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판타지/SF
마왕만 없습니다.
작가 : 아마란스
작품등록일 : 2017.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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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6)
작성일 : 17-07-27     조회 : 264     추천 : 0     분량 : 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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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건 백이면 백 기사님 잘못이네요.”

 “...알고 있는 사실을 되짚어줘서 고맙소.”

 꽁꽁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기사는 휴, 한숨을 내쉬었다.

 문 근처만 다가서도 싸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여검사의 화가 풀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용이라니.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국경인근 마을의 주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마왕 사후 공적을 세울 거리가 없어서 고민중이던 기사에게 있어 이것은 다시 없을 기회였다. 이름있는 기사들은 이미 일전의 마왕토벌전에서 죄다 목숨을 잃은 후다. 용을 퇴치할 수 있다면 단번에 새로운 용사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리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혹시 알아, 그 공적을 인정받아 공주님과 결혼을 할 기회를 얻게 될지.

 어느모로 생각해 봐도 이것은 개인적인 공명심과 기사로서의 도리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핫. 안돼지 안돼. 그녀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했던 게 바로 조금 전인데, 정작 내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이래서는 그녀와 다를 바가 전혀 없잖아!”

 “...아무래도 좋지만 좀 전부터 마음속의 이야기가 입 밖으로 새나오고 있어요, 기사님.”

 “억..?”

 망했다.

 그렇게 느꼈을 때는 이미 두번째 동전이 방문을 뚫고 날아오고 있었다. 다시 돌벽에 반쯤 박힌 채 바르르 떨고 있는 동전을 보고 여치료사가 쯧쯧 혀를 찼다.

 “이건 완전히 글렀네요.”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말아 주시오!”

 “음.. 좋아요. 개미 눈물만큼의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적잖소? 그 이전에 개미가 눈물을 흘리긴 하오?”

 결국 여검사가 문을 열어준 것은 기사가 하루종일 방문앞에 달라붙어 온갖 미사여구로 그녀를 추켜세운 후였다.

 끼이익, 열린 방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검사가 흥흥, 콧방귀를 연신 내뿜고 있었다. 한데, 일부러 의자를 돌려서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 또 귀엽기 짝이 없어서 기사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뭘 잘못했는진 아세요?”

 “알다마다. 이야길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 정말 미아-”

 “누가 그것 때문에 화낸 줄 아세요?”

 “음? 그게 아니었소? 그럼... 그래, 자기 수행도 분명 훌륭한 목표중 하나임이 틀림없거늘 섣불리 이타심이 부족하다고 비난하여 미안-.”

 “저 속 좁고 제멋대로인건 저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화낸 게 아니에요. 아, 진짜. 정말 뭘 잘못한지 모르겠어요?”

 “미안하지만 그 이상은 정말 모르겠..”

 “..다고 하면 정말로 여기서 우리 인연이 끝날 줄 아세요. 그리고 뭔진 모르겠지만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의 성의 없는 사과도 금지고요. 자, 어서 대답해 보세요. 뭘 잘못했는데요?”

 우우웃. 이, 이것은 설마.

 먼저 결혼에 성공한 선배기사가 늘상 이야기하던 ‘뭘 잘못했는데?’ 지옥인가!

 그 선배가 못먹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푸념할 때부터 만만치 않으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대체 이 긴장감은..!

 “제가 화를 낸 것은 고작 십여분 같이 이야기를 했던 여치료사님은 제 말뜻을 바로 알아챘는데 며칠간이나 함께 여행을 했던 기사님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 우리가 의미있는 시간을 함께 나누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건 그냥 전부 제 착각에 불과했던 건가요?”

 결국 기사가 한시간여에 걸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빈 후에야 여검사는 간신히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요는 생판 남도 알 수 있는 것을 기사가 눈치 채지 못해 서운했다는 것.

 간단하다면 간단한 문제였지만 기사로서는 약간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막말로 기사가 무슨 독심술사도 아닌데 여검사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낸다는 말인가.

