자가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인혁에게 주먹을 날렸다. 무방비 상태로 맞은 인혁이 잠시 비틀거렸다.

 

 입술이 터져 피가 맺힌 곳을 엄지손가락으로 찍어 피를 확인한 인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참으려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남자가 다시 주먹을 날렸고, 킥복싱 유단자로 주먹을 함부로 쓰지 못하는 인혁이 이번에는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남자의 팔목을 잡아 등 뒤로 꺽어 버렸다.

 

 그리고는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씨익 웃으며 몸을 살짝 틀어 의자가 있는 쪽으로 남자를 처박아 버렸다. 의자를 부둥켜안고 자빠지는 남자의 꼴이 우스웠다.

 

 인혁의 눈짓에 웨이터 둘이 소리 지르며 반항하는 남자를 양옆으로 잡아 끌어냈다.

 

 인혁이 그녀의 백을 챙겨들고 그대로 바닥에 앉아 있는 그녀를 부축하려 다가갔다.

 

 "괜찮아요? 일어설 수 있겠어요?"

 

 "네.. 아!"

 

 엉거주춤 일어나려다 발목이 아픈지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냈다. 또한 술기운에 몸도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같아보였다.

 

 이 모든 상황들이 짜증스럽고 속상함에 미간을 찡그리며 감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흐른다.

 

 인혁이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 웨이터에게 준다.

 

 "입구에 대기해주세요. 대리기사도."

 

 인혁이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잠시 놀라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인혁에게 몸을 맡겼다.

 

 인혁이 고개를 약간 숙여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고개를 들어 인혁을 쳐다보았다.

 

 입술이 터져 피가 말라붙은 그의 입술 주변을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어루만지더니 잠들어버렸다.

 

 '술도 못 마시면서 겁도 없이. 으휴.'

 

 인혁이 뒷좌석에 그녀를 앉히고 그녀에게 덮어준 자켓을 다시 매만져주고는 반대쪽 좌석으로 돌아갔다.

 

 차문을 연 인혁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녀가 뒷좌석에 옆으로 쓰러져 누워 있었다.

 

 인혁이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받치고 앉은 뒤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신화호텔로 가주세요."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짝 덥고 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고 찬찬히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눈물로 마스카라가 조금 번져있는 눈은 그녀를 애처롭게 했고, 오똑한 코는 만져보고 싶을 만큼 예뻣다.

 

 마지막으로 눈길이 간 그녀의 작고 도톰한 입술은.. 당장이라도 덮쳐버리고 싶을 만큼 매혹적였다.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인혁이 차에서 빠르게 내린 뒤 뛰어서 반대편으로 갔다.

 자동차 키를 들고 뒤따라 내린 대리기사에게 5만원권 한 장을 내민다.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리기사가 호텔 주차요원에게 자동차 키를 넘겨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를 안아 올리기 위해 자세를 낮추자 주차요원이 그를 돕겠다는 제스처를 했다. 인혁이 손을 가로막고 정중히 거절했다.

 

 다른 남자가 그녀의 몸에 손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녀를 안아 든 채 호텔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힐끗 힐끗 쳐다봤지만 인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호텔리어들이 그를 보자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한 프론트 직원이 그의 뒤를 따른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직원이 벨을 대신 누르고 인혁이 엘리베이터에 타자 따라 타서는 익숙하다는 듯 19층을 눌렀다.

 

 19층에 도착하자 먼저 내린 직원이 인혁에게 이쪽으로 안내하겠다는 손짓을 한다.

 

 “내방으로 가죠."

 

 직원이 놀란 눈으로 어리둥절해 있다.

 

 "네? 아... 네."

 

 곧 정신을 차리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1907호. 보조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카드키를 꽂은 후, 옆으로 비켜서 인혁에게 들어오시라는 손짓을 한다.

 

 인혁이 객실로 들어서자 배꼽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사장님, 그럼 편히 쉬십시오.”

 

 “아! 김.. 지연씨, 미안하지만 얼음이랑 얼음주머니 좀 부탁할게요. 이 여자가 발목을 접질러서.”

 

 인혁이 그녀의 명찰을 확인한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어후.. 많이 부었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인혁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이고 이불을 덮어준다.

 

 이불 밑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자켓을 빼내 소파로 던진 후,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을 살짝 걷어 그녀의 발목을 확인한다.

