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바 모든 힘을 모아, 기사는 머리끝까지 들어 올린 검을 수직으로 내려쳤다.
만일 머리에 충격을 받아 자세가 무너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여인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할지라도 감히 지금의 일격을 받아내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여인은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쳐 몸을 반쯤 뒤집는 것만으로 기사의 일격을 손쉽게 피해냈다. 콰악. 기사의 힘을 이기지 못한 아트레이아가 반쯤 지면에 박히는 그 순간, 기사는 목덜미에 닿은 차가운 검날의 감촉을 느끼고 스르르 온몸의 힘을 풀었다.
기사는-.
패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목을 벨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여인은 스르르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기사에게 뜻밖의 행동을 요구했다.
“패배를 인정한다면 바닥에 엎드려주세요.”
“...기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소.”
“누가 무릎을 꿇으라 하던가요?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달라는 거예요.”
“그게 그것-.”
막 기사가 항변하는 순간.
여인은 휴, 한숨을 내쉬더니 기사의 가슴에 한손을 얹고 가볍게 밀었다. 하지만 거의 몸집이 두 배는 차이가 나는데, 여인이 민다고 기사가 밀릴 리 만무했다.
기사는 코끝을 벅벅 긁으며 여인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인은 갑자기 미는 힘을 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뒤이어 여인은 한쪽 발로 기사의 앞턱을 걸며 다른 손으로 기사의 옷깃을 잡아 확 앞으로 끌어당겼다. 아차 하는 순간 하늘과 땅이 빙글 돌았고, 다음순간 기사는 형편없이 앞으로 넘어져 꼴사납게 널부러지고 말았다.
“우악!”
하릴없이 앞으로 나자빠진 기사의 등에, 살풋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혹시나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여인이 신발을 벗고 한발로 등을 지근지근 짓밟고 있는 게 아닌가. 이쯤 되고 보면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짓밟기의식(?) 이 끝난 후, 여인은 다시 신발을 신더니 타박타박 골목 구석을 향해 걸어가 벗어두었던 그녀의 짐을 챙겼다. 작은 봇짐에는 어울리지 않는 깃대 하나가 우뚝 솟아있었는데, 기사는 알아볼 수 없는 동부대륙의 검은 글자가 흰 기 속에서 날아갈 듯 꿈틀거렸다.
“자, 잠깐!”
“...무슨 일이죠?”
“이유라도 알려 주시오! 당신 정도의 실력자가 대체 왜 이런 궁벽한 산골마을에서 패악질을 한거요?”
“의뢰를 받았어요. 한쪽 눈에 검상을 입은, 산적 같은 모양새의 사내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해를 입힌 이 마을을 지근지근 밟아달라고 의뢰하더군요.”
...그래서 쓰러트린 사람들의 등을 지근지근 밟고 다닌 건가.
보나마나 예비용사들의 산적퇴치에 소굴을 잃은 조무래기 하나가 반쯤 장난삼아 한 의뢰가 틀림없었다. 산적 같은 모양새가 아니라 아마 진짜 산적이었으리라.
기사가 잠시 멍해 있는 사이, 여인은 자박자박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급히 여인에게 소리쳤다.
“지금 의뢰라고 했소?”
“예. 동전 한닢에 검 한번을 빌려드리고 있어요.”
“...동전 한닢을 받고 마을 하나를 아작냈... 흠흠, 짓밟고 다녔다는 소릴 믿으라는 거요?”
“믿기 힘드시면 저한테 동전 한닢을 줘보세요. 다른 마을도 밟아드릴게요.”
...이건 대체.
그쯤 돼서야 기사는 여인의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한 이가 의뢰를 하면 선한 일을 하고, 악한 이가 의뢰를 하면 악한 일을 한다. 이래서야 마치 한자루 검과 같지 않은가.
검이란 무릇 선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사람을 지키는데 쓰이고, 악한 이의 손에 들어가면 사람을 해치는데 쓰이는 법이었다.
여인은 아마도 현 대륙 내에서 감히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 이런 뛰어난 능력을 지닌 여인이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저 검을 팔고 다닌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협이었다.
그렇다고 힘으로 여인을 가로막는 것도 녹녹치 않다는 것이 바로 전에 드러난 터.
결국 기사는-.
일당으로 받은 삯을 죄다 꺼내어 여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1 실버요. 앞으로 10번의 대련을 의뢰하겠소.”
“거절할게요.”
“방금 어떤 의뢰라도 받는다 하지 않았소!”
“첫째, 당신의 검은 이미 완성되어 있어요. 이제와 저와 대련을 한다고 해도 실력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둘째, 전 지금 북쪽대륙으로 향하고 있어요. 의뢰는 가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행하는 부업에 불과해요. 10번의 대련을 위해 이곳에 머무를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리다. 그럼 되지 않겠소?”
“흐음.”
여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기사를 훑어보며 말했다.
“설마 짓밟히는데 쾌감을 느끼는 변태는 아니죠? 열 번이나 짓밟히면 등이 성하지 않을 텐데요?”
“무슨 소릴! 다음번에도 이번과 같을 거라고 생각지 마시오! 다음에는 기필코 내가 승리할 테니!”
“흐흠. 뭐, 두고 보면 알겠죠. 알았어요. 북쪽 대륙으로 가는 동안 10번 대련. 접수했어요. 금방 떠날 거니까 바로 준비하고 오세요. 보다시피 전 가진바 돈이 별로 없어서 식대와 여관비는 따로 준비하셔야 할 거예요.”
베스펠기우스력 12년의 가을.
기사와 여검사의 달콤살벌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