 억울하다는 말도 입밖에 못내고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으려니 옆에서 쿡쿡 웃고 있는 여치료사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기사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여검사가 왜 화를 내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소?”

 “대충은요.”

 “아니, 그럼 언질이라도 줄 일이지 그래 옆에서 땅콩이나 집어먹으면서 이걸 보고 있었소?”

 “쯧쯧, 아직도 모르시네요. 그걸 또 제 입으로 말해 줬으면 여검사님이 좋아라 하셨겠어요?”

 하긴, 그야 그렇지.

 그래도 화를 풀어줘야 할 사람이 여검사 하나 뿐인 게 어디야. 만일 두 명의 여자와 함께 여행 중이었다면 사이에 끼어 말라죽고 말았을 거야.

 기사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었다.

 여치료사가 폭탄같은 선언을 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용을 퇴치하러 가실 거라면 기사님과 여검사님 만으로는 안되요. 용의 숨결을 막아낼 수 있는 마법사나 성기사, 그리고 혹시라도 부상을 입을 경우를 대비한 성녀나 치료사 하나는 반드시 갖추셔야 되요. 수비에 특화된 성기사, 치료에 특화된 치료사, 공격에 특화된 검사, 공방의 조화를 갖춰 팀의 균형을 조율할 기사. 이렇게 최소한 네 명이 한팀을 이루어야 비로소 용에게 대항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기사님은 운이 참 좋으시네요.”

 “으음? 어떤 부분이 말이오?”

 “여기 구명의 은혜를 입은 치료사가 떡하니 대기중이니까 말이에요. 용을 퇴치하러 가실거라면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아, 아니. 말씀은 고마우나, 여치료사님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가 아니오? 무리해서 따라 오실 필요는-.”

 “그 부분은 걱정 마세요. 저의 경우는 오랜시간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같은 자세로 누워있어 일시적으로 근력저하와 피로감이 몰려왔을 뿐이니. 이런 증상쯤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여치료사는 대체 어디에 넣어왔는지 조그만 휴대용 약탕기와 고체연료를 꺼내더니, 이름도 알 수 없는 기묘한 들풀들을 잘게 짓찧어 넣고 팔팔 끓였다.

 헌데 순식간에 완성된 물약은 어째 색깔부터가 구수한 똥색인 데다 불을 껐는데도 계속해서 자잘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것이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폴폴 풍기고 있었다.

 심지어 족히 삼미터는 떨어져 있는데도 콧속을 파고드는 그 고약한 냄새라니. 마치 삼년 묵은 개똥에 썩은 우유를 개어넣은 듯한 그 냄새는 흡사 지옥견의 입냄새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자, 잠깐...! 난 약에 대해선 잘 모르오만 왠지 그걸 마시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문답무용! 에이잇!”

 기사가 말릴 틈도 없이 여치료사는 완성된 물약을 한입에 홀랑 다 털어 넣었다. 지옥의 냄새가 올라올 때부터 이미 방구석으로 피신해 있던 여검사와 기사는 경악에 질린 눈빛으로 여치료사를 살폈다. 행여라도 그녀가 피를 토하고 쓰러질까봐 두려웠던 탓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치료사는 눈을 감고 약의 뒷맛을 음미하더니 짚고 있던 목발을 휙휙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음, 좋았어! 성공이네요! 팔다리에 힘이 돌아왔어요!”

 “...확실하오?”

 “물론이에요. 기분 같아선 한달음에 용이 있는 곳까지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지금 치료사님의 눈두덩이 온통 까맣게 죽어있소. 예전에 똑같은 모습을 한번 본 일이 있었지. 예비기사시험 필기부분을 통과하려고 자양강장제를 물처럼 들이키며 삼일간 밤을 새서 공부했을 때의 내 눈이 딱 그랬었소. 다시 한번 묻겠는데, 정말 치료된 거 맞소? 그냥 몸의 감각이 마비되서 아픈 걸 모르는 것뿐인 건 아니고?”

