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큰일이군... 큰일이야.."
"왜 그러시죠?"
버크가 심각한 표정으로 혼잣말하자, 로베르가 물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그는 27년 전, 복싱 웰터급 세계챔피언..."
"아, 다크로!"
윌리가 알겠다는 듯 외쳤다. 누구지?
"그게 누군데?"
안드레스가 말했다. 눈치를 보니 잭스와 베이돈도 모르는 눈치였다.
"어린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 그는 한때 체급을 떠나, 세계 최강의 사내라고 불리던 자네."
버크의 말에 의아 한다. 권투에서 체급은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어떻게 웰터급이 세계최강이지?
"체급을 초월하는 천재적인 전투 감각 덕분이었지. 슈퍼 헤비급 챔피언과 사석에서 시비가 붙은 적이 있는데,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 버렸다는군."
잠깐... 그 정도면 이거.. 너무 위험한 거 아냐? 체급차가 있어도 그 정돈데, 에카론에서는 동등한 조건의 육체로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아무리 다양한 컨텐츠가 있어도, 에카론 역시 전투가 최중요 요소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 위험해. 그를 어떻게든 견제해야 한다.
"그 정도의 복싱선수가 왜 우리대에서는 기억되지 않지?"
안드레스가 물었다.
"그는 사고로 두 주먹을 잃었거든요... 그 후로 점점 잊혀졌어요.. 불쌍한 사람.."
윌리가 대답한다. 그랬군. 그가 큼지막한 바람막이를 입고 있던 이유는, 팔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아이슈, 코드 뽑으러 갈래?"
잭스가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 좋은 의견인데?
-그건 안된다. 현실에서의 방해는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비효율적이니까.
붉은 아줌마의 목소리다. 와... 이 아줌마 잠도 없나? 벌써 새벽 1시 반인데? 정말 이들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나 보다. 하긴 저들 입장에선, 우리끼리의 불필요한 싸움은 목표에 해가 된다. 그러니 현실에서의 방해를 금지하는 것이...
"잠깐 그럼.. 게임 속에선 견제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내가 물었다.
- 치열한 쟁투가, 더욱 빠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우리가 현실에서의 분쟁을 막는 이유는, 단 하나다. 게임 속의 약자가 현실에선 강자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원하는 건, 게임 속 아이템이다. 게임에서 도태된 자는 지켜줄 필요가 없지. 따라서 게임 속에선 뭘 하든, 자유다.
"아이고..뼈 속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하하하.."
난 간신배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붉은 아줌마와의 대화 이후, 우린 서로의 믿음 스텟을 밝히기로 했다. 동조율이 높을수록, 게임 캐릭터의 컨트롤이 용이하다. 뭐 스킬이라던가 직업이라던가.. 노하우가 쌓이면 다르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동조율이 곧 전투력이다. 전략을 효과적으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아군의 전력파악을 필수불가결이다. 우리의 믿음 스텟은 다음과 같았다.
1위 안드레스(알비노 남자, 왕재수) - 7892
2위 버크(전 편집장, 성희롱 아저씨) - 6974
3위 아이슈(재벌가 사위가 될 남자) - 6825
4위 잭스(정의의 울보,감성 곰탱이) - 6500쯤
5위 로베르(부랑자계의 패션피플) - 6154
6위 윌리(잭스의 의형제, 애처가) - 5712
7위 베이돈(120kg의 사나이, 소심이) - 5400쯤
잭스와 베이돈은 정확한 수치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문득 궁금하다.
"다크로는 믿음이 몇일까?"
"적어도 8000 이상..."
내 물음에 안드레스가 답한다.
"근거는?"
버크가 안경을 번득이며 물었다.
"난 7천 후반대이지만, 천천히 걷는 게 고작이야. 스텝을 밟으며, 살살 제자리에서 뛰는 건 무리거든."
녀석의 말에 우린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목숨을 건 경쟁에서, 경쟁자가 강적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분위기가 가라앉는 걸 눈치 챘는지, 잭스가 위로의 말이랍시고 떠들기 시작한다.
"믿음이 그렇게 안 높을 수도 있어."