 

 오른쪽 발목의 복사뼈가 묻혀버릴 정도로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인혁은 졸리는 눈을 손으로 누르며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나와 다시 하연에게로 가서 부은 발목을 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속상해 하며 상태를 보고 있을 때 벨 소리가 울리자 인혁이 빠르게 몸을 일으키고는 뛰어가서 객실 문을 열어준다.

 

 “주머니에 얼음 충분히 넣었고, 여기 보온병에 여분의 얼음을 담아왔습니다. 더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고마워요.”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부탁한 물건들이 담긴 트레이를 받아들고 바로 보이는 화장대에 내려놓은 뒤 얼음주머니만 들고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되어간다.

 

 그녀의 발목에 슬쩍 얼음주머니를 갖다 대어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세상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는 그녀의 부은 발목을 인혁이 정성스레 찜질을 해주기 시작했다.

 

 

 

 ***

 

 

 

 다음날 아침,

 

 목이 말라 잠에서 깬 하연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이쪽저쪽을 한번 씩 보더니 낯선 방임을 알고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다.

 

 욱신거리는 발목에는 누가 해준 것인지 친절하게도 얼음주머니가 올려져있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 본 하연의 시야에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앉아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대 잠들어 있는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하연은 나쁜 일을 당한 건 아닌지 반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옷도 제대로 입혀져 있고 발목이 욱신거리는 것 말고는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다.

 

 친구들 말로는 첫 경험은 하고 나서도 엄청 불편하고 쓰리다고 했으니 아무 일 없었던 건 확실하다.

 

 어제 밤.. 어제 밤.. 기억해야 돼.

 

 친구들과 한번 씩 가던 바였고 전 애인과도 한번 간적이 있었다.

 

 그곳에 전 애인이 와서 실랑이가 있었고 낯선 남자가 나를 보호해 주다 그놈에게 맞았던 것 같고 그래서 그 남자가 그 놈을 의자에 처박아줬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 남자가 그놈을 주먹으로도 한 대 때려줬더라면 더 통쾌 했을 텐데 왜 참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감한 것은 그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난 것 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다음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미칠 것만 같았다.

 

 하연이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운 표정으로 옆으로 쓰러졌다.

 

 “아으..... 미쳤어 미쳤어.”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잠들어 있는 저 남자는 나를 구해준 그 사람이겠지?

 

 이곳은 어디고 대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건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또한, 어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저 남자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쪽팔려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하연이 우주 밖으로 날아갈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몸을 옆으로 기울여 목을 쭉 빼고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더니 입술이 터져 피가 말라붙어 있다.

 

 어제 밤, 자신을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데리고 나와 준 고마운 남자였다.

 

 그 다음으로 자신에게 행패 부렸던 그 나쁜 놈이 생각났다. 전 애인이었던..

 

 처음으로 교제를 했던 사람이었고, 5개월 동안 데이트라는 것을 하면서 그와 했던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손잡기, 팔짱끼기, 커플룩 입고 놀이공원가기 등 이사람 없으면 죽을 것 같다 까지는 아니었다.

 

 사랑까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으로 만나는 동안은 최선을 다했다.

 

 그랬는데 배신을 당한 것 이었다.

 어쩌면 온 마음을 다하지 않고 만난 벌일지도 모르지.

 친구라고 생각했던 년과 바람이 났다.

 

 바로 어제, 일요일 아침.

 

 절대 빠뜨리지 않고 보는 TV프로 농물농장, 서프라이즈를 감명깊게 시청하고 약속은 되어 있지 않지만 그놈을 만나기 위해 최대한 꾸미고 그놈이 사준 단화를 신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1달 전부터 그놈이 자기 오피스텔로 놀러오라고 주소를 문자로 보내오고 있었다. 요즘 뜸 하길래 삐쳤나 싶어 바로 오늘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로 간 것이었다.

 

 벨을 누르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렸고 그 놈과 대학 때부터 친구였던 나영이 함께 나오는 것이었다.

 

 그 놈이 당황했는지 얼굴로는 모자라 목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하연아, 오해 하지마. 나영이는.. 방금 왔어. 뭘 좀 가져다주느라...”

 

 “그렇게 말할 거면 둘 다 머리카락은 좀 말리고 나왔어야지.”

 

 “어.. 그건 나영이도 집에서 머리감고 금방 왔고 나도 방금 감아서.. 아니.. 저기 그러니까..”