 기사는 아무래도 여치료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재차 확인했다. 그러자 여치료사는 슬그머니 시선을 먼산으로 돌리며 작게 답했다.

 “...움직이지 않던 팔다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건 틀림없어요. 전 이걸 치료라고 부르죠.”

 “그리고 그 대신 멀쩡하던 쪽에 부작용을 생기게 만드는 사람을 우리는 돌팔이라고 부르오. 순순히 댁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우시겠소, 아니면 꽁꽁 묶여서 강제로 돌아가 침대에 누우시겠소?”

 “자, 잠깐만요.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눈이 이런 건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고.. 음, 그래, 이 정도는 새로 약을 지어 먹으면 얼마든지 치료를..!”

 기사는 깔끔하게 포기하지 못하고 또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 여치료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여검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뒤, 기사에게 양다리, 여검사에게 양팔을 잡힌 여치료사는 짐짝처럼 번쩍 들린 채 여관에서 치료소로 옮겨졌다.

 이후 기사와 여검사는 행여라도 여치료사가 쫓아올까봐 속도를 높여서 빠르게 마을을 벗어났다.

 다른 부분에 대해선 여치료사가 헛소리를 많이 했지만, 적어도 한가지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가 옳았다. 성녀나 성기사. 이 둘 중 최소한 하나를 동료로 넣지 못한다면 애초에 용퇴치는 엄두조차 낼 수 없을 터였다.

 기사가 알기로 그 둘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은 근처에 단 한곳뿐이었다.

 바로 대지모교의 성지인 타라모이라 사원이었다.

 하지만-.

 “후후후, 찾아냈습니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던 여치료사가 불쑥 야영지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기사는 그만 저녁삼아 먹고 있던 사과를 툭,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일부러 일반인이 따라오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강행군을 해왔건만, 골골거리던 여치료사가 용케도 따라붙은 것이었다.

 아침에 봤을 때보다 더 까맣게 죽은 여치료사의 눈두덩을 보아하니, 그녀가 어떤 수단을 써서 자신들을 따라온 건지는 안봐도 뻔했다. 심지어 그녀는 기사와 여검사가 성기사나 성녀를 동료로 구해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으니 기사일행이 타라모이라 사원으로 향하리라는 것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으리라.

 “포기하시죠. 전 하기로 마음먹은 건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할 말을 잃은 기사에게 여치료사는 엄지손가락을 척 세우며 말했다.

 “구명의 은혜, 반드시 갚고야 말겠습니다. 후후후후. 후하하하하!”

 은혜를 갚겠다고 말을 하면서 여치료사는 어째서인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사악하게 웃다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기사가 깜짝 놀라 그녀를 받아안고 보니 이게 웬걸, 그녀는 이미 낮게 코까지 골아가며 푹 잠들어 있었다.

 “끙.. 이게 대체... 이대로 버리고 가야 하려나.”

 “소용없어요. 방금 본인 스스로가 말했잖아요. 하고 싶은 건 꼭 하고야 만다고. 이미 우리가 가려는 방향을 그녀도 알고 있으니 버리고 가봐야 또 따라잡힐 거예요. 아마 그때는 더 독한 약물을 만들어 먹은 뒤일 거고요.”

 “어휴.. 좋은 마음에 구해준 건데 어쩌다 이런 혹덩이가-.”

 “꼭 혹덩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동부대륙에도 약술이 꽤 발달한 편인데, 이 치료사님처럼 즉각적인 효과를 내는 약제사는 단 한번도 본적 없어요. 부작용이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치료사님의 치료술은 굉장한 고급기술이에요.”

 여검사는 기사의 말을 받으며 여치료사를 불가로 데굴데굴 굴리더니 모포하나를 그녀의 몸에 휙 덮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여검사는 여치료사를 동료로 받아들이려고 마음을 먹은 듯했다. 기사는 그녀가 하는 양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작게 한마디를 더했다.

 “그래도 난 그녀의 약은 먹지 않을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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