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판타지/SF
마왕만 없습니다.
작가 : 아마란스
작품등록일 : 2017.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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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4)
작성일 : 17-07-27     조회 : 286     추천 : 0     분량 : 4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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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검사는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 여인이었다. 호젓한 산길을 걷노라면 여검사는 종종 기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동방대륙의 언어로 곱게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럴 때면 평소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산새들까지도 날아와 여인의 어깨에서 노닐곤 했다.

 아침나절, 채 가시지 않은 숲의 안개에 휩싸인 채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여검사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폭의 미인도였다.

 ...적어도 여검사가 어깨에 앉은 산새를 보드랍게 양손으로 감싸 안은 후 사악하게 중얼거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후후후, 아침거리 포획 완료.”

 “음?!”

 여검사의 한마디에 몽환적이기까지 하던 미인도는 삽시간에 세이렌의 마녀도로 전락했다. 심지어 여검사는, 경계어린 시선으로 기사를 쳐다보며 산새를 등 뒤로 숨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쳐다봐도 기사님 줄 건 없어요. 아침거리는 각자 구해야죠.”

 그딴 아침, 필요 없어! 아니 그전에 산새를 노래로 꼬시지 마! 기사는 그만 기겁하여 여검사에게 소리를 치고 말았다.

 “산새를 아침으로 먹지 마시오! 무섭지 않소!”

 “어머, 털만 뽑고 피만 빼면 산새도 훌륭한 먹을거리예요. 설마 안 드셔봤어요? 흐음... 할 수 없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번엔 어떤 노래가 좋을까...”

 “그러니까 그 노래가 무섭다고 하지 않소? 대체 무슨 마법을 쓴거요?”

 “마법이라뇨. 그런 조잡한 기술이 없더라도 사람은 얼마든지 자연과 친해질 수 있어요.”

 ...여검사는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대체적으로는 말이다.

 며칠간 여검사와 함께 여행하면서 기사는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성관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과 친해지면 여러 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어요. 예로 들면 아침 식대도 굳고..”

 “...당신이 가진 돈 한 푼 없이 어떻게 여기까지 여행을 해온 건지는 잘 알았소.”

 심지어 여검사는 모포 한 장 없이 모닥불 하나만 피워두고도 잠도 잘 잤다. 기사는 처음해보는 노숙에 등이 배겨 한잠도 잘 수 없었는데 말이다. 견디다 못한 기사가 여관 삯을 내줄테니 같이 여관에 가서 자자고 해도 여검사는 신세를 지기 싫다며 거절했다.

 정 불편하면 혼자서 가서 자고 아침에 다시 만나면 되지 않겠냐고 까지 하는 데는 더 이상 설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불편해도 일행이 찬바닥에서 자고 있는데 혼자서 좋은 방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어쨌든 그 불쌍한 산새는 그만 놓아주시오. 내가 준비해온 빵과 과일이나 나누어 먹읍시다.”

 “좋아요.”

 기사가 권하자마자 여검사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냉큼 기사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산새는 어느새 그런 여검사의 어깨에서 큰 눈을 돌리며 작게 지저귀고 있었다. 기사는 그쯤 돼서야 처음부터 여검사가 노리던 것이 자신의 빵과 과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씁쓸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거야 원, 완전히 농락당하고 있구만.

 검술뿐만이 아니라 재치에 있어서도 여검사는 기사보다 몇단계나 윗길의 고수였다.

 조촐한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차 한잔할 여유도 없이 둘은 다시 여로에 올랐다. 한동안 말없이 적적한 숲길을 걷던 기사가, 적막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북쪽 대륙에는 왜 가는 것이오? 지금 가봐야 거기 남은 건 텅빈 성채와 아무도 지키지 않는 게이트뿐이오.”

 “별 이유는 없어요. 그저 스승님께서 마지막으로 적과 대전을 벌였던 장소를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스승님께서? 혹 이름난 검술가셨소?”

 “스승님의 존함은 유림이에요. 검왕이라고 불렸죠.”

 여검사의 대답은 많은 것들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기사는 그만 흥분하여 입을 열었다.

 “검왕?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소. 일검에 산을 가르는 실력자셨다고..!”

 “그건 과장이에요. 하지만 일검에 집 한 채를 무너트리시는 광경은 본적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다. 아무런 마법도 없이 인간이 오롯이 검 한자루만을 의지해 집을 무너트린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심지어 그런 불세출의 영웅이 넷이나 모여 도전했는데도 되려 패배를 선사한 마왕은 대체 얼마나 강했던 걸까.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보검, 아트레이아를 꽉 움켜쥐었다.

 “당신도 가능하오?”

 “집을 무너트리는 거요? 전 아직 그 경지엔 이르지 못했어요. 그리고 아마 평생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할 거예요. 검기를 발하지 않고 순수한 검술만으로 집을 가르기 위해서는 강검과 유검이 모두 경지에 이르러 일검에 강과 유를 동시에 담아야 하는데, 전 여성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오직 유검만을 전수받았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음..”

