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그가 깨기 전에 도망가고 싶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못하고 간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작게나마 입술에 약을 발라준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어제 그런 개망신을 보이고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마주대할 두꺼운 낯짝이 하연에게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도대체 언제 깼는지 하연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인사도 없이 그냥 가려는 겁니까? 우리 어제 밤 꽤 뜨거웠는데?”
하연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잠깐 앉아요. 그냥 앉혀버리고 싶지만 다친 발목 또 다칠까봐 부탁 하는 겁니다.”
아무 일 없었던 게 분명한데 방금 전 한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렇게 된 마당에 어제 일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그와 거리를 두고 천천히 앉았다.
“어제 밤 일 기억나요? 난 좋았어요.”
“무슨 일이요? 아무 일 없었잖아요?”
하연이 고개를 돌려 인혁을 빤히 쳐다봤다.
얇게 쌍꺼풀 진 큰 눈과 긴 속눈썹, 갈색 눈망울이 사랑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제는 밤이라 어둡기도 했고, 화장한 얼굴에 조명이 비쳐 섹시한 이미지였다면 화장이 거의 지워진 자연광에서의 하연은 순수하고 앳되 보였다.
잡티하나 없이 뽀얀 피부가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매끄럽게 윤이나 감탄사가 나올 만큼 눈이 부셨다.
“정신도 없었으면서 아무 일 없었던 건 어떻게 압니까?”
“내 몸이 불편한 곳 없이 말짱하니까요.”
인혁이 시선을 돌리며 짓궂게 웃는다.
“대체 몸 어디가 불편해야 어제밤 우리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되는 겁니까? 내 말은 하연씨는 발목이 뜨거웠고 난 가슴이 뜨거웠다고 말하고 있는 건데? 하연씨랑 같은 공간에 단둘이 있어서 난 좋았어요. 진심이에요.”
짓궂은 표정을 거두고 이 남자 씨익 웃는 모습이 기절할 만큼 근사하다.
곧이어 하연이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인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크흠, 어쨌든 어제 일은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냉찜질 포함해서요.”
“발목은 좀 어때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어젠 너무 아파서 부러진 줄 알았어요.”
“나도 그런 줄 알았어요. 많이 부어 있었어요. 복사뼈가 없어졌었다니까.”
하연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발목을 보고 있던 인혁의 시선이 하연에게 향했다.
하연이 가볍게 쥔 주먹을 세워서 입을 가린 채 아치형으로 휜 눈이 거의 감긴 채로 인혁을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이 여자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근데 여기가 어디에요? 일반 집 같진 않은데.”
“신화호텔. 2년째 내가 살고 있는 방입니다.”
“왜 호텔에서 지내세요?”
“편하니까. 밥도 주고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아.. 참! 몇 시에요? 출근해야 되는데. 아!”
하연이 벌떡 일어나다 발목에 가볍게 충격이 간 모양이다.
"출근 시간이 몇 시에요?"
"딱히 정해져 있는 건 아닌데 보통 9시 반이에요."
“8시가 좀 덜됐어요. 집으로 갈 거죠? 데려다 줄게요. 아직 혼자 걷는 건 무리에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택시타고 가면돼요.”
“하연씨 구두 내차에 있어요.”
인혁이 수화기를 들었다.
“5분 뒤 차 대기해주세요.”
“구두가 없으면 저 어떻게 가요..”
“내가 또 안고가도 되고.”
인혁이 두 팔을 벌리고 웃는다.
그런 인혁을 보고 하연은 입을 삐쭉거리면서 흘겨보고 있다.
“슬리퍼 좀 빌릴게요.”
“하아.. 슬리퍼 빌려주기 싫은데.”
“치!”
하연이 절뚝거리며 문을 열고 나간다.
인혁이 재빠르게 재킷을 꺼내 입고 하연을 뒤따라가 양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고 부축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인혁의 손길이 싫지 않아 하연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
신화호텔 로비.
호텔 프론트의 직원 두 명이 배꼽에 손을 모으고 미소 띈 얼굴로 정면을 응시한 채 복화술로 인혁의 이야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어제 밤에 사장님 얘기 들었어?”
“나 비번이었잖아. 왜? 무슨 일 있었어?”
“사장님 어떤 여자 데리고 와서 사장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뭐?”
정면을 응시하던 얼굴을 옆으로 확 돌렸다가 황급히 복귀시켰다.
“놀랍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여자 데려오면 꼭 다른 객실에서 시간 좀 보내다 잠은 꼭 사장님 방으로 가서 주무셨잖아? 어제는 바로 사장님 방으로 데려갔잖아.”
“누가 그러데?”