안드레스가 잭스를 무시무시하게 째려본다. 감히 너같이 멍청해 보이는 놈이, 내 의견에 토를 달아? 하는 눈빛이 분명하지만, 태생적으로 뻔뻔한 잭스는 묵직하게 소신을 펼친다.
"내 경험상, 핑이 좋다고 컨트롤이 나쁜 게 아니고, 핑이 좋다고 컨트롤이 나쁜 게 아니야."
아~ 그렇구나! 다크로때와 마찬가지로, 안드레스와 베이돈, 즉 젊은 세대는 그것이 뜻하는 바를 바로 캐치했다.
"무슨 말이지?"
가장 늙은 버크가 물었다.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는 버크를 보며, 내가 먼저 설명해 버린다.
"핑이란 인터넷 반응속도라고 보시면 되요. 핑이 좋을수록 게임 캐릭터의 조작이 쉽지만, 그게 절대적인 실력인 건 아니거든요."
"아~ 그 핑이라는 걸, 믿음 스텟으로 봐도 되겠군요?"
그나마 젊은 편인 로베르가 알겠다는 듯 물었다.
"맞아요. 그 나쁜 핑에 적응하거나, 본인이 원래 갖고 있는 조작능력이 월등하다면, 핑이 나쁘더라도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어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힘을 내자구요!"
잭스는 해맑게 희망을 부추겼다. 그런데, 다들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다크로도 우리와 똑같이 시작했어. 그건 나쁜 핑에 적응한게 아니라,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거군."
"맙소사... 그는 아직 감이 죽지 않은 거야... 10년이 지났는데도!"
버크와 윌리가 차례로 말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묘해지자, 눈치를 보던 잭스가 해맑게 말했다.
"음... 생각해보니, 역시 다크로는 믿음 스텟이 높은 것 같아요!"
딴에는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하나본데... 우린 더 침울해졌다. 어느 쪽이든 다크로가 우수한 것엔 변함이 없으니까. 조여 오는 긴장감에, 다들 조용히 몸을 떨었다. 물론 잭스는 빼고.
***
에카론 캡슐에는 다음과 같은 등급이 있다.
VIP등급 - 동조율 손실률 0% / 1일 접속가능시간:20시간 / 가격 : 일억 골드
1 등급 - 동조율 손실률 5% / 1일 접속가능시간:18시간 / 가격 : 오천만골드
2 등급 - 동조율 손실률 10% / 1일 접속가능시간:16시간 / 가격 : 천만 골드
3 등급 - 동조율 손실률 15% / 1일 접속가능시간:14시간 / 가격 : 오백만골드
감금동기들은 전부 VIP캡슐을 사용하기 때문에, 하루에 20시간을 플레이 할 수 있었다.게임 속 시간배율이 10배인 걸 감안하면, 이건 엄청난 특권이었다. 에카론 유저의 대부분은 젊은 10대 20대 층이 독보적이다. 금전적인 여유가 없는 그들은, 대부분 3등급짜리 캡슐을 사용해야 했다.
접속가능시간도 그렇지만... 동조율 손실은 정말 뼈아프다. 지금도 토 나올 것 같은데, 15% 손실이라니... 믿음 스텟의 맨 앞자리가 달라지고도 남을 수치다. VIP등급 캡슐만으로도 일반인들을 앞지를 수 있겠지만, 이건 중요치 않다. 경쟁자인 다크로 또한 VIP등급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린,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타임테이블을 짰다.
00:00 ~ 07:00 - 1차 접속
07:00 ~ 07:30 - 조식 및 개인정비
07:30 ~ 14:30 - 2차 접속
14:30 ~ 15:00 - 중식 및 개인정비
15:00 ~ 21:00 - 3차 접속
21:00 ~ 24:00 - 석식 및 취침
침대에 탑재된 수면유도기가 없으면, 절대 소화할 수 없는 스케줄이다. 수면유도기는 본래 불면증 치료용으로 개발된 의학기구였다. 하지만 시간을 쪼개서 쓰고자 하는 사회적 엘리트들이, 이 기구를 집에 들임으로면서, 수면유도기는 부와 선도의 상징이 되었다. 캡슐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수면유도기가 탑재된 고급침대도, 상당한 가격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비싼 만큼 기능도 뛰어나서, 수면유도기능은 물론, 수면 시 2~3배의 효율로 뇌의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수면시간을 21시에서 자정으로 한 것은, 혹시 모를 이벤트를 위한 안배였다. 이것은 온라인 게임을 많이 플레이해본, 잭스의 의견이었는데, 통상적으로 게임의 이벤트는, 자정을 기해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이벤트에서 유리한 조건을 선점하려면, 자정에서부터 장시간을 플레이하는 게 유리했다. 따라서 미리 수면을 취한 뒤, 만전을 기해 이벤트에 임하자는 취지였다.
