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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만 없습니다.
작가 : 아마란스
작품등록일 : 2017.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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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2)
작성일 : 17-07-27     조회 : 290     추천 : 0     분량 : 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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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도 기사는 묵묵히 나무를 베는 중이었다.

 마왕이 없는 세상을 탓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어떤 모양새건 따지고 보면 선친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 아닌가. 언제까지나 지나간 일을 마음에 두기에는, 전쟁의 부담을 던 평민들의 웃음소리가 너무도 눈부셨다.

 무릇 기사란 검술이 뛰어난 자도 아니요, 군대를 잘 다루는 자도 아니요, 다만 올바름을 항시 가슴에 품고, 의롭지 못한 일을 목도했을 때 당당히 검을 들고 나설 수 있는 자를 뜻함이라.

 선친께서 기사에게 검을 가르치며 늘상 강조했던 말이었다.

 몬스터가 아니라 나무를 베면 또 어떠리. 애먼 전쟁에서 그저 공훈을 쌓기 위해 인간을 베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기사다운 일이었다. 기사도 아닌 자신을 기사라고 떠받들어주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못된 바람은 이만 접어야 하리라.

 “하압!”

 짧은 기합성에 화답이라도 하듯, 아름드리 나무가 옆으로 쓰러졌다. 남들 다 들고 찍는 도끼도 팽개치고 검으로 나무를 하는 이 모습이 좀 병신같지만 멋있으면 또 어떠리. 이젠 벌목꾼들도 다 익숙해져서 보고도 그냥 덤덤히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음.. 이정도만 해둘까.”

 아침부터 벤 나무만 해도 벌써 열그루가 넘었다. 이 이상은 쓸데없는 자연파괴일 뿐. 벌목도 하는 법이 있어, 큰 숲을 두고 애둘러가며 빙빙 돌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벌목꾼들의 생활의 터전인 숲이 홀랑 다 죽어버리고 말기 때문이었다.

 “큰일입니다, 기사나리! 지금 마을에 왠 불한당이 들이닥쳐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경비대가 출동했지만 무슨 바람맞은 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습니다요!”

 안면이 있던 벌목꾼이 허둥지둥 달려온 것은 기사가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고 있을 때였다. 벌목꾼의 이야길 듣는 순간, 기사는 곁에 놓아두었던 검을 뽑아들고 그야말로 눈썹이 빠지게 마을을 향해 달렸다.

 근방의 산적패거리들은 이미 다 씨가 마른 줄 알았는데, 용케도 눈을 피해 숨어있던 자들이 있던 모양이었다. 행여나 모처럼 굴러들어온 공훈거리를 놓칠까, 기사는 달리는 발에 힘을 더해 바람처럼 뛰어갔다.

 막 땀이 마른 등줄기가 또다시 땀으로 은근히 젖어갈 무렵.

 숨이 가빠질 정도로 급하게 달린 보람이 있어, 기사는 불한당이 마을에서 도망치기 전에 마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헌데.

 마을 초입에서부터 느껴지는 낌새가 어째 심상치 않았다. 열댓 명의 자경대가 쓰러져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아마도 신고를 받고 출동한 듯한 영주의 경비대들까지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경비대는 약식이라곤 해도 강철 갑옷을 입고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산적패거리로선 무시 못 할 위협인데, 쓰러진 경비대원들은 심지어 질 좋은 방패까지도 착용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쓰러진 사람들에게 남은 검흔으로 미루어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 한명에게 일검에 제압당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단신으로 삼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고작 십여 분만에 제압한다? 그것도 완전무장한 사람들을?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기사가 꺾인 골목길을 돌아 마을 중앙 광장에 진입했을 때는, 마침 마지막 남은 경비대원이 흉적의 검에 무참히 쓰러지고 있는 찰나였다.

 - 스겅. 챙그랑.

 쓰러진 경비대장을 따라 반으로 쩍 갈린 강철검이 뒤늦게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연마질이라도 한 듯 깔끔하게 갈린 절단면을 확인한 순간, 기사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괴물이군. 하지만 물러설 순 없지.

 각오를 다지며 흉수의 앞에 선 순간. 기사는 그만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흉수의 정체가 갑옷조차 걸치지 않은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손에 든 것은 반토막 난 검 한 자루 뿐이었다.

 달빛을 베어 빚은 듯한 하이얀 여인.