“내가 안내해드렸어. 평소처럼 다른 객실로 안내 해드리려고 했는데 ‘내방으로 가죠’ 그랬다니까.”
직원이 인혁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진짜? 얼굴 봤겠네? 엄청 예쁜가?”
“사장님 주변에 안 예쁜 여자 봤어? 자고 있어서 얼굴은 자세히 못 봤는데, 안아들고 있었거든. 몸매가 진짜 예쁘던데. 다리길고 가늘고. 근데 발목을 뼜는지 엄청 많이 부어있더라. 사장님이 얼음주머니 갖다 달래서 갖다 드렸는데 찜질도 해주셨나봐.”
“얼음찜질만 하셨나?”
“미친.. 정신없는 여자상대로 무슨 짓 할 분 아닌 거 알잖아.”
“사장님 좋아해? 왜 그래?”
장난스럽게 물었다.
“우리 호텔 여직원 중에 사장님 안 좋아한 사람 있니?”
“하긴.. 나는 전에 사장님이 나한테 관심 있는 줄 알았어.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특별 한 게 아니었는데. 저번에 나 생리통으로 휴게실에서 다 죽어갈 때 딱 알아보고 사장님이 조퇴 시켜주고 콜택시를 직접 불러 주셨었잖아. 니가 나 부축해줬고. 비용도 부담해주시고. 다음날 사장님 보고 감사했다고 하니까 무슨 일이냐고. 나 여서가 아니라 직원사랑 딱 거기까지더라.”
“그래 나 기억난다. 우리 호텔 직원이랑은 소문이 절대 없는 거 보면 선은 지키는 거 같아. 사생활이야 미혼이고 애인도 없으니까. 난 우리 사장님 멋지다고 생각해. 다 망해가는 우리호텔 이만큼 일으켜 세운 것도 다 우리 사장님 아니니.”
“그치. 사장님 나오신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인혁이 하연을 조심스럽게 부축하는 모습이 보인다.
프론트 가까이 다가오자 호텔리어들이 정중하게 인사한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사장님이라고 부른 직원이 아차 싶어 인혁의 표정을 살피니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놀란 토끼눈을 하고 인혁을 쳐다보는 하연을 보며 인혁이 고개를 한번 갸우뚱 한다.
“발목은 좀 어떠십니까?
“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하연이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갑시다. 수고해요”
“네.”
“사장님 지금 나가십니다.”
무전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한다.
인혁과 하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로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여 호텔리어들 몇몇이 프론트로 모였다. 고객들의 시선을 의식해 품위 있는 걸음걸이 업무상 이야기를 하는 척 꼿꼿한 자세도 잊지 않았다.
“엄청 예쁘다, 얼굴이 되게 순수해 보이고, 손댄 얼굴은 저런 분위기가 나올 수가 없는데.. 청순하니 분위기도 고급스럽고. 피부는 왜 저렇게 하얗데? 백옥주사 맞나?
“사장님 눈에서 꿀 떨어지는 거 봤어?”
“저런 눈빛 처음 봐.”
“저기서 한 여자만 사랑하는 순애보 되면 너무 완벽해지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저 여자는 전생에 지구를 구했게? 그게 아니더라도 사장님한테 저런 눈빛 받아보는 저 여자는 무슨 복이야. 부럽다.”
***
인혁이 하연을 조수석에 태우고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재킷을 벗어 다리를 덮어 주고는 무심하게 안전벨트를 둘러 매주고 차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걷듯이 뛰어갔다.
하연은 여자를 대하는 인혁의 몸에 밴 듯한 익숙한 매너에 왠지 모를 섭섭함을 느꼈다.
‘바람둥이 같아.’
하연이 가방을 열어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핸드폰! 어디 흘렸나 봐요. 바에서 흘렸나?”
“전화 한번 해봐요.”
“해봐야 소용없을 거예요. 어제 배터리를 빼버렸거든요.”
“아닌데, 어제 내차에서 갑자기 일어나더니 핸드폰 배터리 꼽고 켜더니 다시 가방에 넣는 거 같았는데? 이 차 어디 있을 테니 전화 해봐요.”
인혁이 무심하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하연이 전화를 걸어보더니 울상이 되었다.
“꺼져있데요. 안되는데 꼭 전화해야 될 데가 있는데..하아 어떻해.”
인혁이 뒷좌석으로 가서 조수석 밑과 운전석 밑을 몇 번 더듬더니 핸드폰을 찾아서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이거 맞죠?“
“네, 맞아요. 충전 할 만 한데가..”
인혁이 콘솔 박스에서 충전기를 꺼내 연결해준다.
“집주소가 어떻게 되요?
인혁이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하연이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어주고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시켰다.