 여검사는 주위를 돌아보다가 폴짝 뛰어오르더니, 머리위의 나뭇잎을 한 장 톡 따서 나무를 쓱 그었다. 다음순간, 사선으로 갈려 옆으로 쓰러지는 나무를 보고 기사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말도 안돼! 대체 무슨 마법을 쓴거요? 경화? 절삭?”

 “마법 같은 게 아니에요. 이정도는 심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잔재주에 불과해요. 대련해본 느낌으로는 아마 기사님도 조금만 더 경험을 쌓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그럴 리가 없소. 나는커녕 내게 검을 가르쳐준 아버님조차도 이런 건 하실 수 없었소.”

 “전부터 기사님의 검을 보면서 느낀 건데, 기사님의 검은 표만 있고 리가 없어요.”

 “난 동부대륙의 개념은 잘 모르오.”

 “중앙대륙식으로 말하자면, 형태는 갖췄는데 마력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의미예요. 혹시 부친께서 특이한 호흡법이나 명상법 같은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나요?”

 기사는 여검사의 말을 듣고 가만히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게 없었다. 기사가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자, 여검사는 담담히 말했다.

 “그렇다면 아마 부친께서는 누군가에게서 불완전한 검술을 전수받으셨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검술을 눈으로 보고 훔치신 걸 거예요.”

 “아마도 후자일 거라고 짐작되오. 아버지께선 검술을 누구에게 사사받았는지 밝히는 걸 무척 꺼리셨으니...”

 “만일 눈으로 본 것만으로 그 정도까지 형태를 완성시키신 거라면, 기사님의 부친께서는 만명에 한명 있을까말까 한 검술의 천재세요. 하지만 마력수련법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훔칠 수가 없죠. 아마도 그래서 기사님께 그런 형태뿐인 검술이 전해진 걸 거예요.”

 “윽.. 어떻게 안되겠소? 난 더 강해지고 싶소.”

 “안달하실 필요 없어요. 아무리 형태뿐인 검술이라도 계속해서 수련을 반복하면 그 형태를 따라 자연스럽게 마력이 흐르게 되거든요. 실제로 기사님의 검에는 아주 미약하나마 마력이 이미 흐르고 있어요. 제 검을 막고도 검이 부러지지 않은 게 그 증거예요.

 이대로 한 10년 정도만 더 수련하시면 자연스럽게 마력의 흐름을 몸으로 터득하실 수 있을 거예요.”

 “10년 이라...”

 그때가 되면 나이가 서른도 넘는데.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여검사는 기사의 말속에 담긴 아쉬움을 읽었는지 재빨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30대에 심검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도 엄청난 일이에요. 스승님은 제가 아는 것만 천명이 넘은 제자를 거두셨지만 그중 30대에 심검을 성취한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어요. 천명에 한명 꼴인 재능인 거죠.”

 “하지만 당신은 이미 그 심검이라는 경지에 들어서지 않았소? 겉보기로는 나보다도 어려보이는데...?”

 “그건 제가 만 명에 한명 꼴인 재능을 타고나서 그래요. 대단하죠? 어서 칭찬해 주세요.”

 여검사는 작은 가슴을 앞으로 쓱 내밀며 으스댔다. 그 모습이 얄밉긴 했지만, 기사는 그녀가 기사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과장해서 행동하고 있다는 걸 모를 만큼 둔하지는 않았다.

 “끙. 두고 보시오. 내 이정도 차는 노력으로 금세 극복해보일 테니!”

 “후후후. 그래요, 어디 한번 해보세요. 아직 기회는 열 번이나 남아있으니까.”

 *****

 그 사고는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났다.

 기사가 여검사와의 실력차를 확실하게 재보고자 재차 대련을 요청하자 여검사는 선뜻 응했고, 둘은 적당한 공터를 찾아 다시 검을 들고 서로를 마주했다.

 파스스 바람에 떨던 나무가 그만 못 견디고 흘린 나뭇잎 하나가 둘의 시선을 가린 순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짓쳐들었다.

 "하아아압...!"

 한번 기세를 뺏기면 두 번 다시 승기를 잡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기사는 처음부터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있는 힘껏 검을 내질렀다.

 헌데.

 회피동작에 들어가던 여검사가 돌연 중심을 잃고 비틀대더니, 기사의 검을 향해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압아아우아앗?!”

 호기롭게 시작했던 기사의 기합성은 괴이한 비명으로 끝을 맺었다. 그 급박한 비명속에는 기사가 얼마나 당황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찰나의 순간, 기사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의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도 검은 아슬아슬하게 여검사의 목을 스치며 지나갔지만, 이후 기사를 향해 넘어지는 여검사를 받아줄 여력까지는 도저히 없었다.

 아차하는 순간 기사는 여검사와 한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뒹굴렀다. 그 순간 기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여검사가 다치지 않도록 온몸으로 끌어안아 보호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몸의 균형을 되찾았을 땐-.

 기사에게 깔린 여검사가 놀란 토끼마냥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기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20살, 처음으로 가깝게 접해보는 여체에서는 달콤한 향내가 화악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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