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 힘들어. 믿음스텟이 낮으면 개고생이라더니."
낙엽은 나에게 서부도시까지 하루면 간다고 했는데, 난 사흘에 걸쳐 도착할 수 있었다.
믿음스텟이 낮은 탓에, 난 낙엽보다 걷는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그래도 수확이 있었다.
[아이슈의 상태창]
레벨 : 8
직업 : 없음
지위 : 없음
명성 : 0
스텟포인트 : 0
<기본 스텟>
믿음 : 7075(최대)
힘 : 1000
민첩 : 1140
체력 : 1000
지능 : 1000
<특수 스텟>
오기 : 1122
끈기 : 1108
<액티브 스킬>
없음
<패시브 스킬>
숨쉬기(연습 7레벨)
걷기(연습 6레벨)
<직업 스킬>
없음
보이는가? 난 쉼 없이 걷던 도중, '끈기'라는 스텟을 얻을 수 있었다. 끈기는 수치/100%로 스킬 성장률을 높인다고 나와 있다. 현재는 수치가 1108이니까, 스킬 성장률이 11.08% 올라간다는 거다!
이상한 점은, 오기스텟을 훨씬 먼저 얻었는데, 끈기스텟과 14밖에 차이가 안 난다는 점이다. 생각해본 결과, 끈기는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올랐는데, 나는 숨 쉬고 걸을 때마다 스킬을 사용한다. 그래서 난 경이로운 속도로 끈기스텟을 올리고 있었다.
또한, 끈기의 효과 때문에, '걷기'와 '숨쉬기'에도 많은 성장이 있었다.
- 숨쉬기(패시브 / 연습 7레벨) : 모든 것의 기본이자 시작입니다. 숨 쉴 때 체력회복 35% 상승, 마나회복 35% 상승. 10초이상 무호흡 시 보너스 미적용.
- 걷기(패시브 / 연습 6레벨) : 빨리 갈 순 없지만, 멀리 갈 순 있습니다. 걸을 때 체력소모 60% 감소, 보행 시 두 발이 모두 지면이 떨어지거나 1초이상 미보행 시 보너스 미적용.
두 스킬 모두 쉽게 얻은 스킬이고, 비전투적인 스킬이었다 때문에 쉽게 성장시킬 수 있고, 전투가 아닌 통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성장했다. 거기에 끈기와 상호호혜적인 성장을 거듭하니, 뭔가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저 두 스킬로 끈기를 무지막지하게 성장시켜서, 다른 스킬들을 대성하면 될 것 아닌가! 스킬의 효과가 별로면, 압도적인 스킬레벨로 찍어누르는 거다!
"어차피 게임은 레벨이 깡패야!"
난 그렇게 또다시 자신을 합리화하며, 눈앞의 도시를 바라본다. 눈에 띄는 건, 역시나 거대한 성벽과 성문.
회색빛의 바위들로, 얼기설기 쌓아놓은 모양새가 그닥 튼튼해 보이진 않는다. 성벽 대부분이 초록빛 덩굴로 둘러싸여 있고, 여기저기 금이 간 것이 오래된 성벽임이 분명했다.저길 통과하면, 안드레스 놈이 기다리고 있겠군. 조금 전 점심을 먹을 때, 녀석은 이미 저곳을 통과했다고 으스댔다.
"그리고 뭐? 난 통과도 못 할 거라고?"
두고 봐라. 안드레스. 보란 듯이 입성해 줄 테니. 서부도시의 성문 앞에는, 병사 두 명이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근엄하게 말했다.
"아이슈 받아라~"
내말에 그들이 쥐고 있던, 창끝을 내게 겨누며 말했다.
"웬 놈이냐."
어라? 여기 NPC는 되게 쌔네... 9시 마을의 NPC들은 전부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래서 NPC들은 전부 이런가? 넘겨짚고는 막나갔던 건데...
"아하하하... 형님들. 전 9시마을에서 온 아이슈라고 합니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창을 손사래 쳤다.
"도시의 방문목적은?"
문지기들이 사무적이고 차가운 톤으로 말했다.
"만나야 될 사람들이 있어서요. 여길 꼭 좀..."
"여긴 아무나 지나다니는 곳이 아니다. 돌아가라."
문지기 중 한 명이 내 말을 끊고, 창끝으로 내 가슴팍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더 다가오면 목숨을 빼앗겠다는, 단호한 축객의 표현이었다. 난 이곳에서의 목숨이, 곧 현실에서의 목숨과 진배없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압박이 남다르다. 그러나 난 이곳을 통과했던, 유저를 안다. 낙엽은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듯했다. 그렇다면 나도 가능하다. 확신을 갖고 묻는다.