 

 진우가 횡설수설 아무렇게나 말을 막 던지고 있었다.

 

 “나영이 너 어제 입은 옷 그대로네? 니가 말해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선배랑 잔거 맞아. 나 선배 사랑해.”

 

 “하.. 진우선배가 그렇게 좋아? 알았어. 너한테 버릴게. 너 해.”

 

 “하연아, 아니야 내말 좀...”

 

 그 놈의 변명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돌아섰다.

 

 운명이란 게 정말 있나보다. 나영과는 어제 점심을 같이 먹었던지라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먹은 점심이 올라 올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그놈이 사준 단화가 보인다. 하나씩 벗어서 양손에 들고 그놈의 면상에다 차례로 던졌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서 엘리베이터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놈이 하연을 잡으려고 걸음을 옮기려하자 나영이 두 손으로 그의 팔을 잡는다.

 

 “선배! 가지마.”

 

 “놔, 씨..”

 

 나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하연에게 뛰어가 핸드백을 들고 있는 팔을 붙잡았다.

 

 하연이 그의 손을 뿌리치며 핸드백으로 그놈의 면상을 쳤다. 황당해하는 그의 반대편 뺨도 한 대 더 때렸다.

 

 “따라 오지마라. 패 지긴다. 진짜.”

 

 고향이 대구인 하연은 당황할 때나 흥분했을 때 한번 씩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처음 들어보는 하연의 과격한 말투에 당황해 멍하게 있는 틈을 타 하연은 계단으로 뛰어 내려왔다.

 

 오피스텔을 나선 하연에게 새삼 날씨가 눈부시게 맑고 따사로웠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놈을 사랑해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였던 애. 그것도 괜히 나를 의식해 혼자서 신경전을 벌이던 애와 그런.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도 없으면서 사람을 만난 벌이리라. 벌로 저런 놈을 만났으니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배신당했음에 이리도 화내는 이하연 너.. 참 이기적이구나.

 

 ‘내가 연애는 무슨.. 예쁜 드레스나 더 만들걸..’

 

 

 

 ***

 

 2009년, 2월 어느 날.

 

 나영은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났다. 강의실로 들어서는 하연을 보며 웃는 얼굴이 친근하게 느껴져 먼저 말을 걸었다.

 

 그 웃음이 남자를 꼬실 때 써먹는 표정이란 걸 그땐 알지 못했다.

 

 “안녕, 옆자리에 누구 있나?”

 

 하연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니, 앉아도 돼. 사투리 쓰네? 어디서 왔어?”

 

 “어, 대구.”

 

 뒤 이어 팔짱끼고 들어오는 친구 둘 다정이, 지은과도 인사를 트고 그렇게 네 명이서 즐거운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나영은 알면 알수록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친구였다. 좋은 의미의 새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같은 해, 5월 주말을 이용해 4명이서 1박 2일 정도로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연히 함께 갈 줄 알았는데 나영은 빠지겠다고 했다.

 

 이유는 너희들이랑 여행을 가면 남자친구랑 여행갈 수가 없다고, 집에는 너희랑 간다고 하고 남자친구랑 여행가겠다는 게 이유였다. 나름 엄한 집안이라나.

 

 그리고 남자친구랑 가면 돈도 안들이고 좋은데 굳이 돈 들여서 너희랑은 가기가 그렇다는 말도 친절히 덧붙여주었다.

 

 그러라고 했다. 세 명이서 여행을 다녀온 후 학교 휴게실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며 혼자 앉아있는 하연에게 선배오빠가 다가와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황당한 말을 들었다.

 

 “너희들 나영이 아파서 못 가는데 의리 없이 그냥 너희끼리 여행 갔다 왔다며?”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나영이가 그렇게 얘기 하던가요?”

 

 남자친구랑 여행 간다고 우리랑 돈들이면서 까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있지 않아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제 부턴가 학교 오면 하연이 부터 찾는 남자동기가 있었다. 상현이라고 하연만 보면 헤벌죽 해서는 하연이 움직이는 동선을 시선으로 쫒는 친구였다.

 

 그런 동기 녀석을 보면 나영이 은근히 질투 하는 척 너 요새 너무 하연이만 챙기는 거 아냐? 섭섭해 라면서 끼를 부렸다. 그 상현이란 친구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면 세상 순진한 척 웃음 짓는 모습을 하연은 여러 번 봤다.

