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검사는 세상물정에 어둡긴 해도 모자란 사람은 아니었다.
기사가 뜬금없이 동행을 요청했을 때부터, 여검사는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악인의 의뢰를 받는 것을 곁에서 저지하려는 거겠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선악의 분간쯤을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지근지근 밟아달라고 해서 정말로 밟고 있던 것은, 산적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고의적으로 왜곡해서 해석해서 의뢰를 수행하느라 그런 것뿐이었다.
하지만, 여검사는 일부러 자세한 설명을 아꼈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리라.
그것이 여검사가 이번 여행을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부여한 단 하나의 행동원칙이었고, 지금 그녀는 기사와 함께 여행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든 동부대륙을 떠나 중앙대륙에 도착하기까지의 한달간 별의별 의뢰를 다 수행해 왔지만, 여검사의 검을 받아낸 사람은 기사가 최초였다.
뿐만인가. 기사는 여검사의 등골이 짜릿해지는 강맹한 일격을 두 번이나 날리기까지 했다. 비록 검이 너무 올곧고 정직해서 두 번 모두 쉽게 피하긴 했지만, 적어도 일검에 실린 파괴력만을 따지자면 여검사보다 기사의 쪽이 단연코 앞서 있었다.
마치 산이라도 쪼갤 듯한 기세의 강맹한 검.
기사의 검은, 부드러움의 극을 추구하는 여검사의 검과 정확히 대칭축에 서있는 검이었다.
다른 유파의, 심지어는 다른 지방의 검과 겨루어보는 것은 검만을 배우며 자란 여검사에게 있어 큰 오락거리였다. 하물며 그 상대가 여검사와 제대로 된 대결을 펼칠 수 있는 능력자임에야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적어도 앞으로 열 번은 신명나게 즐길 수 있겠구나.
행여나 여검사가 도망이라도 칠까봐 몇 번이나 여기서 기다릴 것을 다짐받고 나서야 부랴부랴 집으로 뛰어가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며, 여검사는 그 몰래 입가에 여린 미소를 그렸다.
- 스승님. 옆집의 채아가 오늘 머리를 올렸습니다.
- 부럽더냐.
- 제 나이도 벌써 21살입니다. 지금도 꽤 늦은 게 아닐지-.
- 널 검술로 제압할 남자를 한명만 데려오면 언제든 허락해 주마. 하지만 그전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허락 못한다!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검왕의 논리 때문에 21년을 마냥 독수공방해왔다. 딱히 여검사에게 남성혐오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검왕이 손수 성의껏 가르친 여검사를 대체 누가 검으로 꺾는단 말인가.
여검사는 일체의 속임수 없이 정직하게 덤벼왔던 기사의 다부진 눈매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며,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한번 져 줄까.”
실제로 스승님 눈에 흙도 들어갔고 말이지.
검술로만 따지자면 사실 기사는 여검사의 적수가 아니었다. 처음 검을 마주한 순간에 여검사는 이미 기사의 검이 지향하는 방향이 일반적인 검술과 다르다는 점을 한눈에 눈치 챘다.
기사의 검은 굳이 표현하자면 한합에 생사를 거는 일격필살의 검.
순발력과 근력을 중시하는 그 검은, 아마도 마상전투를 위해 특화된 검일 터.
반면 여검사의 검은 처음부터 대인전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검이었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겨루는 한, 여검사는 기사와 열 번 싸워 열 번 모두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기사의 기량이 여검사보다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기사는 말그대로 말을 타고 싸우기에 기사라고 불리는 법. 기사의 진정한 힘은 중장갑을 완전히 갖춰 입고 말 위에 올랐을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한방에 모든 것을 거는 파괴적인 검술은 말을 타고 돌진하며 펼쳤을 때 그 위력이 몇배나 배가될 터. 여검사 역시 기마술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나, 마상전으로 기사와 맞붙게 된다면 아마 열 번 겨뤄 열 번 모두 패할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기사는 불리한 조건에서 겨루면서도 여검사의 등골이 짜릿해지는 일격을 두 번이나 날려왔다. 그중 두 번째 일격은 채 옷에 닿지 않았음에도 그저 풍압만으로 여검사의 의복을 가볍게 찢어놓기까지 했다. 그건 기사의 기량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더할 나위 없는 증거였다.
봐주는 건 그만두자.
그렇게나 솔직하게 전력을 다해 부딪쳐 오는 상대에게 일부러 져준다는 것은 역시 실례였다. 다음에 또 덤벼오거든 또 전력을 다해서 납작 눌러줘야지. 그때가 되면 과연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울상이 된 기사의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하며 여검사는 타박타박 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참 걷다보니, 등 뒤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검사는 그게 누구인지 알면서도 짐짓 걸음걸이를 빨리 했다.
“기다리시오! 아니, 그렇게 다짐을 했는데 이렇게 떠나 버리면 어쩌오!”
“아. 죄송해요. 깜빡 잊었네요.”
“거짓말 마시오! 내 발자국 소리를 듣자마자 속도를 올렸으면서!”
“그럴리가요. 착각이겠죠.”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 무슨 소릴 하는거요?”
“정말이에요. 설마 지금, 가냘픈 이녀자의 말을 의심하는 건가요? 루클랜드의 기사는 여성에게 친절하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보네요.”
여검사는 짐짓, 기사도의 한 구절을 읊었다.
“하나, 나는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는데 내 검을 바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맞죠?”
“윽. 이런 때 기사도를 방패막이 삼는 건 비겁하지 않소?”
“전 쓸 수 있는 건 다 쓰자는 주의랍니다, 기사님.”
여검사는 낼름 기사에게 혀를 내밀어 주고는 다시 걸음걸이를 채근했다. 기사는 분통을 삭이느라 가슴을 탕탕 치며 분개할 뿐이었다.
적어도 앞으로 심심하지는 않겠네.
태양의 위치를 확인하는 척 몰래 기사의 조각 같은 얼굴을 훔쳐보며 여검사는 잔잔히 미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