"혹시 제가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자 문지기는 창을 치우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한다. 하하, 다 알고 왔다고! 연기는 그만하고, 어서 성문돌파 퀘스트나 내놓으시지!
"아, 마침하나 있군. 사실 우리가 골치거리가 하나 있었거든..."
- 퀘스트 발생! 초보섬의 서부도시 문지기들은 몇 달 전부터, 성벽 내부에 득실거리는 바퀴벌레...
자,잠깐만. 바퀴벌..?? 설마 아니지?
- 성벽 내부로 들어가 바퀴벌레 10마리를 잡아오세요! 보상은 서부도시 통행증과 경험치 1000입니다.
"어때 할 수 있겠나?"
문지기가 무너지는 나의 속도 모르고, 태연히 입을 열었다. 아, 왜 하필, 바퀴벌... 아니 바선생님을 잡아야 하는 거냐고!! 그것도 한 분도 아니라... 열 분씩이나! 난 차마 그 존재의 풀네임을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바선생님을 무서워한다. 아니 그 번들번들...
"으악!"
흐릿한 형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온몸이 진저리쳐진다. 나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현실을 부정한다.
"아닐 거야.. 이래선 안 되는거야.. 에카론!"
"이봐, 당신 괜찮아? 못할 것 같으면, 안 해도 된다고?"
문지기가 눈치 없이 나의 안부를 묻는다. 니 눈엔 내가 괜찮아 보이냐! 아니 잠깐..
"그럼 혹시, 통행증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
"없어."
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대답하는 거 봐. 진짜 없나 봐! 나 진짜 바선생님과 대적해야 하는 거야? 내 상식으론, 그 분은 대적불가의 존재라고!
"못하면 말고..."
"아뇨! 할게요! 해야 돼요!"
- 바퀴벌레 사냥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으악! 시스템 누나! 그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입에 담지 말아줘! 하... 정말 싫었지만 어쩌겠는가. 게임진행을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관문인 것을. 나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는, 외성문을 통과했다. 성문은 총 두 개로 되어있었는데, 외성문과 내성문 사이에는 10m가량의 터널이 있었다. 촘촘한 쇠창살로 이루어진 내성벽의 틈으로 환한 빛이 새어 나온다. 참 밝아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내가 갈 곳은...
"여기다. 이 나무문으로 들어가서 바퀴..."
으악! 듣지마. 듣지마. 난 재빨리 귀를 막아, 바선생님의 존함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뭐, 잡을 수 있는 도구는 이 앞에 있으니까. 아무거나 활용해서 잡도록 해. 그럼."
그가 삐거덕거리는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문을 그렇게 냉정하게 닫아버리다니.. 이 지옥에 날 홀로 남겨놓고.. 나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그가 가리킨 테이블 위를 살펴보았다.
"이게 웬..."
그곳엔 당장 전쟁이라도 치러야할 것 같은 도구들이 즐비해 있었다. 아니, 도구라기보단 무기였다.
"아니 왜 이렇게 거창... 으악!"
난 다시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져버렸다. 안돼! 상상해버렸어!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의아해하던 나는, 거창한 무기에 부합하는 거창한 바선생님들 떠올렸다.
"아냐.. 아닐 거야.. 분명.. 그냥... 그래! 군인들이니까! 가장 편한 도구를 가져다 놨겠지!"
하하하. 맞아 바로 그 이유야.
툭-
그 순간이었다. 머리 위로 뭔가 묵직한 것이 떨어진 기분이 든다. 뭐지 하고 만지려는 순간.
사사사사삭-
뭔가 여러 개의 다리가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내 정수리에서!!
"으악!!"
나는 롹스타에 빙의하여, 미친 듯이 헤드뱅잉을 했다.
"하... 하..."
난 체력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머리를 흔들어 재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선생님을 찾는다. 안 보여? 왜 안 보여! 더 불안해! 혹시나 해서 머리를 만져보려는 데.
사사사사삭-
바선생이 죽은 척하고 있었다! 가공할 흡착력으로 아직까지 붙어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악!"
난 생각을 멈췄다.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의식적으로 돌벽에 머리를 부딪치려 하고 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그리고 계산한다.
분명 이 각도로 부딪히면, 바선생님이 내 머리 위에서!!
자, 잠깐만. 멈춰봐 내 머리! 관성을 이겨내란 말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정해진 운명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난 내 무의식에 지고 말았다..
푸직-
"으아아악!!"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정수리를 '원형탈모가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 쥐어뜯은 상태였다. 숨은 거칠었고,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
"앞으로... 9마리..."
나의 박치기로 운명을 달리하신 선생님의 유체를 바라보았다. 그분께선.. 내 주먹만 하셨다.
"여긴... 지옥이야..."
지금 이 순간 내가 바라는 단 한 가지는, 한시바삐 이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 난 그것을 위해, 테이블로 향했다.