적당히 충전시키고 핸드폰을 켠 하연이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어, 언니야. 오늘 10시에 피팅하기로 했잖아. 11시로 늦추는 거 힘드나아..? 내 발목 삣다. 아파죽겠다. 아 개안나아? 알겠다 언니야 미안. 피팅 끝나고 밥 사주께. 이따 보자 드가자.”
사투리 난발하는 게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힐끗힐끗 보면서 웃는다.
전화를 끊은 하연이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인혁을 바라본다.
“어제부터 너무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고마워요.”
인혁이 앞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지그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고향이 어디에요?”
“대구에요.”
“아.. 친언니랑 통화했어요?”
“전 외동이고 고등학교 선배언니에요. 이 언니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직장을 서울로 오면서 다시 연락하게 됐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하연의 아파트에 도착한 인혁이 주차를 했다.
주차 후, 안전벨트를 풀고 하연의 벨트도 풀어준다.
“잠깐 기다려요.”
문을 여고 내린 인혁이 조수석으로 빠르게 걸어와 벌써 차문을 열고 내리려는 하연을 안아든다.
“아니, 걸을 수 있어요.”
“빨리 가서 천천히 준비해요. 나 커피도 한잔 주고. 이정도 신세지고 커피한 잔 줄 수 있죠? 아까 미팅 시간도 늦추는 것 같던데.”
“그러세요. 나쁜 사람 같진 않으니까.”
하연의 집으로 들어온 인혁은 하연을 소파에 앉히고 집안을 둘러본다.
깔끔하게 정돈된 집. 여자 혼자 살기에는 조금 넓은 듯한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진 아늑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저기 커피메이커 있네. 커피 마실래요?”
하연은 자기만의 공간에서 익숙한 듯 행동하는 인혁이 싫지 않았다.
하연에게 절대 거북스런 터치를 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저 남자 진짜 바람둥이 아냐? 씨.. 이하연 니가 왜 저 남자가 바람둥이 일까봐 속상해하는 거야?’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는 하연에게 어느새 인혁이 커피를 내민다.
“마셔요.”
“고마워요.”
“혼자 사는 것 같은데 언제부터 혼자 살았어요?”
“글쎄요..?”
쓸쓸하게 웃는 하연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투리 억양이 전혀 없네요?
“여기 온지 9년째거든요. 그래도 반말할 때 급한 경우나 고향 친구들이랑 통화 할 때는 사투리가 나와요.”
“존대할 때는 전혀 안 쓰고?”
“아마 존대하는 상대는 어려운 사람이라 긴장해서 그런 거 아닌가 싶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준비해요 그만 가볼게요. 커피 잘 마셨어요.”
테이블에 커피 잔을 내려놓고 일어서는 인혁에게 하연이 급하게 말을 건넨다.
“저기 재킷...”
“현관문 열면 바로 보이는 이방에 걸어놔요.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 옷이나 신발 일부러도 갖다놓는다던데? 그냥 걸어놔요. 보면서 내생각도 좀 하시고.”
인혁이 나가려다 멈춰 선다.
“내 이름 서인혁입니다.”
하연의 집을 나선 인혁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중호야. 오늘 오전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네, 10시 미팅이 하나 있고 12시 30분 점심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
“점심약속이 우리 호텔에서 있다고 했지? 그러면, 10시 미팅을 다른 시간으로 미뤄줘.”
[“아.. 네, 알겠습니다.”]
인혁은 차에서 하연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직 아픈 다리로 출근길이 불편할 것 같아 데려다주고 갈 요량이었던 것이다.
차에 앉아 통화목록 버튼을 터치했다.
중호라는 이름 밑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 그녀의 핸드폰 번호다.
새 번호 저장,
하연씨.
이 여자 핸드폰 번호를 저장하며 실실 웃고 있는 모양새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다.
매번 번호를 물어오는 여자들에게 거절만 했지 누군가의 번호를 알고 싶어 이렇게도 안달 났던 적이 없었다.
애인 집 앞이나 직장 앞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는 친구들 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인혁도 그런 때가 있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시간되면 만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서인혁 미친 거냐? 이 여자에게.’
지금 이 순간 자신 인생에 이 여자 이하연이 죽을 때까지 함께 할 마지막여자이기를 인혁은 간절히 바랐다.
***
서. 인. 혁. 그 사람 이름이 서인혁 이구나.
이제 못 보겠지? 어차피 내 인생에 남자는 없잖아. 독신주의에..
연애도 한번 못해보면 억울할 것 같아서 한번 해 본 거잖아. 그래서 벌 받았고.
저렇게 좋은 사람이 나한테 걸린 게 아니라 다행이지.
바람둥이 같다고 마치 최면 걸듯 생각했지만 좋은 사람인 것 같다.