상당히 고된 스케쥴이지만, 목숨이 걸려있으니 해야만 한다. 나와 잭스를 제외한 사람들은, 원래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제 각각의 이유로 삶을 구하고 있다. 인생의 밑바닥을 박차고 올라서려는 그들의 역동적 에너지에, 나와 잭스 또한 고양했다. 우린 의기투합하여, 둘째 날 계획을 세웠다.
작전명 '각개 거점 집합'!
초보섬에서의 최종 집합지점인 '힘의 바위'에 모이기 전, 섬의 동서남북으로 자리한 4개의 도시를 거점 삼아, 출발지점이 가까운 사람끼리 먼저 집합하기로 했다. 12시 마을에서 시작한 버크와 1시 마을에서 시작한 잭스는 북부도시에서 모이기로 했다. 둘 다 4시 마을에서 시작한 윌리와 로베르는 동부도시에서, 6시에서 시작한 베이돈은 혼자 남부도시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중식 시간에 상황을 봐서, 동부팀과 서부팀 중 진행속도가 빠른 쪽이 베이돈을 픽업해 '힘의 바위'로 갈 생각이다.
아, 그리고 난 9시에서 시작했기에 서부팀이다. 그리고 나와 합류하게 될 녀석은... 안드레스였다.
어휴...
안드레스 녀석은 10시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하필 걸려도... 아냐, 안드레스도 팀원이다. 그래,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난 그렇게 마음먹으며, 열심히 기기 시작했다. 우선 이 몸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다.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뭐 그렇게 창피하지는 않다. 내 옆에도 앞에도 뒤에도, 나와 똑같이 기어 다니는 유저들이 수두룩했다. 그렇게 게임시간으로 하루를 기어 다녔다. 아니, 무슨 게임이 이래? 이걸 돈 주고 한단 말야?
- 오기 스텟이 1 상승하셨습니다.
아, 특수스텟 '오기'는 꾸준히 오르는군. 대화를 해보니, 전부 이 '오기'라는 스텟을 얻었다고 한다. 참... 얻기도 올리기도 거지같은 스텟이로군. 상태창에서 확인해보니 오기는 수치/100%로 특수 스텟 성장률을 높인다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오기의 수치가, 모든 스텟의 기본치인 1000이라 치면, 특수 스텟 성장률이 10% 올라간다는 소리다.
특수 스텟은 처음부터 갖게 되는 기본 스텟, 믿음 힘 민첩 체력 지능과 달리, 게임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획득하실 수 있는 스텟이다. 특수 스텟은 총 24개가 있으며, 특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특수 스텟 2개를 합성할 수도 있다고 한다. 배울 수 있는 수의 제한도 없으니, 일단 얻고 보는 것이 이득이다. 단, 레벨업 시 얻게 되는 스텟 포인트를 분배할 수 없고, 특정 행동의 반복과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만 성장시킬 수 있다.
"후우... 그래 이거 참, 반복적이면서도 특별한 경험이구만!"
거의 이틀 동안, 땅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쉬고, 기어 다니다가 쉬고를 반복했다. 흡사 재활치료를 받는 기분이었다. 이 과정에서 레벨은 3레벨을 달성했고, 오기가 무려 37이나 성장했으며, 믿음 스텟은 100 정도 올랐다. 아, 레벨업으로 얻게 된 스텟 포인트는, 어차피 찍어버린 민첩에 몰빵하기로 했다. 난 현실에서도 순발력이 좋은 편이니, 이대로 민첩을 올려 도적이나 사냥꾼을 해볼 생각이었다. 뭐 이전 게임에서도 그런 종류의 직업만 해왔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왜 그러지?
나는 그들이 웅성거리는 이유를 살피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상당히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마을 유저들의 이목을 끈 건, 어떤 여성 유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