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로망, 그것은 마왕을 쓰러트리고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여 결혼에 골인하는 것!
신분상승의 기회와 아름다운 신부를 동시에 손에 거머쥘 수 있는 지상 최대의 이벤트, 그것이 바로 마왕토벌이다.
...이었다.
기사는 부친의 검, 아트레이아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당대의 기사였던 선왕의 핵심 기사로써 이번 마왕토벌전에 참가했던 부친께선 그만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말았다. 파편조차 남기지 못한 시신 대신 보검, 아트레이아만이 회수되어 왔을 뿐이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선친이 떠나기 전 가문 비전의 검술을 모두 전수하고 떠나셨다는 점이었다. 20살, 다 자란 기사의 몸에는 활력과 힘이 넘쳐흘렀다. 부족한 것은 오직 한가지, 경험뿐이었다.
그런데-.
그 경험을 채워줄 요소가 그만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 끔찍하게 강했던 마왕이 최고로 어이없게 자살하는 바람에 대륙에서 몬스터란 몬스터가 죄다 북쪽으로 도망가 버린 탓이었다.
몬스터들을 탓할 바는 못됐다. 애초에 마계의 생물인 몬스터가 인간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마왕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일종의 움직이는 마력공급원으로써 넘쳐흐르는 마력을 인간계 전체의 몬스터에게 공급해 주는 것이 바로 마왕의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마왕이 사라져 버렸으니 그나마 마력이 미미하게 흘러나오는 차원간 게이트를 향해 몬스터들이 몰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몬스터가 사라진 세상에서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인간을 베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왕토벌전에서 베테랑 병사들과 핵심 장교들을 몽땅 잃어버린 각국에 전쟁을 일으킬 여력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할만한 일이라고는 고만고만한 산적퇴치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온 나라의 오만 예비용사 - 검사, 기사, 성기사, 심지어 성녀까지 - 가 눈에 불을 켜고 산과 들을 뒤지니 산적이 남아날리 없었다.
하아압!
한 호흡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검을 휘두르자, 허공에 띄었던 나무토막이 정확히 사등분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사포질이라도 한 듯 깨끗한 절단면은 기사의 검술이 경지에 달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선친께서 살아계셨다면 드디어 일검에 혼을 담을 수 있게 되었구나, 라고 하시며 흐뭇해 하셨으리라.
- 짝짝짝짝짝.
바닥에 떨어진 나무토막을 주워 모으고 있을 무렵, 요란한 박수소리가 벌목장을 가득 메웠다.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갈채를 뚫고 불쑥 끼어들었다.
“와우. 병신 같지만 멋있는데요?”
“...이 검술의 어디가 병신 같다는 건가?”
“검술이 문제가 아니라..”
벌목꾼은 똑같은 나무토막을 받침대 위에 올리더니 도끼를 턱, 턱 두 번 내리찍었다. 기사의 것처럼 깔끔한 모양은 아니었지만 사등분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기사나리, 이건 땔감입니다. 굳이 그렇게 힘들여 예쁘게 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태울 거니까요.”
“내버려 두게. 수련도 겸해서 하고 있는 것이니.”
“뭐, 그러시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자, 여기 오늘치 일당입니다. 땔감을 많이 하셔서 평소보다 조금 더 넣었습니다.”
“...고맙군.”
기사랍시고 벌목꾼들이 떠받들어주고는 있지만, 실상은 기사도 그네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봉건체제 하에서 기사는 지배층 중 최하위 계층이며, 영주에게서 월급을 받아 먹고사는 처지다. 그나마도 기사계급은 상속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선친이 돌아가신 지금 기사는 기사가 아니라 수습기사에 불과했다.
다만 선친의 이름에 마을사람들이 예를 표해 기사라고 불러줄 뿐이었다.
하다못해 진정한 기사라도 되고 싶었건만.
수습기사가 기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무훈이 필요했다.
그런데, 현재 그라시아 대륙에서는 그 무훈을 삼을 거리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선친의 별세와 함께 월급도 끊어졌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기사는 장작을 팰 수밖에 없었다.
벌목꾼이 마음을 써서 준 보너스 몇푼은, 저자거리 싸구려 선술집의 밀주 한잔으로 바뀌고 말았다. 독한 것 말고는 아무 특징도 없는 술 한잔을 안주도 없이 한입에 털어 넣으면서,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내뱉었다.
“마왕만 다시 돌아와주면...”
스스로 말을 꺼내 놓고, 기사는 스스로 흠칫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안될 말이지. 모든 악을 물리친 태평스러운 세상은 무릇 모든 기사들의 이상향이 아니던가. 생활이 고달프다고 해서 기사된 자가 마왕을 그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머리는 아니라고 해도, 가슴이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왕만 있어 줬다면, 지금쯤 실력 있는 기사로써 이름을 떨치며 명망 높은 영주의 휘하에서 명예로운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병신 같지만 멋있게 장작을 패는 게 아니라,
신처럼 멋지게 악을 벨 수 있었을 텐데.
결국 기사는 그날 받은 일당을 싸구려 밀주에 몽땅 쏟아 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