하연은 인혁의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 아까 그가 말한 방, 현관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걸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9시.
20분 정도 반식욕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아직 발목이 욱신거리기에.
하연은 아로마 오일을 두 세 방울 떨어뜨린 후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깜빡 잠이 들었던지 눈을 떠보니 욕조의 물이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욕조에서 일어나 발목을 조심스럽게 돌려보니 한결 부드러워진 게 느껴졌다.
반신욕을 마치고 나와 콜택시를 부르고 가볍게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이라 봤자 cc크림에 눈썹을 그리고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한껏 올리고 립틴트 정도만 바르는 걸로 마무리한다.
이하연 그녀의 직업은 드레스 디자이너.
원래는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로 대학 졸업과 동시에 프랑스로 건너가 4년 정도 활동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 한국으로 들어와 아기 돌드레스와 맘 드레스를 직접 디자인 제작, 대여샵을 열었다.
종종 프랑스업체나 일본쪽에서도 웨딩드레스 디자인 및 제작 주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아기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니 화장품냄새가 아기에게 독할 것 같아 거의 안하게 되고 악세서리 같은 것들도 안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롤업 청바지에 살짝 루즈한 브이넥티 차림의 편한 차림이 출근 복장의 대부분이다.
콜택시가 바로 앞에 왔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흘러내리는 앞머리 없이 끌어 모으고 높게 하나로 묶은 뒤 말아 올려 자연스런 당고머리를 완성했다.
이것 또한 아기들에게 머리카락을 쥐어뜯기지 않기 위함이다.
서둘러 백을 크로스로 매고 단화를 신고 현관을 나섰다.
***
운전석에 앉아 하연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아파트 입구 쪽을 보고 있는 자신이 인혁은 낯설기만 하다.
그는 오늘 아침 하연이 잠에서 깨자마자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피고 머리를 부여잡고 옆으로 쓰러지던 모습과 자신의 입술에 연고를 발라주던 것을 생각하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하연의 생각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지겹지 않다 생각하는 동안 아파트 입구에 콜택시 하나가 멈춰 선다.
‘하.. 혹시 하연씨가... 이 여자 손 되게 많이 가네...’
차에서 내린 인혁이 콜택시 운전석 도어창을 두드려 창문을 내리게 한 뒤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기사에게 보여준다.
“기사님, 혹시 이 핸드폰번호로 오신 겁니까?
“예, 맞는데 왜 그러시죠?”
인혁이 지갑에서 만원권 2장을 꺼내 내민다.
“제가 1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으니 양보해 주시죠.”
“아이고, 고맙습니다.”
“저도 고맙습니다.”
인혁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떠나가는 택시를 바라보다 얼핏 하연의 아파트 입구를 쳐다보았다.
롤업 청바지에 몸에 슬림하게 떨어지는 하늘한 소재의 흰 티셔츠를 입은 여자가 이어폰을 귀에 꼽고 조금 불편한 걸음으로 나오고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수수하지만 발랄한 하연의 모습에 또 다른 매력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이미지가 너무 달라 불편한 걸음걸이가 아니었다면 못 알아봤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연이 입구를 나오자마자 두리번거리며 콜택시를 찾기 시작했다.
인혁이 성큼성큼 걸어가 하연의 앞에 섰다.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앞을 가로 막으니 깜짝 놀라며 급하게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얼굴을 확인한다.
“어? 안가셨어요?”
“데려다 주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죠. 가요.”
“어.. 저기 콜택시 불렀어요.”
“그 콜택시 보냈어요, 내가.”
하연이 아침햇살에 눈이 부신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싱긋이 웃는다.
“이렇게 또 보니 반갑네요.”
인혁은 하연의 한마디가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다는 뜻으로 들려 가슴이 다시 뜨거워짐을 느끼며 얼굴 가득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 episode 01
어제 밤, 인혁의 차 안.
인혁이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하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처음 본 낯선 여자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봤지만 이렇게 끌리는 여자는 처음이다.
오늘 밤은 어쩔 수 없이 같이 있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내일 아침 무슨 이유로 번호를 물어본단 말인가.
물어보더라도 방금 전 한 남자의 더러운 꼴을 본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번호를 알려줄리 만무하다.
핸드폰 번호도 모르는 채로 헤어질 수 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연을 한번 봤다 머리를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대 한숨 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난건지 하연의 핸드백을 들었다.
‘미안해요. 잠깐 실례할게요.’
하연의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배터리를 꼽고 전원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전화가 온다.
[진우씨♥]
‘하트...? 씨.. 그 자식이군.’
핸드폰를 받으려다 작전상 받으면 안 되었기에 운전석 밑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