 굵은 끈 하나로 질끈 모아 묶은 검은 머리는 허리에 이르도록 길었고, 동부대륙 특유의 선이 얇은 이목구비는 실수로 스친 연필자국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긴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다소 굵은 눈썹과 끝이 살짝 치켜올라간 두 눈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강철 같은 의지가 느껴졌다.

 가냘픈 턱선 아래 다소 아담한 가슴조차 그녀에게 흠이 되지 않았다. 마치 여백의 미를 강조한 한폭의 동양화처럼 그렇게, 오히려 모자람으로써 완벽함을 완성시키고 있는 모양새였다.

 기사는 흉수가 여인이라는 사실에 한번 놀랐고, 또한 그 여인이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미인이라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하지만 모든 정황은 여인이 흉수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기사란, 불의에 대항해 당당히 검을 뽑을 수 있는 자. 선친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기사는 산과 같은 무게감으로 검을 곧추세웠다.

 “거기까지다, 악적! 이제부터는 아트레이아의 주인인 내가 상대해 주마!”

 동부대륙의 사람인 듯한데, 과연 공용어를 알아들을까?

 기사의 우려가 기우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바로 다음순간 밝혀졌다. 여인이 약간 딱딱했지만 흠잡을 데 없는 공용어로 바로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기다려주세요.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여인은 그 한마디를 흘리고는-.

 ...한쪽 신발을 벗고 맨발을 쓰러진 경비대장의 등 위에 올리더니 지분지분 짓밟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짓밟기가 끝난 후에 다시 조신하게 신발을 신더니 기사에게 꾸벅 머리를 숙여가며 예의바르게 인사하기까지 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어.. 음, 그러니까...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니-.”

  “그럼, 바로 시작하지요.”

 - 파슷.

 요, 자가 끝나는 그 순간.

 미미한 파공성만을 남기고 여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사가 다시 여인의 모습을 잡아냈을 때, 여인은 십여걸음의 거리를 한호흡에 좁히며 기사의 목줄기를 향해 일검을 찔러오고 있었다.

 - 까앙!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거칠게 적막을 찢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반복한 훈련으로 단련된 육체가 반사적으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일합에 승부가 갈렸으리라. 경동맥에서 고작 손가락 한마디 떨어진 곳에서 지이잉 떨리는 검명을 들으며, 기사는 오싹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일검이 막힌 순간 이미 여인은 빙글, 반바퀴 몸을 돌려가며 정 반대방향에서 다시금 목을 노려오고 있었다. 심지어 방금 기사가 막으며 생긴 반탄력을 회전력으로 바꿔 검에 실은 터라, 첫 일격보다 더 빠르고 강력하기까지 했다.

 파슷.

 급히 숙인 머리를 부러진 검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잘려나간 앞머리가 뒤늦게 흩날렸다. 하마터면 눈이 베일 뻔한 아찔한 순간이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피해냈다는 점이었다. 제 아무리 여인이 날렵한들 한번 무너진 자세를 수습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기사는 그 틈을 놓칠 만큼 무디지 않았다.

 “합!”

 반쯤 돌아간 여인의 등을 향해 기사는 가차없이 검을 내리쳤다. 마치 산을 실은 듯한 강맹한 일격이었다. 등을 보인 상대에게 검을 내지르는 것이 영 불편했지만, 여인은 그런 것을 생각하며 상대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가진 바 모두를 쏟아내도 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실력자인 것이다.

 - 퍼억.

 아니나 다를까. 기사의 검이 거의 여성의 등을 가격하기 직전, 기사의 안면에 적지 않은 충격이 가해졌다. 비틀거리며 서너걸음을 물러난 뒤에야 기사는 충격을 가한 물체의 정체가 여인의 발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경악했다. 여인은 검격이 빗나가면서 생긴 빈틈을 뒤돌려차기로 메운 것이었다.

 여인이 갑옷을 입지 않은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아마도 여인은 마음만 먹는다면 주먹, 발, 어깨, 몸통 등 모든 부위를 이용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올 수 있으리라.

 경지에 이른 자 사이의 승부일수록 한순간에 결정나기 마련.

 선수를 뺏긴 데다 안면에 불의의 일격까지 당한 기사는 그 순간 패배를 직감했다. 이미 여인은 자세를 수습하고 마치 뱀처럼 지면을 훑으며 재차 기사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사 여인의 검에 목숨을 잃게 된다 하더라도, 아트레이아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일격을!

 “하아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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