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때? 듣기론 여기서 유일하게, 자살 시도자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붉은 아줌마가 잭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저요?"
잭스는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이거 왠지 여기서 안 하겠다고 하면...
'어 그래? 넌 필요 없으니 총살!!' 이럴 거 같은데?
난 입 모양으로, '그냥 한다고 해! 이 xxxx'라고 말했다.
"음! 저도 재밌군요. 참가하죠"
잭스는 알비노 남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사용했다. 저 멍청한 놈은, 알비노 남자가 뭘 재밌다고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냥 앞 사람이 저렇게 말해 무사통과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따라한 것이다.
그래, 너치고는 머리 좀 굴렸다. 잭스!
"좋아. 그럼 다들 동의하는 걸로 생각하고 브리핑을 시작하겠다."
그녀의 말을 요약하면 이랬다. 우린 잠시 후 오후 10시에 정식 서비스 오픈하는, 가상현실게임 '에카론'을 플레이한다. 어차피 감시할 방도가 없으니, 게임 안에서는 무슨 짓을 하든 자유다. 심지어 다른 유저들에 반란군에 대해 언급하고 도움을 청해도 된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서 그 사실이 발각된다면, 바로 전원 총살이다.
에카론에는 오직 남성 유저만이,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 그 아이템의 이름은 '하얀 구슬'로, 에카론 세계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하얀 구슬을 가장 먼저 획득한 남자는, 반란군과 거래를 시작한다.
먼저 수면제를 복용 후, 수도권 인근에 버려지게 된다. 그 후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까지 도망가서, 에카론에 접속한다. 게임 상으로 하얀 구슬을 양도하고 나면, 20억이 입금된다.
거래 후에 반란군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자유이나, 그렇게 되면 사우스탄의 반국가집단 특별 조치법에 의거하여, 20억은 국고로 회수된다. 반란군 측에서는, 거래한 남자의 입막음을 위해서라도 필히 돈을 입금해야 한다.
"더 궁금한 게 있나?"
붉은 아줌마가 우리에게 물었다. 그러자 살이 너무 많아서, 굴러다닐 것 같은 남자가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저... 혹시... 그럼... 하얀 구슬을 얻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아, 중요한 걸 깜빡했군."
붉은 아줌마는 우리를 쭉 둘러보더니 말했다.
"총살이다."
그녀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왜들 그래? 원래 당신들이 원하던 건, 죽음이었잖아?""
가만히 뒀으면, 곱게 죽었을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을 억지로 살려내서, 묘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 희망을 가지고 협박을 하다니. 참 잔인한 사람들이었다. 그때였다.
"저기요! 전 아닌데요?"
방심한 사이에 잭스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저 멍청이가! 지금 당장 뒤지고 싶은 건가!
"아! 그렇군. 당신은 특별히 실패해도 살려주지. 대신 평생 이곳에서 썩어야 할 거야."
뭐야? 예상보다 합리적으로 굴잖아? 물론 여기서 썩는 건, 죽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일단 사는 거다. 살아만 있으면, 언제든 기회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 나도...
"저기.. 저도 원래 죽으려고 한 건 아닌데요..."
"당신은 안 돼."
컥.
단칼에 거절당하니, 너무 놀라 헛바람이 나왔다.
아니 난 왜 안 돼?
"당신은 우리 여왕님이 친히 강물에 뛰어들어서, 건져왔어. 이번 한 번은 넘어가지만, 앞으로 거짓 보고는 총살이다."
여왕님? 여왕님이 날 구해?
아! 무언가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든다.
난간 위에서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
꿈에서 보았던 검고 긴 생머리...
그리고 반란군...
맙소사! 날 구한 건, 설마!
"리브문 트라이얼 입니까?"
그러자 붉은 아줌마가 내게 총을 겨누며 말했다.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아도, 총살이다."
"죄, 죄송합니다.. 하하.."
이 아줌마 총살 되게 좋아하네...
어제 리넬 대교 위에서 만났던 유령은, 수배범이 되어버려 포기했던 나의 첫사랑.
리브문 트라이얼이었다.
맙소사... 그렇게 쫒아 다녔는데, 그걸 못 알아채다니.
말하자면 난, 리브문의 사생팬이었다. 내 꿈은 그녀에게 고백하는 것.
뭐 그녀가 내 마음을 받아주면 좋겠지만, 애초에 기대는 안 한다. 고백의 의미는 내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것에 있으니까.
그 일념 하나로, 죽기 살기로 따라다녔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그녀는 수영 금메달리스트이자, 사우스탄에서 제일 갑부인 제크리 트라이얼의 딸이었다. 당연히 경호는 엄중했고, 나 같은 일반인은 리브문의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가끔 파파라치 컷이나, 기자들의 기습 취재로 인해 찍힌 사진들이 인터넷에 올라왔으니까. 그 정도 거리라면, 충분히 고백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올해 여름, 내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니 웬걸? 그녀가 사실 국가전복을 꾀하는 반란군이었다니. 사실 난 국가보다 그녀가 좋았기 때문에, 별 상관없었다. 문제는 그녀가 꼭꼭 숨어버려 자취를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난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날 납치하다니?
나와 내 친구의 목숨을 위협하다니?
이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 거야?
그녀들이 올라가고 얼마, 안 있어 쇠사슬이 자동으로 풀렸다. 아마도 어디선가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나와 잭스는 자유의 몸이 되자, 납치된 공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쾌적한데?"
