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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기사는 깜짝 놀랐다. 수련을 통해 날카롭게 다져진 그의 기감으로도 사람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급히 몸을 일으키며 옆을 살펴보니, 파리한 안색의 여인이 실눈을 떠가며 기사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 풀이 누운 정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기사와 여검사가 대련을 펼치기 전부터 이곳에 누워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소란을 피워 미안하오.”
“괜찮아요.. 그보다 이곳의 풀은 독성이 있어서 그렇게 상처를 입고 내버려 두시면 안돼요.”
잠이라도 자고 있었는지 여인의 목소리에는 맥아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때쯤에야 놀란 마음을 수습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누워있는 여인의 곁에는 약주머니로 짐작되는 주머니가 곱게 놓여 있었고, 녹색 덧치마에는 한가운데 십자 문양이 새겨진 원형의 표식이 또렷하게 박혀있었다.
“아, 혹시 치료사시오?”
“예... 스타카토 마을에서 6대째 치료사를 하고 있어요.”
“그럼 염치 불구하고 치료를 좀 부탁드려도 되겠소? 나보다도 우선 여검사를 한번 봐주셨으면 하오. 넘어질 때 혹여 부상을 입지는 않았는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언제나 제 기쁨이죠. 하지만 그전에 작은 부탁을 먼저 드릴게요.”
“뭐든 말씀만 하시오.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혼쾌히 도와드릴테니.”
기사는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자 여치료사는-.
“치료사 좀 불러주세요...”
“...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치료사를 불러달라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기사는 그제야 여치료사가 잠을 자고 있던 게 아니라 탈진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깜짝 놀라 황급히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곁에서 말없이 상황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지켜보고 있던 여검사에게 말했다.
“이런... 대련 운운할 때가 아니군. 혹 많이 다쳤소?”
“아뇨. 감싸주신 덕에 전 무사해요.”
“그럼 우선 근처 마을부터 찾아봅시다! 보아하니 우리중 가장 심하게 다친 이는 바로 이 치료사 같소!”
“흐음. 알았어요.”
어째서일까.
기사는 여치료사를 바라보는 여검사의 시선에서 왠지 모를 불만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안고 일어나보니 마치 어린아이라도 안은 듯 가벼운 게 아무래도 여치료사가 이곳에 방치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의문은 뒤로하고, 기사는 일단 마을로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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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료사를 바라보는 여검사의 시선이 곱지 못했던 이유는 사실 별게 아니었다.
여검사는 검술의 고수.
대련이든 실전이든 검을 뽑아들고 싸우는 이상 주변의 지형을 먼저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울퉁불퉁한 지면은 물론이려니와,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그녀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일 따위는 만에 하나라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었다.
어떤 검술이라도 검술에 변화를 주기 전의 첫 일격이 가장 읽기 쉬운 법이고, 특히나 기사와 같이 강맹한 위력을 주력으로 삼는 검술은 더더욱 그랬다. 기사의 첫 공격 때 ‘우연히’ 여검사가 발을 헛디딘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계획한 대로-.
심지어 기사의 밑에 깔리는 것까지 실로 완벽했다.
그런데 최후의 한순간에 옆에서 방해를 받았으니 여검사가 여치료사를 곱게 보려야 곱게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뭣보다 여검사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여치료사가 기사의 탄탄한 가슴에 꼭 안겨있다는 점이었다.
그야 정신을 잃은 사람이니 안고 뛰는 게 당연하긴 했다. 자칫 등에 없었다가 스르르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지면에 머리를 부딪혀 더 큰 부상을 입게 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리로 안다고 해서 가슴까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생명이 걸린 문제니 할 수 없지 뭐. 아직 기회는 많으니까, 이번은 내가 참자.
기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힘없이 덜렁이는 치료사의 팔을 보며 여검사는 자꾸만 삐뚤어지려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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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에는 난리가 나있었다. 약초를 구하러 나간다던 여치료사가 일주일째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사가 여치료사를 안아들고 마을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낯빛이 변해가며 우르르 몰려오더니 여치료사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보아하니 치료소로 데려가는 눈치였다.
기사는 따라가 봐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 이상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모르는 사이고, 풀에 독성이 있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아무일도 없는 걸로 봐서는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치료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맡기자.
기사는 마음을 정하고 빙글, 여검사에게 돌아섰다.
“이왕 마을에 들어온 것, 오늘은 여관에서 자는 게 어떻소? 이 시간에 굳이 숲으로 돌아가 야숙을 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소?”
“좋아요, 그렇게 하도록 해요.”
“오? 어쩐 일이요? 그동안은 그렇게 사양하더니.”
“딱히 편안한 잠자리가 싫어서 야숙을 한 건 아니에요.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해온 것뿐이죠. 그리고.. 아까 깔렸을 때 느낀 건데, 슬슬 씻을 때가 된것 같더라구요.”
여검사는 어째서인지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자박자박 여관이 보이는 방향으로 앞서 걸어갔다. 기사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킁킁, 자신의 옷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기사는 얼굴을 확 붉히며 여검사의 뒤를 총총히 따라갔다.
“그, 그래서 계속 여관서 묵자고 권해오지 않았소? 이건 내 책임만은 아니오!”
“누가 뭐라던가요? 그냥 제가 씻고 싶어졌을 뿐이에요. 왜, 혹시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웅다웅하며 여관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등 뒤에서는 석양이 그네들을 향해 흐뭇하게 미소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