 

 그러던 어느 날, 하연은 나영에게서 그 동기 녀석과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 그렇게 됐어? 축하해. 네가 좋아하는 거 같더니 잘됐네?”

 

 “내가 뭘 좋아해? 걔가 사귀자 그러니까 돈 좀 있는 거 같아서 한번 만나보려고 하는 거지. 걔랑 나 사귄다는데 넌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을 이유가 있나?

 

 “아니, 너는 그런 스타일 어떤데?

 

 “착하지 상현이.”

 

 “남자로.”

 

 “난 동갑들은 남자로 안 보여. 한두 살 많아도 남자로 안 보이는데? 일단 나이차가 좀 나야지.”

 

 나영이 심드렁해진 표정으로 나가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다정이가 뒤돌아 앉으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하고 하연을 쳐다봤다.

 

 “이하연, 내가 정말 답답해 죽을 거 같아. 나영이가 너 속 뒤집어지게 하려고 저러는 거 안보여? 상현이 새끼도 분명히 너 좋아했는데 저년이 뺏어갔잖아. 너 속상하라고. 모르겠어?”

 

 “보이지. 한 번씩 짜증나긴 하는데 내가 반응 보이면 재미있어 할 걸. 내가 티낸다고 쟤가 고쳐질건 아니잖아. 그리고 상현이랑 나랑 뭘 했다고 뺏어가니 기지배야? 내가 속상할게 뭐가 있어? 상현이가 나를 좋아했다 해도 딴 애한테 넘어 간 거 보면 진심이 아니었던 거지. 또 내가 걔한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어장관리하면서 즐기는 애도 아니고 상현이도 지 좋다는 애랑 연애해야지.”

 

 “착한거냐 미련한거냐. 이 둔팅이년. 너랑 나영이 보면 못생긴 애 예쁜 애 못 당하고 예쁜 애 끼부리는 년 못 당한다는 거 딱 이해돼.”

 

 

 

 ***

 

 

 

 그런 인연을 이어오다 기어코 이런 사단이 난거다.

 

 하연이 맨발로 걷다가 택시를 잡아탔다.

 

 “가까운 백화점으로 가주세요.”

 

 구두매장으로 곧장 걸어가 점원이 추천해주는 하이힐을 구입했다. 사실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도 모르는 잘 신지도 않는 하이힐을 말이다.

 

 하이힐이 여자의 자존심 이라는데 예쁜 하이힐을 신으면 구겨진 자존심이 조금은 세워질까 싶어서였다.

 

 백화점을 백 바퀴 돌고 나와 거리를 걷다가 걷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가 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친구들과 가끔 가던 그놈과도 한번 가 본적 있는 Bar가 눈에 보였고 그냥 다리가 아프기도 하고 한잔 하고 싶은 생각에 다른 곳은 알지도 못해서 그냥 들어갔다가 어제 밤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연이 침대에서 발을 내려 바닥을 짚어보았다. 욱신거리긴 하지만 괜찮았다. 처음 접질렀을 땐 너무 아파서 부러진 건 아닌가 싶었다.

 

 붓기도 거의 없는 것 같고 한결 편해진 것이 고맙게도 냉찜질 덕분인 듯 했다.

 

 

 두리번두리번 핸드백을 찾았다.

 인혁이 앉아있는 긴 소파의 한쪽에 놓여져 있었다.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어가 핸드백을 열어 연고와 면봉을 꺼냈다.

 

 직업의 특성상 손을 잘 다치기도 했기에 항상 가지고 다녔다.

 

 그의 곁으로 가 면봉에 연고를 발라 다친 그의 입술에 살살 발라주었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긴 속눈썹, 베일 듯 날렵한 콧날과 적당히 각진 턱선, 너무 하얗지도 않은 적당한 얼굴색의 윤기 나는 피부 숨막 히게 잘생긴 얼굴이다.

 

 연고를 소파테이블에 올려두고 핸드백을 챙겨들고 일어났다.

 

 그때, 인혁이 언제 깼는지 그녀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인사도 없이 그냥 가려고요? 우리 어제 밤 꽤 뜨거웠는데?”

 

 하연이 놀라 동공이 커지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보는 눈빛이 심하게 흔들린다.

 

 아니 이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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