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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어.”
성기사는 성전추, 레오폴드를 쿵 바닥에 내려놓으며 침통하게 중얼댔다.
곁에 서있던 상인은 뒷통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런 성기사를 쳐다보았다.
“시, 신이 죽다니요.”
“그렇지 않고서야 신도들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이 계곡을 수호하고 있는 성기사에게 돌아오는 보답이 어찌 고작 은화 다섯개 뿐이겠소. 후. 말세야, 말세. 마왕이 토벌되면 뭐하나. 정작 그 마왕을 토벌하게 도와준 태양신께의 신심은 날이 가면 갈수록 떨어져 가는 것을.
아, 신경쓰진 마시오. 딱히 상인님께서 보상을 너무 적게 주었다고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선함보다 악함에 물들어가는 이 세태가 통탄스럽고 안타까워서 내뱉은 말에 불과하니까.
휴, 그나저나 갑옷을 닦고 정화하려면 그것도 다 돈인데 이것을 어찌하나. 뿐만인가, 사람들은 뭐 성기사의 갑옷이 그냥 반짝반짝 빛나는 줄 아나본데, 그렇게 유지하는데도 다 돈이지. 은화 다섯 개로는 왁스 한통 사고 성포 몇개 사면 동전 하나 안남겠구나.
때로는 말이오, 그런 생각도 든다오. 어차피 사람들의 마음은 다 신에게서 떠났는데, 고지식하게 성지에 남아 율법을 지킨답시고 전추들고 자리를 지키는 것도 다 부질없구나, 하는 그런 생각 말이오. 하루종일 신도들을 보호해 주고 그래 고작 멀건 곡물죽으로 저녁을 때울 때면 가끔 성기사고 뭐고 다 때려치고 그냥 산적질이나 하는 것이 더 배부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소.
아, 물론 정말로 그러겠다는 게 아니오. 그냥 그런 생각도 해본다, 그뿐이지.
참, 그런데 이 시간에 산을 탈거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외길에 낭떠러지라 오르기도 힘든데, 혹 도적이라도 만난다면 손써보지도 못하고 그냥 저승행이오. 내, 안그래도 요 근래 누군가에게 떠밀린 듯한 변사체를 절벽 밑에서 여럿 발견하여 수습해 줬다오. 그중에는 글쎄 이상도 하지, 뭔가 크고 둔중한 둔기에 얻어맞은 자국이 뒤통수에 남은 시신도 몇 있었소이다.”
쿠웅.
성기사의 전추가 재차 바닥을 울린다.
그리고 상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품속에서 얼른 지갑을 꺼내들었다.
“오, 오해가 있으셨군요. 아까 드린 은화는 감사의 표시가 아니라, 성전에 바치는 공양에 불과했습니다. 하, 하루종일 여행자들의 안녕을 위해 관문을 지키는 성기사님께 그래 고작 은화 다섯개로 입 싹 씻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 자...”
“어허.. 이러시면 꼭 내가 통행세를 받는 산적 같지 않소. 난 이러려고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그저 부족한 내 신심을 경계하고자 혼잣말을 한 것뿐이오.”
“아.. 그, 그러셨군요. 이건 또 터무니없는 실례를..”
상인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금화를 다시 지갑에 넣었다. 하지만 상인이 다시 지갑을 조이려는 찰나, 성기사가 척 상인의 손을 붙잡으며 뜨거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태양신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싶다면, 헌금함은 저쪽이오.”
“아, 예...!”
절그렁, 헌금함 속에 반짝이는 금화가 떨어진 직후.
성기사는 태양처럼 화사한 미소로 상인을 축복했다.
“오오오, 이런 암흑의 시대에도 아직 이렇게 맑고 순수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영혼이 있을 줄이야. 내 오늘 상인님 덕에 아직 세상이 밝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았소. 자자, 어서 올라가시오, 어서. 이제 곧 날이 저물 테니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참, 혹시 가다가 잠시 비를 피할 곳이 필요하다면 산정에서 오른쪽 갈림길로 조금 들어가시오. 성지는 언제나 신도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으니 말이오. 핫핫핫.“
상인은 몇번이나 불안한 표정으로 성기사를 돌아보며 산길을 올랐다. 그리고 성기사는 그 상인이 성기사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지옥의 쌍욕과 저주를 퍼부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 또 어떠랴. 이미 금화는 헌금함 속에 들어가 얌전히 빛나고 있는 것을.
“휴. 이걸로 겨우 사제님들 한달치 생활비는 모았군.”
성기사라고 좋아서 이런 산적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할줄 아는 거라곤 기도뿐인 사제들이 성지에서 배를 곯고 있는데 어쩌겠나. 그나마 몸을 쓸 줄 아는 성기사가 이렇게 생활비를 마련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죽을 생활능력 빵점인 양반들인 것을.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갖 왕국과 재력가로부터 헌금과 지원이 쏟아지는 지상최대의 이벤트, 그것이 바로 마왕토벌전이었다.
심지어 몰려가는 용사들 틈에 슬쩍 한발 끼어 대충 방패만 들고 있으면 알아서 마왕을 때려잡아주고, 그 공을 나누어주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남는 장사란 말인가.
하지만 그 끔찍하게 강했던 마왕이 어이없게 자살해 버린 후로, 성지로의 지원은 거짓말같이 하루아침에 딱 끊겼다. 뿐만인가. 이름 좀 날려보겠다고 전쟁에 자원했던 선배 성기사들이 싹 몰살당하고 나니, 성지에 남은 거라곤 아직 수련도 완전히 끝내지 못한 반쪽짜리 성기사인 그 뿐이었다.
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마왕이 죽고 나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왕국도, 상단도 아니라 바로 성국이었다.
핵심 성기사를 죄다 잃은 데다 마왕이 죽어 성국에의 지원마저 싹 끊겼으니 뭘 어떻게 해보려해도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자국에서의 생산이 아니라 타국에서의 지원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던 나라라, 지원이 끊긴 순간 말 그대로 붕 떠버리고 만 것이다.
“마왕만 살아있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놀라, 성기사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안될 말이지. 아직 완전하지는 못하다고 하지만 성력을 인정받아 성기사 명단에 적을 올린 내가, 아무리 사정이 좋지 않다고는 해도 흉악한 악의 근원의 부활을 바라서야.
“주여, 이 죄 많은 종을 용서하소서. 사소한 시련을 감당하지 못하고 손쉬운 길만을 찾는 이 나태함을 벌하시고, 또-.”
성기사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을 모으고 주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께서는 아주 빠르게 기도에 답해주셨다.
“아, 신속하게 성기사 발견!”
“오오, 좋소, 바로 권해봅시다!”
“권하고 말고 할 여유가 어딨어요? 이제 성기사는 몇 남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여기서는 제 비장의 마취제로 일단 납치를..!”
“약을 언제 먹이고 있어요? 여기선 역시 제 검으로 빠르게 제압을..!”
뭐, 뭐야 이 괴상한 집단은?
사흘 굶은 악귀와 같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짓쳐들어오는 3인조를 보며 성기사는 꾸욱, 레오폴드를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