쾨쾨한 곰팡이와 회색 시멘트 일색인 조금 전 그곳은, 건물구조 상 지하창고라고 볼 수 있었다. 지하창고에서 나와 계단을 올라가니, 깔끔한 오피스텔 구조의 공간이 나왔다. 거실에는 커다란 식탁 겸 테이블이 있었고, 부엌에는 각종 조리기구와 식자재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화장실과 욕실에 물을 틀어보니, 물도 콸콸 잘 나오고 냉온 전환도 빨랐다.
방은 큰방 둘에, 작은방 하나.
큰방엔 수면유도기가 탑재된 고급침대가 세 개씩 있었고, 작은 방에 두 개가 있었다. 각 침대 옆에는 TV 광고에서 익히 봐왔던 에카론 접속 캡슐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VIP등급이었다. 달걀을 살짝 옆으로 뉘여 놓은듯한 모양이었는데, 은은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거 1억짜리잖아?"
잭스가 군침을 흘리며, 캡슐을 쳐다본다. 참.. 속 편해서 좋다. 지는 어차피 안 죽는다 이거냐? 사실 나와 잭스는 이렇게 가둬놓고 억지로 게임을 시키지 않아도, 에카론을 플레이할 계획이었다. 물론 500만 골드짜리, 보급형이었지만. 잭스가 1억짜리 달걀을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한다.
"너가 살아. 아이슈."
애써 외면하려 했던, 가혹한 현실. 소꿉친구였던 잭스와 나는, 서로의 목숨을 빼앗아야 살 수 있는 처지가 돼버리고 말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난 아니다. 난 그를 이곳에서 평생 썩히는 대가로, 자유와 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저 녀석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있건, 둘 다 살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었으니까. 물론 그것도 내가 다른 6명을 제치고, 그 아이템을 손에 넣는다는 가정하이지만 말이다.
"닥쳐. 잭스"
"난 여기도 좋을 것 같아. 1억짜리 게임기도 있고. 하핫"
잭스가 눈만 둥글게 말고는, 거짓 웃음을 지었다.
야. 너 진짜로 웃을 때는 보조개 나오거든?
"나한테 생각이 있어. 너와 나 둘 다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그게 뭔데?"
"만약 내가 구슬을 찾게 되면, 그래서 내가 여기서 탈출하고, 넌 여기서 평생 썩어야 한다면..."
난 애써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니가 나가라. 난 대신 여기 남을게."
"뭐야 그게! 똑같잖아!"
"아냐, 넌 밖에 나가면 제니도 있잖아."
제니는 잭스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재해오고 있는 여자친구다.
잭스에겐,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넌? 너도 이제 여자도 만나보고 해야지."
하하.. 이 녀석 아직 뭣 모르는군.
"그렇기에 난 이곳에 남는다."
"뭐? 너 설마!"
잭스치곤 눈치가 빠른데?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에카론 접속캡슐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카론에서 여자친구를 사귀려고? 정신 차려! 저건 그냥 게임일 뿐이야!"
아.. 그럼 그렇지. 이래야 잭스지.
"야... 내가 설마 게임 속 여자를 만나려고, 지금까지 솔로였겠냐?"
"그럼. 뭔데?
내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여기 대장이 리브문 트라이얼이라잖아."
그러자 잭스는 내가 더 한심하다는 듯 소리쳤다.
"너 설마 리브문 트라이얼을? 아니 너 아직도 그 여자 좋아하는 거야? 마지막 사랑은 캐시 라트헬이라며!"
"음.. 자고로 남자는 첫사랑을 잊을 수 없는 법이지. 기회가 된다면 고백도 할 거야."
잭스가 내 멱살을 잡고 말한다.
"아이고, 미친 아이슈! 이건 진짜 미쳤어! 그러다 총살당하면 어쩌게!"
녀석의 과격함에서, 날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기에, 난 그를 여기에 두고 나가 살 수 없다. 차라리 이렇게, 진실성은 없는 코웃음으로, 그의 걱정을 비웃는다.
“후훗.”
“후훗?”
의아해하는 잭스. 저 표정을 보니, 왠지 더 먹여주고 싶구만. 난 다음에 이어지는 말로, 그의 참을성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첫 사랑에게 고백도 못 해본 찌질이는, 상남자의 배포를 이해할 수 없지."
난 지금 잭스에게, 리브문 트라이얼이 여기 있으니 내가 여기 남겠다고 말하는 중이다.이곳에 남는다면 평생 감금당할 수도 있고, 언제고 총살당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리브문 트라이얼을 좋아하니까 여기 남겠다고, 그게 좋을 것 같다고, 거짓말하는 중이다.
사실 나도 이런 데서 평생을 썩긴 싫다.
총살당하는 건 더더욱 싫다.
하지만 친구를 두고 나 혼자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싫다.
물론 잭스에게 한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니다. 난 아직 첫사랑의 강렬함을 잊지 못한 상태였고, 기회가 된다면 고백도 해보고 싶다. 리브문이 그 고백을 받아주고, 나와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준다면야, 당장에라도 무기감금을 자처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으니까... 만약 이곳에 갇힌다면 외로운 도토리인 채로 썩어가겠지.
"뭐래, 이 모태솔로가!"
"뭐, 인마?"
잭스와 투닥투닥 싸우기 시작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한심해 보여도, 이건 우리만의 우정방식이었다. 절망적 현실을 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